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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준 지사의 묘소
 정명준 지사의 묘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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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준(鄭命俊) 지사의 묘소를 참배한다. 지사는 1900년 7월 26일 경북 칠곡에서 출생하여 1959년 8월 22일 타계했다. 스물다섯 살이던 1924년 <혁조(革潮)>라는 잡지를 내려 했으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제가 발행을 금지했다. 이듬해인 1925년 9월 29일 지사는 방한상·신재모·서동성 등 동지들과 함께 대구에서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따라서 정명준 지사의 국가보훈처 공훈록의 '공적 내용'은 앞서 참배한 우해룡, 방한상, 신재모 지사의 공적 내용과 흡사하다. 함께 활동했고, 함께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기 때문이다.

정명준 지사가 방한상, 신재모, 우해룡 동지와 함께 조직한 진우연맹은 11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대구노동친목회(大邱勞動親睦會)를 세력권에 두고 있었다. 또 일본의 무정부주의 단체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과 연계 투쟁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진우연맹은 항일운동의 구체적 방법으로 향후 2년 내에 대구 부내의 도청·경찰서·우체국·법원을 비롯하여 일본인 점포를 파괴하고, 지사·경찰부장 등 관청 수뇌부 암살을 계획하였다.

암살과 폭파를 계획했지만 거사 전에 피체

계획의 실행을 위해 진우연맹은 파괴단(破壞團)을 조직하였고, 상해에 머무르고 있던 무정부주의자 유림(柳林)을 통해 폭탄을 입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1928년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정명준 지사와 김용규 지사의 묘소 등이 있는 제4 묘역 전경
 정명준 지사와 김용규 지사의 묘소 등이 있는 제4 묘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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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준 지사 묘소의 서쪽은 김용규(金容圭) 지사의 묘소이다. 지사의 묘소 앞에는 1978년 7월 15일에 세워진 특이한 형태의 비가 세워져 있다. 내용도 특이하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목사 김용규 선생 묘비>를 읽어본다.

"평생을 오로지 주님을 섬기시고 주님의 뜻에 따라 나라와 이웃을 위해 꼿꼿하고 의롭게 힘쓰셨던 교우 김용규 목사께서 여기에 고이 누우시다. 1895년 1월 24일에 태어나셨고 1968년 5월 20일에 부르심을 받으셨다."

독립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이 1977년 10월에 쓴 비문이다. 묘비의 왼쪽 부분에 새겨져 있다. 묘비의 오른쪽은 청록파 시인 박목월(1977년 10월 당시 대한시인협회장)이 쓴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충실한 목자로서
어린 양들을 기르며
겨레의 양심을
굽히지 않고
곧게
깨끗하게
일생을 사신
김용규 목사님
그의 무덤 속에서
부활의 나팔소리
울려 오리라"

김용규 지사 묘소의 시비. 청록파 시인 박목월과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의 글이 새겨져 있다.
 김용규 지사 묘소의 시비. 청록파 시인 박목월과 기미독립선언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의 글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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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시인은 김용규 지사의 장남 김건(金健)과 아주 절친하게 지냈던 계성학교 동기동창이다. 김용규 지사 본인도 계성 동문으로 4회 졸업생이니 박목월 시인의 대선배이다. 게다가 지사의 손자, 곧 김건의 아들 승보(承甫)씨 또한 계성고등학교 50회 동문이니 3대가 내리 계성가족인 보기 드문 동문 집안이다.

김용규 지사는 경산군 남산면 반곡동에서 선비 김응두(金應斗)의 외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일찍 선진 문물에 개화한 집안에서 태어난 지사는 기독교 입문 후 계성학교와 평양신학교(주기철 목사와 동기)를 졸업했다. 처음에는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는데 평소 일제의 만행에 분개해온 차였기에 1918년 광복회의 부름을 받자 바로 항일운동의 선봉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교사로 근무하면서 틈이 날 때마다 전도를 겸해 국민회 결사를 목적으로 전국 각지를 돌면서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러다가 부친 김응두 선비, 동지 박승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중 항일운동에 투신

1920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을 위해 활동하다가 동지 이종식과 함께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후 기독교 항일단체인 경지사(經志社)에 입사한 후 세 확장을 위해 동지를 규합하던 중 또 다시 고문을 당했다.

지사는 1925년 목사 서품을 받은 후 대구서문교회, 경산교회에서 교목하면서 선교사 버그만 씨를 통해 미국의 헐 국무장관에게 일본의 학정을 폭로하면서 우리의 독립을 지원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처럼 적극적으로 국내외에 걸친 항일운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1937년에는 진주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다시 일본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것은 예정된 결과였다.

김용규 지사의 묘소와 그를 기려 박목월, 이갑성이 쓴 글을 새겨둔 시비
 김용규 지사의 묘소와 그를 기려 박목월, 이갑성이 쓴 글을 새겨둔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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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이 될 때까지 무려 37회에 걸쳐 구금, 투옥, 고문을 당했으니 하루도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1945년 광복 이전 약 7년간(1939년 이후)은 경산경찰서와 대구헌병대의 철저한 감시 속에 집 안에 갇혀 지내는 금족령을 당하여 포로 같은 생활을 겪었다. 마침내 지사는 꿈에도 그리던 조국해방의 그 날을 맞이했고, 1945년 8월 17일 경산군민 500여 명이 운집한 자리에서 '경산군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여운형의 '건준'과 무관한 경산의 자발적 조직임)으로 추대되었다.

1947년 12월 26일에는 충청북도 인사처장(경찰을 제외한 행정, 교육공무원 인사권자)으로서 군수 4명을 임명했다. 1948년 6월 30일에는 경상북도 인사처장으로 전근하여 군수 6명을 임명했고, 중앙정부에 경북 도지사로 김의균, 경산 경찰서장으로 장한우 씨를 추천했다.

정치권의 요청 뿌리치고 종교계 복무

시간이 흘러 정국의 어느 정도 안정되자 신익희, 함태영, 안재홍 씨 등 정치권 핵심 인물들로부터 정계 투신 권유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와 출세에 전혀 뜻을 두지 않았던 지사는 대구성경고등학교(대구신학교 전신) 교장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남산교회 담임목사로 일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전국 기독교 구국회 회장으로 활동했고, 1952년에는 경북 삼일 동지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2018년 5월 1일 신암선열공원이 국립묘지로 승격되던 날의 김용규 지사 묘소. 태극기와 꽃이 묘소 앞에 꽂혀 있는 점이 여느 날과 다르다.
 2018년 5월 1일 신암선열공원이 국립묘지로 승격되던 날의 김용규 지사 묘소. 태극기와 꽃이 묘소 앞에 꽂혀 있는 점이 여느 날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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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사의 꼿꼿한 지도자적 품성은 다음 일화를 통해 고스란히 확인된다. 1950년 대구 지역 목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동해안 감포로 갔다. 당시 미군은 영천이 무너지고 곧 이어 울산 태화강 방어선까지 붕괴되면 인천상륙작전도 포기하고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미군은 한국인 약 10만 명을 괌도와 하와이로 데리고 갈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부응하여 대구의 목사들은 미국 선교사의 주선으로 다들 동해안 감포에 마련된 임시 대기소로 갔던 것이다.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서였다.

김용규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에는 인물 사진이 없다. 게다가 공식 기록이 없어 독립운동가로서 표창을 받지 못했다는 뜻의 '무후로 인해 서훈을 받지 못했다'라는 글도 새겨져 있다.
 김용규 지사의 묘소 앞 표지석에는 인물 사진이 없다. 게다가 공식 기록이 없어 독립운동가로서 표창을 받지 못했다는 뜻의 '무후로 인해 서훈을 받지 못했다'라는 글도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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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목사들을 비난할 것까지는 없다. 당시 전황 자체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용규 목사는 혼자 대구에 남았다. 남산교회 현직 목사로서 "우리 교인이 한 사람이라도 피난을 가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목사인 내가 떠날 수 없다. 나는 단 한 사람의 신도라도 남아 있다면 그를 지키기 위해 교회에 머무를 것"이라며 감포로 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뒤 김용규 목사는 교계의 영웅 대접을 받았다.

일제에 저항하여 37번이나 체포, 구금, 투옥, 고문을 당한 김용규 지사!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국가가 이 분에게 독립운동 관련 훈장조차 수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제가 물러가면서 수사 기록을 태워버려 문서상의 근거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당시 경산경찰서 마당에서는 사흘 동안 문서를 불태우는 연기가 솟았다고 전해진다. 묘소 앞 표지석에는 '무후로 인한 서훈 미취득'이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 그런 까닭에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도 김용규 지사에 대한 안내가 없다.)

줄기찬 항일 투쟁, 그러나 표창은 없고

제말 장군을 기리는 정려가 경북 성주읍 성주여고 입구에 세워져 있다. 정려 왼쪽의 표지석은 이 정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곳이 성주성의 서문이 있던 곳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말 장군을 기리는 정려가 경북 성주읍 성주여고 입구에 세워져 있다. 정려 왼쪽의 표지석은 이 정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곳이 성주성의 서문이 있던 곳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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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투사 제말 장군은 훗날 조정 대신의 꿈에 현몽하여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후손들을 꾸짖었다. 이 전설은 1629년(인조 7)에 태어나 1711년(숙종 37)에 타계한 남구만이 경북 성주에 왔다가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문집 <천집>에 실음으로써 지금까지 전해진다.

성주문관 정석유가 급제하기 전 어느 달빛이 매우 밝은 날 새벽에 정자(지이헌)에 올라 시를 읊고 있었다. 그때 관원 한 사람이 나타나 "나는 오래 전 사람인 제(諸) 목사다. 이 고을의 선생안(先生案, 관리들의 근무에 대한 공식 기록)에 보면 찾을 수 있다. 고성현에서 임진왜란 왜적을 토벌하고 이곳 목사가 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전사하는 바람에 이름을 떨치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기룡과 함께 적을 물리치고 공적이 그보다 못하지 않은데, 정기룡은 사후에도 공적을 인정받고 통제사가 되었지만 나는 후세에 이름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 대장부로서 참담함 심경"이라고 한탄했다. 정석유가 매우 이상하게 여겨 다음날 성주의 선생안을 찾아보니 목사 제말(諸沫)이 계사년(1593) 정월에 부임하였다가 4월에 그만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관리의 꿈에 나타나 임진왜란 투쟁을 증언한 제말

정익하가 영남 안찰사로 와서 정석유에게서 제말이 나타난 꿈 이야기를 들었다. 정익하는 칠원의 어떤 마을에 있는 제말의 묘소가 돌보는 자손이 없어 황폐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칠원현감 어사적에게 분묘를 다시 하고 잘 관리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그런데 정익하의 지시가 당도하기 며칠 전에 칠원현감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한 관원이 나타나 '감사가 분묘를 보수하라고 명을 내릴 것이니 그대는 꼭 명심해 달라'고 말했다. 현감은 며칠 뒤에야 안찰사가 보낸 공문을 받았다.

이제라도 우리 후대인들은 김용규 지사와 같은 선열들이 한 분도 빠짐없이 건국훈장을 추서 받고, 국사에 귀한 이름이 기록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훈장 따위를 받으려고 선열들께서 온몸을 고문의 상처투성이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후손들을 제대로 교육하려면 결코 현창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계속)

신암선열공원 중 동쪽의 높은 지대에서 내려본 풍경. 사진의 왼쪽(동쪽)에 금호강이 보이고, 오른쪽에 대구관광고등학교가 보인다.
 신암선열공원 중 동쪽의 높은 지대에서 내려본 풍경. 사진의 왼쪽(동쪽)에 금호강이 보이고, 오른쪽에 대구관광고등학교가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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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운동가 공훈록' 참조



태그:#박목월, #김용규, #제말, #신암선열공원, #정명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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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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