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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는 관찰 대상이 되기엔 어려운 위치에 있다. 내 정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이들의 입을 통해서만 그 상태를 알 수 있다. 그동안은 정수리 상태에 대해 외면해 왔다. 정수리를 만져보면 머리칼이 현격하게 적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날은 아니었다. 아이들과 아내가 쇼핑하는 동안 나는 길 건너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쇼핑이 길어지자 거리를 지나는 이들의 행렬도 밋밋해졌다. 그때 문득, 내 정수리가 진짜로 궁금해졌다.

아이폰을 들어 셀프카메라로 정수리를 찍었다. 불행히도 초점이 잘 맞은 정수리 사진 한 장이 앨범에 저장되었다. "헉!" 거의 대머리 수준이었다. 무진장 슬펐냐고? 아니, 순간적으로 안도의 웃음이 퍼졌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8월 입대를 앞둔 막내아들 때문이었다.

대머리 유전자는 대를 건너뛴다는 속설이 있다. 아들은 머리숱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보일 만큼 풍성하다. 그렇다면? 내가 대머리라면 아들은 대머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아들이 대머리가 되느니 차라리 내가 대머리가 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다. 그러나 그게 나의 소관이 아니니 그냥 처분만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내 머리가 빠지고 있으니 아들은 구원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할렐루야!"

순간적인 생각들이지만 나 자신이 웃겼다.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진대, 부모님 살아생전에 부모님 입장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던 이기적인 아들이 바로 나다. 내가 부모님에게 냉랭했던 것만큼 우리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대접해도 자업자득일 것으로 생각했다.

부모님 모두 돌아가신 후에야, 이젠 그리워도 만날 수 없음이 현실이 된 후에야 나는 부모님의 자식이 되었다. 그제야 살아생전 사진을 보고, 추억을 떠올리고, 조금 더 잘해 드렸으면 후회하고, 고마워하고, 삶이 힘들거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부모님 무덤에 꽃 한 다발 사 들고 가서 "엄니, 아버지, 저 왔어요" 하고는 걱정하실까 봐 정작 내 고민은 말하지도 못하고 돌아온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이미 두 시간여 묘지로 가는 시간에 복잡하던 생각들이 정리되었던 것이다. 살아생전에 효자여야지 돌아가신 후에 효자인 듯한 것도 불효인 듯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아이들 먹이려고 집과 묘지를 오가는 길에 있는 '횡성한우'를 산다. 물론, 매 번은 아니다.

이 땅에서 95세의 삶을 사시다 오신 곳으로 귀천하신 아버님, 아버님은 젊은 시절부터 머리 숱이 적으셨다. 유전자는 용케 나를 피해가는 것 같았다.
▲ 아버님 영정사진 이 땅에서 95세의 삶을 사시다 오신 곳으로 귀천하신 아버님, 아버님은 젊은 시절부터 머리 숱이 적으셨다. 유전자는 용케 나를 피해가는 것 같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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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귀천하신 어머님 곁에 아버님을 모셨다.
▲ 합장 먼저 귀천하신 어머님 곁에 아버님을 모셨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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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은 아버지님이 돌아가시기 2년 전 하늘로 가셨다. 아버님은 작년 어버이날을 보내고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 어버이날을 대충 보낸 것 같아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식들을 바라바리 만들어 갔고, 아버지는 아주 오랜만에 맛난 식사를 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는지 속이 안 좋으시다고 하셨고, 며칠 뒤에는 기어이 응급실로 실려가셨다. 그 며칠 뒤에 영영 이별하셨다.

지인들은 '장수를 하셨네, 아프지 않고 돌아가신 것이 감사한 일이네, 마지막으로 드시고 싶은 거 다 드시고 가셨네, 그래도 백수는 아니지만 근접했으니 복 받으신 것이네' 하고 위로했지만, 그냥 위로는 되지 않았고, 또 위로받지 않아도 될 만큼 나도 나이가 들어 있었다.

아버님 가시기 2년 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으니, 나는 완벽하게 어버이를 여의고 어버이가 되었다. 그런데도 실감하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나를 위해 뭔가를 사왔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뭘, 이런 걸" 하다가도 얼른 입을 씻고 받는다.

살아생전 어머니는 늘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85세의 삶을 사시고 귀천하시었다.
▲ 어머니 살아생전 어머니는 늘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85세의 삶을 사시고 귀천하시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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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과 아버지가 늘 그러셨다. 미련한 아들은 나중엔 진짜인 줄로 알았다. 진짜로 생선대가리를 좋아하시는 줄 알았고, 검소하셔서 진짜로 명품은 안 좋아하시는 줄로 알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뭔가 선물을 하면 싫다고 하지 말고,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혹시 우리 아이들이 오해할까 봐.

사실, 이번 외출도 그랬다. 나는 아들과 조조 영화를 보았고, 쇼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와 쇼핑을 좋아하는 아내를 배려해서 딸들은 엄마와 영화를 보는 동안 쇼핑을 했다. 점심은 애완견도 입장 가능한 곳이라 완벽한 모든 식구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는 장소를 정한 둘째가 점심을 산다고 한다. 뱃살 고민을 하다가 이제부터 열심히 운동할 예정이라고 했더니만, 아들이 미리 운동화를 봐둔 게 있다고 한다. 그런데 값이 장난이 아니다.

여태껏 운동화를 그런 가격을 주고 사본 적도 없고, 살 생각도 없는 가격이었다. 그런데 이건 아들이 사주겠단다. 큰딸은 엄마 원피스를 사주겠단다. 딸들은 직장에 다니고, 입대를 앞둔 대학생 아들은 틈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돈을 모았나 보다.

"애들아, 어떻게 번 돈인데..." 하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다가, '그래, 아무 말 말고 받자' 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내가 받은 만큼 또 주면 되고, 사실 지금껏 키워준 것(자라주었을지도)만 해도 얼만데?

"얘들아, 이번 어버이날 선물은 없어도 되겠다."
"아빠, 지금 우리가 어버이날 선물하는 거야."
"그랬구나."

이제 어버이날이라고 선물을 드릴 분도 없다. 물론, 처가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계시지만, 아내는 섭섭할지 몰라도 나는 마음이 괜스레 허하다.

천편일률적인 카네이션이 아닌 요즘의 카네이션
▲ 카네이션 천편일률적인 카네이션이 아닌 요즘의 카네이션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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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좋겠다. 선물을 드릴 부모님께서 다 살아계시니 말이다. 그래도 간혹 솔직하게 내가 속 편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어느 순간에는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부모와 자식 간에는 늘 그렇게 서로에게 짐을 때가 있으므로 어느 한 쪽의 짐은 벗어버린 내가 홀가분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아이들이 카네이션 말고도 선물을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흔쾌히 받지 못했다. 부모님께서 살아계신 까닭도 있었고, 아직도 나는 아이들에게 베풀 나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버이라는 것이 어색하기만 했던 것이다. 올해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이제 머리도 희끗희끗 거리고, 친손주를 볼 나이도 되었고, 정수리 머리칼도 휑한데 '어버이날'이 어색하지 않아도 되겠지. 단지, 조심해야 할 것 하나, 생각만큼은 '어버이연합'인지 뭔지 하는 흐리멍덩한 친구들처럼 되지는 말아야지. 어느새 할아버지처럼만 느껴지던 '어버이연합'이 친구처럼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네.'

어버이날, 꽃 한다발 사 들고 어머님 아버님 만나러 가야겠다. 오는 길에는 횡성한우도 푸짐하게 사 와서 아이들과 구워먹고. 그리고 "어버이 날에도 너희들에게 선물을 줘야 맛이지" 애교를 피워볼까?


태그:#어버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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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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