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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자폐증 인식의 날'인 2일 오후 발달장애아 부모 200여 명이 집단 삭발식을 벌였다. 삭발에 나선 이들은 사고 등으로 부모가 세상을 떠나도 발달장애아가 기본적인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를 하루빨리 실현한 것을 정부에 호소했다.

삭발까지 하면서 정부에 호소한 이들이 한 말 중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도'라는 말이 귓가에 맴돈다. '평생 자식 돌봄'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발달장애아를 둔 부모가 자신이 죽고 난 후를 걱정해야 한다면 그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돌봄은 가족이든 전문 간병인이든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돌봄을 필요로 하는 이가 어디 발달장애인뿐이랴. 우리 사회는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놀라운 속도로 늘고 있는 장수사회다. 그런데 돈이 없거나 가족이 없을 경우 돌봄 받을 수 없는 사회라면 아무리 장수사회라 해도 건강하다 할 수 없다.

<간병 살인>. 제목만 놓고 보면 어딘가 음산하고 계략이 숨어 있는 추리소설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간병 살인>은 장수사회인 일본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미아니치신문 사회부가 기획 보도한 기사들을 엮은 책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고, 가히 충격적인 이야기들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간병 살인> 마이니치신문 <간병 살인> 취재반 지음, 남궁가윤 옮김. 시그마북스 출판
▲ 책표지 <간병 살인> 마이니치신문 <간병 살인> 취재반 지음, 남궁가윤 옮김. 시그마북스 출판
ⓒ 시그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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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분위기는 무겁다. 특별히 부모와 자식, 부부와 형제자매가 가족 중 누군가를 죽이는 친족 살인을 우리는 흔히 패륜범죄라 부른다. 사회는 이런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려 들지 않는다.

변호사마저 나서기를 주저하는 게 패륜범죄다. 하지만 인간성 상실을 논해야 할 정도로 참담한 사건 중에는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른 현실이 숨어 있기도 하다. <간병 살인>은 세상이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던 사건 가해자들에게 다가간 기자들이 써 내려간 이야기다. 그들은 왜 가해자를 취재했을까?

"거의 보도되지 않는 그들의 속내야말로 재택 간병을 둘러싼 현실을 재검토하는 계기가 될 터이다. 지금은 간병과 상관없는 사람들도 앞으로 다가올 간병하는 일상이나 떨어져 사는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11쪽


<간병 살인>은 벼랑 끝에 몰린 가족의 고백이다. 가해자들은 왜 사랑하는 가족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물으면서도 그들의 자책을 담기도 한다. 일본은 고령화가 진행되며 간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놀라운 속도로 늘고 있다.

장수 사회는 가족에 의한 간병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간병해야 할 상황이 닥친다면, 어디에 무엇을 상담해야 할지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간병 살인>은 사전 지식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 지식은 누구든지 간병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닥칠 수 있다는 현실 인식이 우선이다.

"누구든 늙으면 다리와 허리가 약해지거나 병에 걸려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생활할 수 있게 된다." -225쪽 


부모가 고령이 되어 "내가 죽은 뒤에 이 아이는 어떻게 될까?" 하고 고민하는 일이 남의 일일 수만은 없다. 간병 스트레스로 인한 살인이나 동반자살 역시 간과할 일이 아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간병 스트레스로 인한 살인이 전체 살인 사건에서 3~6퍼센트를 차지한다.

"2007~2014년까지 8년 동안 전국에서 371건이 발생했다. 연평균 46건이며, 8일에 1건 꼴로 일어난다는 이야기다." - 103쪽


이처럼 <간병 살인>은 가족을 붕괴시키는 간병 생활의 민낯을 드러낸다. 살인 사건 이면에 있는 이야기들을 추적해 나가며, 사건 원인을 분석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간병 살인>을 읽다보면 치열한 기자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마이니치신문 기자들은 '간병 살인'이라는 자극적일 수도 있는 기사를 다루면서 결코 자극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정죄하려 들지도 않았고, 일부러 두둔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가해자들을 취재함으로 간병 사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힌트를 찾고자 했다.

살인 사건 당사자가 가슴속에 봉인한 사실을 끄집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이 있어야 할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마이니치신문은 기획보도를 다루며, 현재를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닥친 문제를 주제로 삼았다. 더불어 사회 구석진 곳에서 조용히 지내며 주위에도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에게 꼭 증언을 들음으로 본질을 드러내려고 애썼다.

아무리 기자라 해도 사회가 지탄하는 가해자가 한 말에 귀를 기울이기 쉽지 않다. 그런 면에서 마이니치신문이 <간병 살인>을 기획 시리즈로 접근한 사실은 저널리즘이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말해 준다. 그들은 간병 살인에 관해서는 가해자들의 마음을 돌보는 시스템이 필요함을 들춰냈다. 1982년 퓰리처상 수상자인 존H.화이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누구나 자기만의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노래를 불러주죠. 저널리스트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할까요?" 


자이니치신문 기자들은 저널리스트가 해야 할 일에 충실했다. 그들이 사회에 던진 질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건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요? 그 사람들을 구할 수는 없었을까?" -133쪽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재택 간병이 당연한 시대가 되고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간병하는 일을 당연하다고 치부해 버리면 안 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간병인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과 조직을 강화해야 한다. 간병 살인자들을 판결했던 일본의 한 판사는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재판받고 있는 것은 피고만이 아니다. 간병 제도와 생활호보 방식의 책임도 묻고 있다." -114쪽


한국이라고 평생을 간병과 무관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간병 살인>은 정책 입안자와 돌봄 서비스 관계자들이 읽어볼 만하다. 그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돌보고 있는 간병인과 그 가족에게도 권하고 싶다.


간병 살인 - 벼랑 끝에 몰린 가족의 고백

마에다 미키 외 지음, 남궁가윤 옮김, 시그마북스(2018)


태그:#간병 , #재택 간병, #살인, #저널리즘, #기자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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