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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영국 런던에 다녀왔다. 영국의 방산전시회인 DSEi(Defence and Security Equipment International) 저항행동에도 함께하고 내가 활동하고 있는 국제단체인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의 카운슬 미팅(Council meeting)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DSEi는 한국의 아덱스(ADEX)와 같은 영국의 방위산업전시회로 아덱스와 같은 해 한달 먼저 개최되며 전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살인무기 시장이다. SDEi에 대한 소개는 오마이뉴스 기사 '전쟁은 트럼프의 입이 아니라 여기서 시작된다'를 참고하면 된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부터 이틀간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카운슬 미팅이 진행되었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카운슬 미팅은 1년에 1차례 온라인·오프라인 모임을 교차하며 진행되는 회의로, 조직의 활동과 다양한 임무를 평가하고 계획을 세우는 의사결정단위이다. 올해는 DSEi 저항행동과 연계하여 오프라인 회의로 진행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아주 특별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 40여 개국 90여 개 단체의 네트워크이고 카운슬 미팅에는 보통 세계 각지에서 20~30여 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하다보니 대부분의 회의에서 통역이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이번 회의에는 스페인어-영어 통역을 돕기 위해서 퀘이커의 루스 호머(Ruth Homer)씨가 함께하게 되었다.

루스씨는 영어사용자들 말이 너무 빠르거나 너무 목소리가 작거나 할 때 중간중간 신호를 보내며 시종일관 활달한 자세와 미소로 이틀간의 회의 일정 내내 함께했다. 통역을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쉬는 시간에도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활동가들의 비공식적 친교는 쉬는 법이 없었고, 덩달아 루스씨도 쉴 틈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소개를 하니 짬을 내어 루스씨가 말을 걸어왔다.

놀랍게도 루스씨의 부친 존 콘스(John Cornes)씨는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한국에 와서 의사로서 전후 재건을 도왔는데 이 활동이 그의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퀘이커가 전쟁과 억압의 피해자들을 도운 공로로 1947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애초에 이런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 1917년 병역거부자들에게 1차 세계대전 중 발생한 민간인 피해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일종의 대체복무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가까이 얘기를 들으니 아주 신통방통한 기분이었다.

루스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 2013년에 한국 정부가 수교훈장을 주었다며 당시 신문기사에 나온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에 당시 아버지가 찍은 사진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영국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가 전후 모든 것이 잿더미가된 한 나라의 재건을 도와 그 공이 인정되었지만, 그 나라는 여전히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나는 루스씨에게 한국에 돌아가면 꼭 서울역사박물관을 찾겠노라고 약속하였다.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피란민과 부상자, 팔다리를 잃은 어린이와 고아들에게 의술을 폈던 영국인 부부인 의사 존 콘스와 간호사 진 매리.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피란민과 부상자, 팔다리를 잃은 어린이와 고아들에게 의술을 폈던 영국인 부부인 의사 존 콘스와 간호사 진 매리.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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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에서 만난 존 콘스

한국에 돌아와서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전에 역사박물관을 가야겠다 생각했지만 ADEX 대항행동 캠페인으로 바빠서 바로 박물관을 찾지는 못했고 초겨울이 되어서야 겨우 짬을 낼 수 있었다. 콘스씨의 사진들은 역사박물관 1층 자료실에 사진집 <콘스가 본 1950년대 한국> 형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책을 펼치니 제일 먼저 젊은 시절 콘스씨 부부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콘스 부부는 1954년에서 1956년까지 한국에서 의료봉사를 했고 이 사진집은 그 기간동안 촬영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사진집이기 때문에 사진집 안의 텍스트들은 보통 열심히 안 읽고 지나가게 되는데, 사진과 곁들여진 글을 중심으로 봐도 콘스씨가 병역거부자이며 대체복무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했다는 것을 알기 힘들었다.

"의사와 간호사였던 콘스 부부는 종교 구호단체인 영·미 퀘이커 의료봉사단에 소속되어 군산에 수용된 피난민과 부상자, 고아 등을 위해 의료구호 활동을 하게 되었다."

다만 사진집의 뒷부분, 사진의 의의를 소개하는 글들 중 하나에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콘스는 1952년에 웨스트민스터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던 중 BBC TV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의 처참한 실상을 알게 되었다. 퀘이커 교도이었던 그는 전쟁과 군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인도적인 신념과 종교적인 이유로 간호사였던 진과 의논해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는 1952년 6월 한국 파견 영·미권 퀘이커교도의 봉사단체인 재한친우봉사단(Friends Service Unit, FSU)에 자원했으며, 1953년 런던에 있는 중앙의료전쟁취업위원회(Central Medical War Recruitment Committee)로부터 병역의무를 대신하여 한국에서 의료요원으로 복무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즉, 병역을 대체하여 한국에서 활동하였다는 것이었다.

재한친우봉사단이 당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궁금해서 루스씨가 알려준 홈페이지(quakersintheworld.org)에 들어가 보았다. 거기에 설명되어 있는 재한친우봉사단의 활약은 대단했다.

재한친우봉사단의 활약

1953년 한국 전쟁 직후 재한친우봉사단은 전쟁난민과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 의료지원을 제공하였다. 1950년 남북간의 전쟁이 일어났고 1951년 1월에는 한반도 인구의 3분의 1가량이 전쟁난민이 되어 있었다. 그 중 3만 명의 아이들이 고아원에 수용되었고 다른 많은 아이들은 쉼터조차 갖지 못했다고 한다. 유엔은 식량지원과 천연두, 장티푸스같은 질병을 막기 위한 예방접종을 실시하였으나, 결핵이 만연하였다.

1952년 10월, 유엔이 퀘이커를 포함한 민간단체들에게 구호 활동을 돕도록 초청해서 미국친우봉사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FSC)와 재한친우봉사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전라북도와 군산의 상황이 심각한 것을 확인, 자신들이 가장 필요한 지역이라 확신하고 이후 이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전라북도에는 주로 북한에서 온 전쟁난민이 20만 명, 군산에는 3만3천 명의 전쟁난민이 이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고 한다.

1953년 7월, 드디어 휴전이 체결되었고 재한친우봉사단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10월에는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스웨덴, 노르웨이 및 미국에서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로 구성된 국제팀이 도착하였다. 그들은 보통 한국인들이 사는 집에 살았고 지역 병원에서 수술을 집도했다고 한다.

군산병원은 일본이 한국에서 철수한 뒤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었고 그 후 미국에게 폭격을 당한 상태였다. 장비도, 난방도, 깨끗한 물도 없었고 전기 역시도 간헐적으로 흐를 뿐이었다. 미국친우봉사회는 음식, 의약품, 침구 등의 구호품을 실어날랐고 미국과 노르웨이의 사회복지사는 어떤 복지가 시급히 요구되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지역 자원봉사자들은 따뜻한 옷과 침구를 배포하였다. 집유소가 세워져 어린 아이들과 임산부에게 뜨거운 우유와 비타민을 제공하였다.

겨울 동안에는 영양실조를 다루는 것이 우선이었지만 난민 재활을 위한 계획 또한 수립되었다고 한다. 히로시마 원폭 이후 재건 사업을 도왔던 사람들이 한국의 난민들에게 주택 건설을 위한 물자와 훈련을 제공하는 건축 프로젝트인 'Houses For Korea'를 설립하였다.

캠프에서는 학교 수업이 시작되었고 재한친우봉사회에서는 이 학교에서 가르칠 한국 교사들에게 봉급을 지불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성인 문맹 퇴치 수업을 진행했고, 배구와 농구 경기를 하기도 했다. 봉제 기계가 들어왔고 여성들은 양장점, 세탁소, 두부를 만들어 파는 가게를 열었다. 염소, 꿀벌, 씨앗 등은 난민들이 스스로 음식을 공급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재한친우봉사회는 유엔과 협력하여 간호조무사를 위한 훈련학교도 운영하였다. 그들은 병원의 병리학 실험실을 복원하고 훈련된 실험실 기사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지역 장인이 만든 보철물을 전쟁에서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한 장비로 맞추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산전 및 조산 서비스도 시작했다. 재한친우봉사회는 아픈 아이들을 위한 외래 환자 서비스를 시작했고 병원에 어린이 병동을 열었다. 가족이 아이들을 버린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 재한친우봉사회는 미국의 가정과 아이들을 연계해 입양 절차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비치된 콘스씨의 사진집 <콘스가 본 1950년대 한국> 속 존 콘스와 부인 진 메리.
 서울역사박물관에 비치된 콘스씨의 사진집 <콘스가 본 1950년대 한국> 속 존 콘스와 부인 진 메리.
ⓒ 전쟁없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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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복무, 평화를 위한 길이 되려면

2001년 한국에서 최초로 반군사주의적 이유로 병역거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오태양씨는 노숙인 쉼터 '아침을여는집'에서 사회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국가가 부과한 국방의 의무가 단순히 병역의 의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1970년대 스페인의 병역거부자들도 의무 복무를 수행하는 대신 빈곤한 지역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저항과 동시에 대안을 보여주는 활동을 벌였다.

전쟁없는세상이 번역하고 곧 발간될 책 <Conscientious Objection: A Practical Companion for Movements>에서 'War Resisters' International'의 활동가 Hannah Brock은 1970년대 스페인의 병역거부자들의 행동을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확실히 그러한 건설적 계획은 군대에 징집되는 대신 국가가 부과하는 대체복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일부 병역거부자들은 이 '대체복무'를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로 간주했지만 병역거부 그룹에 의해 수립된 자치구 건설 프로그램은 매우 다른 것이다. 군대에서 보낼 시간을 강제적으로 대체하는 국가에 의해 부과된 노동보다 그것은 완전히 자체적으로 조직된 하의상달식(bottomup) 활동이었다. 대체복무는 대체로 군사주의 시스템의 일부분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대조적으로 병역거부 운동에 의한 활동은 탈군사화된 사회의 현실을 예증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단체가 제기하는 사회적 의제가 대부분 그렇듯이 대체복무제도 역시도 곧 북미, 유럽 등 많은 나라들이 국가 차원에서 받아들이게 되었고 지금은 거의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국가의 정책으로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해도 위 Hannah Brock의 설명처럼 국가가 평화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아래 콘스씨 회상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일찌감치 1916년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된 영국에서도 1952년 군입대보다는 대체복무를 희망했던 20명의 젊은이 중 2명만이 실제 대체복무를 할 수 있었다. 콘스씨가 한국에서 벌인 활약을 생각한다면 18명을 대체복무대신 감옥으로 보낸 영국정부 그대는 '스튜핏'이다.

사진집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여 있었다.

"이들과의 만남으로 누군가는 생명을 얻었고, 누군가는 일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정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 故 쉘인 콘스에게 2013년 1월 25일 수교훈장 흥인장을 수여했다. 2013년 현재 한국은 UN사무총장을 배출하였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이며,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지구촌의 이웃나라들을 돕는 국가로 바뀌었다."

뒤를 이어 더 쓰고 싶다.

"…그리고 아직까지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가야하는 현실은 영국의 병역거부자 콘스씨가 대체복무로 한국에 와서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고 누군가의 일생을 바꾼지 64년이 지난 지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 병역거부자들은 대개 1년 6개월 형의 실형을 선고받는데 그나마 병역거부운동이 확산되기 전에는 법정 최고형인 3년형이 선고되었었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김민철 방장처럼 병역거부자들은 감옥에서 모범수로 분류되며 목정현 신부처럼 교도관들에게도 평이 좋다. 그들이 지금 반항하고 있는 것은 전쟁을 준비하는 기관인 군대의 존재와 강제적으로 군복무의 의무를 부과하는 징병제도이다. 이들의 반항이 평화와 인권, 사랑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고 우리 사회가 한번쯤 이들의 반항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면, 당장 이들을 풀어줘야 한다. 그리고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의 군대와 징병제도는 어떻게 변해야 할지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신의 부름에 응답하다 /존 콘스

내가 스무 살이던 1947년 여름, 킹즈 칼리지(King's College)의 의대생이었던 나는 우연히 퀘이커 미팅을 알게 되고 이후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영국대공습으로 퀘이커 회의실이 파괴되어 사람들은 로비에서 만났다. 주로 나이든 퀘이커들로 이루어진 작은 모임이었다. 그들은 내게 매우 친절했다.

1951년 웨스트민스터 병원에서 훈련을 마친 뒤 나는 웨스트민스터 병원의 외과의사로 임명되었다. 몇 주 후 징집영장을 받게 되었고 나는 병역거부자로 등록하기로 결심했다.

1952년 6월 나는 풀햄(Fulham) 시청의 재판소에 출두하여 경찰에 구금되었다. 나는 그날 아침 법정에 출두한 20명의 병역거부자 중 마지막 사람이었다. 처음 18명의 병역거부자들은 감옥에 보내졌고 19번째 거부자에게는 병원 질서유지인이라는 대체복무가 부여되었다. 피고인석에 들어섰을 때 나는 진짜 퀘이커교도처럼 떨고 있었다. 법정을 내려다보니 놀랍게도 열두 명이 넘는 웨스트민스터 퀘이커교도들이 법정에서 조용히 예배를 드리는 모임을 열고 있었다. 그것이 내게 용기를 주었다. 웨스트민스터 퀘이커에게서 받은 지원이 군복무로부터 나를 구제해 준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웨스트민스터 퀘이커들의 후원에 너무 감사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

나는 전쟁의 공포를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퀘이커의 장로에게 내 생각을 털어놓았다. 나의 진심 어린 욕망은 Friends Ambulance Unit(FAU)와 같은 활동에 함께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미국 필라델피아의 미국친우봉사회 지도 하에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들로 이루어진 팀이 한국 봉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함께 하고 싶다는 요청을 보냈다. 재한친우봉사회는 의사들의 지원은 있는데 간호사들의 지원이 없다고 말했고 나는 여자친구가 간호사라고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결혼한 부부를 한국에 보내려고 생각 중이었다고 말했다.

일하고 있는 병원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여자친구인 진 그로즈(Jean Grose)에게 나와 결혼해서 한국에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잠시 망설이지도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진이 가족들에게 병역거부자와 결혼해서 한국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그녀의 가족은 리버풀의 나의 아버지를 방문하는 것을 비롯 온 힘을 다해 결혼식을 방해하였다. 내 아버지는 진의 가족의 생각에 동의하며 나와 부자관계를 의절했다.

이것은 진과 나에게는 비참한 경험이었다.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우리의 의학적 기술과 전문자격, 그리고 우체국 통장에 있는 120파운드 뿐이었다. 고맙게도 웨스터민스터 퀘이커들만이 우리를 지지해줄 뿐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첼시에 있는 원룸을 임대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임대료는 그것뿐이었다. 행운이었던 것은 집주인이 우리에게 매우 잘 해줬고 우리 결혼식에도 왔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 부부도 사프란 월든 퀘이커 학교에서 학생으로 만났고 그곳에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1952년 9월 8일 웨스트민스터 퀘이커 모임집(Meeting house)에서 결혼을 하였다. 우리의 결혼식은 웨스트민스터 퀘이커 친구들로 가득 찬 즐거운 행사였다. 하객들에게는 차와 샌드위치를 제공했고 그들은 놀랍게도 우리의 원룸에 필요한 모든것(주전자, 토스터, 빵 도마와 칼, 먼지털이, 행주, 포크, 숟가락, 나이프 등)을 선물하였다.

재한친우봉사회는 1952년 말에 팀구성을 마쳤지만 미군이 팀을 한국에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1953년 한국의 상황은 너무 절박했다. 1953년 11월이 되서야 팀은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고 다른 모든 국제 원조 기관이 간과한 난민들의 중심지였던 군산에서 일할 것을 요청 받았다. 진과 나는 1954년 1월 1일에 두 번째 자원팀으로 파견되었다.

웨스트민스터 퀘이커는 우리가 군산의 난민 캠프에서 의료 지원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다. 웨스트민스터 퀘이커의 장로는 나에게 매달 한 번씩 편지를 써서 한국의 소식을 계속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의 사후, 집정리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그녀의 집에서 내가 한국에서 부친 편지들이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우리가 군산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전쟁의 피해를 입은 군산 지방병원의 외과 서비스를 복원해줄 것을 요청받았고 진은 간호사를 위한 훈련학교를 조직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우리가 성공했던 것은 기적이었다.

미국친우봉사회도 재한친우봉사회도 전쟁으로 손상된 병원에서 열악하게 의료업무를 시작한 세 명의 의사를 대체할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팀원 모두가 집에 돌아가고 난 후에도 우리는 한국에 머물렀다. 결국 9개월 후에 두 명의 의사를 찾을 수 있었고 진과 나는 1956년 9월 말 런던으로 돌아왔다.

* 이 글은 퀘이커의 온라인잡지인 Nayler(nyler.org)에 실린 글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전쟁없는세상 블로그(http://www.withoutwar.org/?p=14096)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한국 정부 훈장을 받은 병역거부자, #대체복무,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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