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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인권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편에 서서 "당신은 존엄한 인간"이라고 말해주는 이들 덕분에, 인권은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정작 그들의 삶은 험난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힘들어하고, 암과 투병하고, 구치소에서 노역을 하기도 합니다. '인권재단 사람'과 <오마이뉴스>는 인권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인권활동가들을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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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끝나자마자 영양 부족으로 주사를 맞았다. 의사는 힘들더라도 철분 섭취를 위해 고기를 많이 먹으라고 했다. 하지만 김일란 감독에게 이는 쉽지 않다. 위가 없는 몸은 지방을 소화시키는 것이 버겁다. 고기를 먹으면 배가 살살 아프다.

"위암 환자들은 설사할 각오 하고 먹는 거래요. 먹어야 소화 훈련이 된다고."

용산참사를 다룬 <두개의 문> 등 사회성 다큐를 만들어 온 영상집단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은 5년만에 찾은 병원에서 지난 7월 초 위암 판정을 받았다. 위암 초기였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은 위와 림프절을 다 절제해야 한다고 했다. 진행형이고 위치가 안 좋아서다.

의사는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됐는지 열어봐야 안다고 했다. 위 상태를 보려고 수술 전 위 내시경을 했다. 하는 김에 대장 내시경도 했다. 대장에서도 암이 발견됐다. 위에서 전이된 게 아니었다. 다른 암세포였다. 몸속에 두 개의 암세포가 자라나고 있었다.

위도 모자라서 대장도 절제해야 하는 건가. 막막했다. 짜증도 났다. 억울함도 들었다.

다행히 대장을 다 들어내야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시경 시술로 치료 가능한 수준이었다. 장은 절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의 말에 김일란 감독은 기뻤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나는 왜 암 환자가 됐을까?'

김일란 감독은 자신을 돌아봤다. 촛불집회, 밀양 그리고 세월호 참사. 현장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현장들을 카메라에 담으면서도 용산참사 철거민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공동정범>을 제작했다.

지난 몇 년간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연분홍치마는 김일란 감독을 비롯해 이혁상, 넝쿨, 변규리, 한영희 등 다섯 감독이 모인 영상 집단이다. 2004년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으로 발족해, <마마상>, <종로의 기적>, <두 개의 문>, <공동정범>, <안녕 히어로> 등 사회성 있는 다큐멘터리 작품들을 제작했다.

5명의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은 한 사람이 작품 연출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들이 조연출, 기획, 프로듀서, 촬영, 편집 등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13년간 공동작업을 해왔다.

연분홍치마는 다큐 창작 집단인 동시에 인권단체이기도 하다. 용산참사, 세월호 참사, 촛불집회 등 사회적 약자들이 모인 곳, 투쟁 현장을 기록했다. 김일란 감독은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책임자로서 세월호 참사 관련 영상 작업을 이끌어왔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이어진 촛불집회 영상을 기록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암에) 걸릴 법 하다.'

모텔에 장기투숙하며 촬영..."다큐가 운동에 기여하는 방식을 알게 됐다"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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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그 때 당시 성매매 특별법 논쟁이 일고 있었어요. (사회에서) 벌어지는 논의들과 다큐가 만나면, 논쟁이 확산되고 평소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어요. 물론 그 다큐멘터리가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었지만, 다큐가 운동에 기여하는 방식을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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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란 감독은 영화를 글로 배웠다. 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전공했지만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가지는 않았다. 감독보다는 학자에 가까웠다.

2003년이 터닝 포인트였다. 당시 한 단체가 '기지촌 혼혈인 인권실태조사'를 했다. 기지촌 여성들의 혼혈 자녀들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듣는 일이었다. 김일란 감독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보고서를 쓰게 됐다.

기지촌에서 한 중년 여성을 만났다. 그는 혼혈인이었다. 그의 자녀도 그랬다. 그는 젊었을 때는 성매매를, 당시는 알선업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5~6개월 동안 그의 삶을 보고 들으면서 글로 풀었다. 하지만 한계를 느꼈다. 문자로는 그의 삶을 온전히 전달하기 힘들었다. 조금 더 생생하게 드러낼 수는 없을까.

김일란 감독은 영상을 떠올렸다. 하지만 카메라도 없었고 다룰 줄도 몰랐다. 그는 촬영일을 하는 친한 선배한테 달려갔다. 선배는 흔쾌히 본인의 카메라를 넘겨줬다. 그러면서 카메라를 켜고 끄는 것부터 테이프를 넣는 법, 색감을 조정하는 화이트 밸런스를 잡는 방법 등 기초적인 것들을 알려줬다.

설렜다. 그러면서도 막막했다. 그래서 무작정 평택시 송탄 기지촌으로 갔다. 기지촌 실태 조사 당시 만났던 중년 여성이 사는 곳이었다. 동네 모텔방을 잡았다. 세 달 동안 장기투숙하면서 그를 인터뷰했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자주 송탄으로 가, 인터뷰를 했다. 10개월여의 촬영, 편집을 거쳐 첫 작품인 <마마상>이 나왔다.

첫 작품이었지만 여성영화제에서 상도 받았다.

"그 때 당시 성매매 특별법 논쟁이 일고 있었어요. (사회에서) 벌어지는 논의들과 다큐가 만나면, 논쟁이 확산되고 평소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들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어요. 물론 그 다큐멘터리가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었지만, 다큐가 운동에 기여하는 방식을 알게 됐죠.

그렇게 김일란 '감독'의 다큐멘터리 인생이 시작됐다.

'네가 필요해' 전화 한 통에 달려나간 현장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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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란을 필요로 하는 현장이 많았다. 연분홍치마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느라 허덕이면서도 누군가 '네가 필요해, 너밖에 없어'라고 말하면 하던 일을 내려놓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2014년 5월 8일에도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친구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KBS에 항의방문하러 가고 있어. 너도 와"라고 했다. 김일란 감독은 집으로 가던 발을 돌려 KBS로 향했다. 이날 유가족들은 영정 사진을 들고 안산에서 여의도까지 왔다. 하지만 유가족들을 맞이한 건 경찰 차벽이었다.

그날 밤 유가족들은 광화문을 거쳐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 섰다. 희생자 부모 중 한 분이 휴대폰을 꺼냈다. 그 안에는 생전 딸 아이가 부른 노래 '거위의 꿈'이 있었다. 노래는 새벽 청와대 앞에 울려 퍼졌다. 일순간 적막이 흘렀다. 곧이어 곳곳에서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무거운 분위기가 김일란 감독의 마음을 짓눌렀다. 이 울음들을, 이 장면들을, 이 사건을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낮 가리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었다. 기록했다.

김일란 감독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두 개의 문>(2012)도 그렇게 나왔다. 용산 참사가 일어났던 2009년 연분홍치마는 두 작품의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친한 활동가였다. "안 와? 군포 여대생 실종 사건이 보도되면서 언론이 용산에 주목을 전혀 안 하고 있어. 용역들 횡포는 심해지는데 사건 현장이라 남일당을 지켜야 하고. 상황이 어려워"라고 했다. 그 길로 김 감독은 용산 남일당 현장으로 갔다. 재판도 따라다녔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도 그는 2주에 한 번 꼴로 3~5분짜리 집회 영상을 만들었다. 현장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촬영하고 1주일 중 3일은 꼬박 컴퓨터 앞에서 집회 영상을 만들었다. 그 영상이 마무리되면 다큐멘터리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도 해도 끝없는 집안일처럼 김 감독의 손을 거쳐야 할 영상은 쌓여갔다.

그럼에도 그는 현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게 현장은 일터인 동시에 친구들과의 놀이터였다. 현장에는 늘 친구이면서 활동가인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이 담긴 영상에는 김일란 감독의 시간 뿐 아니라 친구인 활동가들의 시간, 활동의 역사 등이 녹아있었다. 살인적인 스케줄로 영상을 만들 때도 웃으면서 작업했다.

김일란 감독에게 영상은 활동가들에게 보내는 연대의 박수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만나는 활동가들의 모습, 삶 등을 영상으로 찍을 때, 그들에게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활동가들은 자신의 활동에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지만 주변 사람들이 '네가 한 일은 이런 의미가 있어, 정말 좋은 활동이야'라고 응원해주면 힘이 나잖아요. 제 영상이 그런 역할을 할 때 가장 뿌듯해요."

현장을 우선하다 보니 건강관리는 늘 뒷전이었다. 밥도 잠도 제 때 챙기지 못 했다. 쉼 없는 생활이 계속됐다. 그런 김일란 감독에게 몸은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다. 결막염, 장염, 위염, 방광염 등이 생겼다. 하지만 김일란 감독은 무심히 넘겨 버렸다. 결국 몸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이것 좀 해줘' 부탁... 언제까지 그래야 할까요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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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수술 후 10kg이 빠졌다. 식탁의 풍경이 달라졌다. 매운 음식을 즐겨 먹던 그이지만 지금은 겉절이에 붙은 고춧가루를 다 떼어낸 뒤에야 먹을 수 있다.

양도 확 줄었다. 식당에서 주는 공기밥의 1/3만 먹는다. 소식을 하는데도 다 먹는 데 30~40분이 걸린다. 위가 없기 때문에 입에서 최대한 씹어서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밥 먹고 바로 물을 마셔도 안 된다. 소장으로 음식물이 내려가는 속도조절을 해주는 위가 없어 조금씩 내려 보내야 하는데 바로 물을 마시면 음식물이 쓸려 내려간다. 그러면 바로 배탈이 난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30분은 참아야한다.

"제 소식 듣고 건강검진 한 활동가들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인사로 묻는 게 '건강검진 했어?'예요."

김일란 감독은 장난처럼 말했다. 하지만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에게 여전히 건강검진 비용은 먼 이야기다.

연분홍치마 활동가들은 단체를 출범한 2004년부터 약 3년간 무급으로 활동했다. 2007년부터 한 달에 60만~90만 원을 가져갔다. 사정이 안 좋아져서 2014년에는 그 마저도 받지 못 했다.

연분홍치마 활동가 한 명이 영화를 만들면, 나머지 활동가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활동비를 벌었다. 여성재단 같은 곳의 기록촬영이나 영화제 기록촬영 등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월급을 가져가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계속 활동을 할 수 있을까, 고민들이 이어지는 막연한 밤이 계속됐어요. 불안하니 잠도 잘 안 오고 생각은 많아졌어요. 잠 못 드는 밤을 줄이고 싶었죠."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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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연분홍치마는 '당기다600'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활동가 5명의 최저 생계비와 사무실 월세, 공과금을 모으기 위해 600만 원 모금을 벌인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후원 주점도 열었다. 이것만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김일란 감독과 연분홍치마가 원하는 건 별 다른 게 아니다. 최저생계비라도 받으면서 영상 제작을 하는 삶이다. 돈이 없으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그러면 영상을 제작할 시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2천만~3천만 원, 영화제에서 1천만~2천만 원 등 제작지원을 해줘요. 그런데 보통 제작기간이 2년이에요. 감독 혼자 제작해도 한 달에 100만 원씩 계산하면 2400만 원이에요. 조연출, 피디 한 명만 더 붙여도 인건비로만 5천만 원이 넘어가죠. 이렇게 되면 그래픽, 사운드에 투자할 돈이 없어요. 친한 사람들에게 '이것 좀 해줘'라고 부탁하는데 언제까지 그래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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