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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우유에 바나나가 없고 딸기우유에 진짜 딸기가 단 1%도 없다는 뉴스가 보도된 적이 있다. 과즙이나 과육 대신 인공 향과 색소가 과일 행세를 해왔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애용해 온 바나나우유에 배신감을 크게 느꼈다. 뉴스 보도 후 바나나우유의 명칭은 35년 만에 바나나'맛'우유로 바뀌었다.

바나나우유
 바나나우유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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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뉴스가 보도되기 훨씬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친구들과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다. 지금은 어딜 가나 원두커피지만 당시 대세는 생과일주스였다. 특히 두 가지 과일을 섞어 맛을 낸 주스가 인기였다.

나는 카페인 때문에 커피와 녹차, 홍차를 마시지 못하는 데다, 과일주스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카페엔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한 가지 메뉴가 있었다. 바로 바나나 생과일'우유'였다. 맛도 훌륭한 데다 가격도 가장 저렴했다. 이 바나나우유는 다른 카페에선 맛볼 수 없는 그 카페의 대표 메뉴였다.

바나나우유를 먹을 때마다 과연 무엇으로 이 맛을 내는 건지 궁금했다. 친구들은 사이다를 넣었을 거라거나 밀크셰이크와 바나나를 섞었을 거라는 등 여러 이야길 했지만 모두 추측일 뿐이었다.

얼마 후 인터넷 채팅으로 한 친구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내 단골 카페 이야기를 했더니 그 친구 눈이 동그래졌다. 예전에 그곳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몹시 반가웠다. 바나나우유의 비법을 알아낼 수 있는 순간이니 말이다. 그 친구의 대답은 놀라웠다.

"작은 바나나 한 개랑 우유를 갈면 돼. 다른 건 안 들어가."
"오, 그래? 그런데 값이 그렇게 쌀 수가 있어?"
"각얼음을 많이 넣잖아. 햄버거 집은 콜라로 돈 벌고 카페는 얼음으로 돈 버는 거야."

왠지 그 친구의 말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어른 느낌이 났다.

"너 그거 아냐? 그 카페 사장이 말해준 건데, 슈퍼에서 파는 바나나우유엔 바나나가 하나도 안 들어 있대."

어느 날, 나는 그에게 내일 그 단골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좋아할 거란 예상과 달리 왠지 그는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유를 물어도 확실한 대답 없이 어물쩍 넘어가는 듯했다. 나는 '예전에 일하던 곳이라 쑥스러워서 그런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약속한 그 시간, 그는 카페에 없었다. 30분이 흐른 뒤에야 겨우 바나나우유를 한 잔 시켰다. 잔에 가득 남은 얼음을 하나씩 깨어 먹는 동안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몇 번 삐삐를 쳤지만 연락은 없었다.

몇 개월 후 집 앞 가게에 갔을 때 문득 그 애의 말이 생각났다. 음료 냉장고에서 바나나우유를 집어 들었다. 성분표를 살펴보니 정말 바나나는 없었다! 아, 거짓말은 아니었구나...

요즘 판매하는 바나나맛 우유에는 과즙이 1~2%정도 들어있다. 아무리 그래도 생 바나나를 넣은 것과는 맛을 비교할 수 없다. 검은 점이 생겨 단맛이 강해진 바나나를 숭덩숭덩 잘라 컵에 넣고 포크로 걸쭉하게 으깬 뒤 우유를 부어 휘휘 섞어주면 끝. 믹서로 갈아도 되지만 우유 한잔 마시는데 설거지거리가 많아지면 곤란하다. 건더기 씹히는 맛도 있어 포크를 사용하는 편이 오히려 더 좋다.

한참 잊고 살다가도 바나나 우유를 마실 때면 이따금 그 친구가 떠오른다. 한때 내 머릿속을 장악했던 한 가지 궁금증, 즉 그 친구가 사라진 이유도 이젠 그리 궁금하지 않다. 끝내 알 수 없는 일들이 어디 그것뿐이던가. 확실한 건, 바나나우유 만드는 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는 것. 그리고 아주 맛있다는 것. 내 삶의 소소한 즐거움 중 하나인 바나나우유가 남았으니 이 정도면 그는 내게 꽤 멋진 인연이다. 이거면 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바나나우유, #단짠단짠그림요리, #요리에세이, #그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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