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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큰 문구점에 들러 2018년 일기장을 샀다. 새해가 한 달이나 남았을 때다. 한 달 내내 한 해를 선물 받은 듯 뿌듯했다. 밤색 겉장이 가죽표지처럼 부드럽다. 날짜만 다른 백지 365페이지, 거기에다 세계시차표, 상용한자일람표, 세계지도 등 등 웬만한 책만큼 두툼하다. 값도 1만원이 넘었다.

매일 한 페이지씩 빼지 않고 일기를 쓰기 시작한 때가 언제부터였나. 2011년부터 한 해에 한 권씩, 이제 8권째이다. 그전엔 꼬박꼬박 일기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며칠씩 빠지고, 오랫동안 쓰기 싫어질 때도 있었다. 만년필을 잡고 일기장을 열었는데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얗게 비어버리는 날도 있었다. '오늘 무얼 했지? 하루가 갑자기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느낌'이 드는 날이다.

습관의 힘은 위대하다. 십여 년 날마다 쓰다 보니 일기 쓰는 시간이 좋아졌다. 요즘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 일기 쓰는 시간이다. <월든> 작가 소로(1817~1862)의 유난한 일기사랑이 생각난다.

"일기를 쓰기 위해 살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두려워했을 정도였다."

소로는 에머슨의 권유로 20세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 폐결핵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24년간 모두 39권(2백만 단어)을 썼다.

월든 호숫가 오두막 생활(28세부터 2년2개월2일 동안) 체험담, <월든>도 20세부터 17년간 쓴 일기장을 바탕으로 37세(1854년)때 발간했다. 20세에 하버드를 졸업한 천재, 소로가 황금 찾아 서부로 떠나지 않고 그 조용하고 작은 콩코드 마을을 평생의 거주지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일기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24세(1841년 2월8일)소로는 이렇게 쓴다.

"나의 일기는 추수가 끝난 들판의 이삭줍기다. 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들에 남아서 썩고 말았을 것이다."<소로우의 일기(Thoreaw's Journals) 오델 세퍼드 편집, 윤규상 옮김>

습관의 힘은 위대하다. 십여 년 날마다 쓰다 보니 일기 쓰는 시간이 좋아졌다
 습관의 힘은 위대하다. 십여 년 날마다 쓰다 보니 일기 쓰는 시간이 좋아졌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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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일기장을 연다. 오늘도 '하얀 페이지'가 펼쳐진다. 새해가 지난 오늘도 1월 1일처럼 새날이다. 새해가 1년에 한 번 사람이 정한 매듭이라면 오늘 하루는 24시간마다 하늘이 정한 매듭이다. 보름 만에 10미터나 자라는 대나무는 매듭이 있어 부러지지 않고 거센 폭풍을 버텨낸다. 우리 인생도 일 년에 하루라는 365개 매듭이 있어 거친 세파를 견뎌낸다.

매일 일기는 24시간마다 새로운 매듭을 짓는 일이다. 9살 때 전신화상을 입어 죽다 살아난 <온 파이어(On Fire)>의 저자, 존 오리어리(39)는 '사람은 살아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며 '24시간마다 굿 뉴스(good news)를 만난다'고 말한다. "24시간마다 새로운 하루(new day)가 오니 굿 뉴스(good news)"라는 풀이다. 아침마다 맞는 '굿 뉴스'를 저녁에 매듭짓는 일이 일기쓰기다. 굿 뉴스도 일기로 기록해야 매듭이 된다.

새해가 왔다. 365개 옛 매듭을 한 권 역사책으로 묶고 새로운 365일을 연다. 옛 일기장은 비밀 역사책처럼 재미있다. 혼자만 아는 비밀역사다. 비결서를 훔쳐보듯 옛 일기장을 훑어본다.

1월 1일은 언제나 새로운 마음 다짐이다. 2017년 다짐은 '썩지 않도록 매일매일 모과처럼 나를 닦자', 2016년은 '筆則道生' (필즉도생 ; 글로 쓰면 길이 생긴다), 2015년은 '隨處作主' (수처작주: 가는 곳마다 그곳의 주인이 되라), 2014년은 '원래 내 것은 없다, 고통 괴로움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자'였다.

올 1월 1일은 무슨 다짐인가. '인생여행에서 가장 큰 유산은 일기장이다'. 무술년 인생여행에 동반할 단 한권의 책, 2018 일기장이다. 새 페이지를 펼치고 만년필을 쥔다. 마치 요술지팡이를 손에 쥔 소년처럼 행복하다. 하얀 종이 위에 사각사각 까만 글씨들, 어디든 내 마음먹은 대로 날아간다. 삭풍이 부는 추운 겨울, 숯불 화로를 안고 있듯 마음이 훈훈해진다.


태그:#일기장, #소로, #인생여행, #단 한권의 책,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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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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