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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안점순 할머니의 구순 잔치가 열렸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카들과 함께 참석해 시민들의 축하를 받았다.
 지난해 12월 안점순 할머니의 구순 잔치가 열렸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카들과 함께 참석해 시민들의 축하를 받았다.
ⓒ 유투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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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동원 피해자 고 안점순(90) 할머니가 지난 3월 30일 영면했다. 유족은 "할머니께서 노환으로 편안하게 운명하셨다"라고 전했다. 지난 3월 31일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안점순 할머니의 추모식이 열렸다. 다음날인 4월 1일 발인을 마친 뒤 경기 수원 승화원 추모의 집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현재 생존해 있는 위안부 피해자의 평균 연령은 91세다. 정부에 정식 등록된 피해자 수는 29명으로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그동안 위안부 피해 사실은 언론과 관련단체 활동을 통해 많이 알려졌지만, 한 분 한 분의 동원 연령, 동원 방식, 해방 이후의 삶은 알려진 바가 드물다.

14세, 서울 마포에서 끌려가... 4년간 위안부 생활 강요당하다

안 할머니는 14세 때 서울 마포에서 끌려가 4년간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자녀가 없었지만, 손위 오빠가 남긴 다섯 조카가 의지처가 돼줬다. 할머니는 2002년 정대협과 만나면서 여성인권·평화활동가로 변신했다. 할머니의 생전 영상을 보면 자기표현을 잘하고 당찬 여장부의 면모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할머니가 처음부터 피해자의 목소리를 내고 운동에 합류했던 것은 아니었다.

윤미향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는 블로그에서 할머니와 만나게 된 사연과 할머니의 삶을 전했다. 윤씨는 지난 3월 30일 오후 자신의 블로그에 "할머니 신고서에 '대인기피증'이라는 다섯 글자가 어쩐지 '나는 외롭다'는 다섯 글자로 읽혀지기 시작했다"라면서 "그래서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라고 운을 뗐다.

그는 "할머니와의 첫만남에서 고향과 가족, 하고 있는 일을 설명해 드리며 할머니께 믿어도 될 사람이라는 신뢰를 드리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라고 회상했다. 할머니는 서서히 윤씨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윤씨를 "오마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윤씨의 남편을 "아바이"라고 부르고, 부부의 딸을 손녀처럼 살갑게 대했다. 윤씨는 글에서 "제게 문을 열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적었다.

"할머니가 처음으로 위안부로 끌려간 이야기를 시작하던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당하지 않으려고 도망을 다니던 이야기를 할 때에는 빗소리가 어쩐지 그 때, 그 날을 연상케 해주는 것 같아 더 처절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30분마다 할머니는 담배를 피웠다. '언제부터 담배를 피우셨냐' 여쭈니 그 때 열네 살 끌려갔던 그 전쟁터에서 견딜 수가 없어서 피우게 됐다고 하셨다." 

그렇게 안 할머니는 정대협과 인연을 맺고 자신의 피해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구술기록으로 남겼다. 할머니는 1928년 서울 마포 복사골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29세에 홀로된 어머니가 점순이와 손위 오빠, 여동생 등 3남매를 키워냈다. 어린 시절부터 남의 집 아기 보모 노릇을 하는 등 일찍 철든 아이였다.

점순이는 열네 살이던 1941년 고향에서 강제동원됐다. 점순이는 엄마가 따라오며 "내 딸을 어디로 데려가느냐며 울부짖던 기억이 생생했다". 딸들을 태운 기차가 서울에서 평양으로, 다시 베이징, 텐진을 거쳐 내몽골까지 갔다. 인적도 없고 산도 없는, 사방이 모래만 보이는 곳으로 끌려갔다. 전선마다 끌려다니며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4년간 전쟁터에서 유일한 위로는 담배였다. 그렇게 그의 삶에 담배가 들어왔다.

천신만고 끝에 베이징으로, 한국으로.. 그 후의 삶

안점순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
 안점순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
ⓒ 윤미향 정대협 대표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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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위안소에서 일어나 보니 위안소 주인이 도망가고 없었다. 군인들도 오지 않았다. 점순이를 비롯한 여자들을 사지에 놓고 떠나버렸던 것이다. 팔로군과 러시아군의 총격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몰랐다. 수중에 가진 돈도 없었다.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아무데나 쓰러져 잠을 자고 밤낮으로 걸었다. 중국 민가에서 밥을 얻어 먹으면서 베이징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광복군 윤아무개씨를 만나 그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냈다. 해방이 된 지 1년여 만에 텐진에서 배를 타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인천항에 내린 점순이는 전차를 타고 마포종점에 내렸다. 집이 있는 복사골로 가는 길에 엄마와 극적으로 만났다. 엄마는 떡시루를 머리에 이고 있었다. 딸이 어서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점순이는 집으로 돌아와 석 달을 꼬박 앓았다.

그의 삶은 해방 후에도 고달팠다. 온갖 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돈을 벌어 살아남아야 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대구로 피란했다. 전쟁 후엔 엄마와 함께 미군부대에서 빨래를 했다. 그 뒤 대구와 강원도 등지의 식당에서 일하다가 직접 식당을 열었다.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언론에 나와 알렸다. 65세 때인 1993년 막내조카 딸이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신고하도록 도왔다. 끔찍했던 위안부 피해 경험을 그렇게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신고 후에도 할머니는 오랫동안 피해자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얼굴을 보이는 것도 거부한 채 홀로 지냈다.

신고를 한 후 10년이 지난 2002년 초 정대협을 만났다. 이후 할머니의 삶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인권캠프, 수요시위, 아시아연대 회의 등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국제노동기구(ILO) 활동가들을 만나 피해 사실을 진술했고, 일본에도 건너가 증언집회에 참가, 본인이 겪은 참혹했던 전쟁을 일본 시민 앞에서 진술했다. 살아 남은 증인이자, 생존자, 역사 교사, 평화운동가, 여성인권 활동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어떻게든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

지난해 3월엔 89세의 노령에도 유럽에서 처음으로 독일 레겐스부르크 비젠트 공원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했다. 같은 해 11월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에서 수여하는 여성인권상을 받았다. 김복동, 이옥선 할머니와 함께였다. 지난해 12월엔 수원평화나비, 정대협 등 여러 시민단체가 할머니의 구순을 축하하는 잔치도 열었다. 할머니는 생전에 자주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어떻게든 전쟁이 없어져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 같은 여자들이 안 생기지. 세상이 많이 좋아졌지. 이렇게 좋은 날이 올지 몰랐어. 이렇게 수고해주니 너무나 고마워. 그 당시만 해도 누구 한 사람 나서는 이가 없고, 시국을 잘못 만나서 전쟁도 여러 번 겪고 고생도 많이 했어. 저들이 스스로 반성을 해야 되는데. 그놈들 원수를 어떻게 갚겠노. 빨리 해결을 잘 지어야 할 텐데..." 

지난 3월 8일 수원시가 제작해 공개한 다큐멘터리 <안점순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에서 안 할머니는 느리지만 분명한 어조로 "이제라도 자기들이 말 한마디라도 사죄 한 마디 하면 다 끝날 일이다"라며 "억만금을 준들 내 청춘이 돌아오겠나. 자기들이 열 번 백 번 대통령한테 사과했다고 하지만 본인들 곁에 와서 한마디라도 하는 게 그게 원칙 아니냐. 말 한마디라도 듣고 싶다"라고 호소했다.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중국 윈난성 위안부 영상. 미군이 직접 촬영했다.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굴한 중국 윈난성 위안부 영상. 미군이 직접 촬영했다.
ⓒ 유투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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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동원 피해자 수는 연구자마다 큰 편차를 보인다. 대체적으로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위안부의 한국인 대 일본인 비율을 두고도 다양한 학설과 논쟁이 존재한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초 문헌자료집>(2002)에 따르면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동원된 여성 중 약 80%를 한국인으로 보고 있다.

그간의 연구를 종합해 보면, 동원방식은 주로 위안소 업자와 이들이 고용한 모집인의 취업 사기, 감언이설, 기망 행위에 따른 '유인' 납치가 많았다. 일종의 인신매매라고 할 수 있다. 인신매매는 당시에도 불법이었다.

일본 <아사히신문>이 인용해 보도한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은 한국과 일본 등 국내외 학계에서 폐기된 지 오래됐다. 요시다 세이지는 지난 1982년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943년 제주도에서 일본 관헌이 미혼인 조선인 여성들을 사냥하듯 징발해 위안부로 삼았다"라고 증언해 파문이 일었다. 그 후로 수십 년간 '요시다 증언'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요시다는 지난 2000년 사망 전 "사실을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라고 자신의 거짓 발언을 인정했다. 이것을 두고 일본 극우파가 여성들을 '강제 연행'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한일 양국의 위안부 연구 학자들은 일본군이 직접 여성들을 총칼로 위협해 동원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일본군이 민간업자들을 선정해 이들에게 여성들을 모집해 오라고 지시한 것이기 때문에 강제성 여부는 변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강제성 여부에 집중하는 것은 일본 극우파의 논리에 휘말리는 것이라고 경계한다.

"강제성 여부를 따지는 건 일본 극우파 논리"

김철 연세대 교수는 "강제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일본 극우파의 논리다. 그들의 논리는 자발적으로 간 것이면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이라면서 "여성들을 피해자와 자발적 매춘부로 이원화시켜 조직적으로 이뤄진 일본의 국가 범죄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여성들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민간업자와 모집인들은 시골로 내려가 가난한 가정을 찾아다니며 "딸에게 송금받을 수 있다" "군병원에서 부상병들을 간호해주는 일이다" "일본의 공장으로 간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할 수 있다" 등 적극적인 기망 행위로 취업사기를 벌였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넓은 의미의 강제동원이라고 부른다. 모집인 중 일부는 미성년 여자아이들에게 접근해 '순사'나 '군인'을 사칭하며 끌고갔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은 이들의 이러한 불법 행위를 묵인하고 방조했다. 즉 어떤 방식으로건 여성들을 모집해 오기만 하면 문제삼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2003년께 경북 경주의 한 헌책방에서 발굴돼 2013년 출판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아래 <일기>)에 따르면 이렇게 모집된 여성들을 일본군 사령부가 직접 위안소 업자(포주)를 통해 통제·관리했음이 드러났다.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 주오대 교수는 위안소의 유형을 운영 형태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군 직영의 군인·군속 전용 위안소, 둘째는 형식상 민간업자가 경영하나 군이 관리·통제하는 군인·군속 전용 위안소, 셋째는 군이 지정한 위안소로, 일반인도 이용하나, 군이 특별한 편의를 요구하는 위안소다. 

<일기>에서 화자가 운영한 유형은 두 번째다. 화자와 동료들은 자주 군사령부에 불려 들어가 위안소 운영에 관한 방침을 하달받았다. 영업 관련 서류들도 제출했다. 이에 따라 군의 하부조직으로서 위안소는 군의 명령으로 따라다닐 군대가 정해졌고, 위안부는 2년 단위로 취업과 폐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본인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폐업을 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요시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위안부의 자유로운 폐업은 법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일본 본국에서조차 잘 지켜지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과 대만 같은 식민지 및 점령지에선 자유로운 폐업이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나마도 위안소 업자들은 여성들에게 보수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고, 여성들은 위험한 전선으로 끌려다니며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한편, 올해 들어 세상을 떠난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3명이다. 올해엔 지난 1월 5일 임아무개 할머니, 2월 14일 김아무개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3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정부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받아 정식 등록된 피해자는 총 238명이었으나, 2018년 현재 29명만이 생존해 있다. 

[참고 문헌]
안병직 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이숲, 2013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희생자 지원위원회, <들리나요? 열두 소녀의 이야기>, 2013
모리카와 마치코,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아름다운사람들, 2005

덧붙이는 글 | 본문 중 안점순 할머니의 생애는 '전쟁과여성 인권박물관 블로그'에 올려진 본인의 구술 기록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태그:#위안부, #강제동원, #피해 ,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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