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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여름의 일이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근교의 쇼핑몰, 나그네의 귓가에 소녀들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 보았다. 앗, 나는 눈을 의심했다. 중증 장애 여성이 친구와 걸으며 깔깔대고 있지 않는가. 행인들은 아무도 이들에게 유별난 시선을 주지 않았다.

미국 워싱턴 D.C 근교 쇼핑몰의 장애인
▲ 미국 장애인 미국 워싱턴 D.C 근교 쇼핑몰의 장애인
ⓒ 김선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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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과 최근 장애 아들을 위해 무릎 꿇은 한국 엄마의 사진은 슬픈 대조이다.

무릎 꿇은 장애아동 어머니
▲ 장애아동 어머니 무릎 꿇은 장애아동 어머니
ⓒ YouTube 'Nocu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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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윤두선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대표, 서울시 제공
2015년 서울시 복지상 장애인 인권분야 대상 수상
▲ 윤두선 윤두선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대표, 서울시 제공 2015년 서울시 복지상 장애인 인권분야 대상 수상
ⓒ 서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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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두선씨가 난생 처음 달동네에서 내려와 나들이를 해 본 것은 그의 나이 서른 살이 넘어서였다 한다. 내가 윤두선(현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 대표)씨를 만난 것은 원광 장애인 복지관 초대 관장을 역임하셨던 원불교 김혜심 교무님(현재 아프리카 스와지란드에서 활동)에 대한 행적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가로수들이 잎새를 다 떨구고 난 늦가을 2014년 11월. 용산 어느 골목의 한가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작은 체구를 휠체어에 깊이 묻고 있었다.

처음엔 서먹했다.

그는 좀처럼 말문을 열려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바였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속을 털어 놓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열심히 이야기를 유도했다. 이내 그는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자 물레에서 실이 풀려 나오듯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20여 년 전의 일들이 그의 기억의 심연에서 되살아 났다.

출구 없는 어둠의 동굴에 갇혀 있던 한 인간이 어떻게 빗장을 열고 빛 속으로 걸어 나왔는지를 전하는 그의 말 속에는 뜻 밖에도 간간이 유머가 섞여 있었다. 육성을 간추려 옮겨본다.

제가 바쁘게 일을 많이 하고 있어요. 학교도 다니고. 강의도 하고, 학교를 지금 다니고 있어요. 박사과정, 재활학. 바쁘죠, 학생인데 가르치고 또 사무실이 있고. 사무실 일이 또 많아요.

옛날인데, 어느 날 제가 소화가 안 되고, 배가 안 좋았어요. 배가 아팠어요. 병원에 가야되는데, 엄두를 못 냈어요. 집이 꼭대기에 있었어요. 북아현동. 산 일 번지라고 해서 꼭대기. 달동네예요 달동네. 집에 남자도 없고. 병원 갈 엄두를 아무도 못 내는 거예요.

뭐, 그 때는 누군가의 손을 빌린다는 걸 생각도 못 했고. 아파 어쩔 줄 모르고 있던 중 예전에 신문에서 중랑구의 원광복지관에서 순회진료 서비스를 한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그래서 전화를 했어요. '여기 오셔서 진료를 좀 해 주실 수 있냐'고 물었지요.

사회복지사님이 장수창 선생님이고, 그때 간호사가 있었는데, 그분은 이름이 기억이 잘... 하여튼 그분들이 오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서 저희 집까지 한 시간 반이 걸려요. 엄청 멀어요. 그런데 오셨더라고요. 장수창 선생님 사회복지사가 간호원과 함께 오셨어요.

그런데 그 후로 원광복지관에서 연락이 오는 거예요. 자기네가 행사를 하는데 오라고. 그게 아마 '원광 한마당'이었던 거 같아요. 나가기 싫었죠. 열등감도 있고. 다른 누구한테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안 갑니다. 어떻게 거길 가겠어요?  갈 수가 없어요"' 그랬더니, 데리러 온다는 겁니다. 곽용성 교무님인가, 곽 교무님이 걱정하지 말라고, "아, 내가 데리러 간다. 걱정하지 말라"고. "거기서 여기까지 어떻게 오시겠냐" 고 했더니 오시겠대요. 준비만 하고 있으래요. 곽 교무님이 봉고차를 운전하고 오셨어요.

그 때 처음으로 공원이라는 데를 가 봤어요. 아, 세상에 이렇게 좋은 데가 있구나. 세상이 좋구나, 그런 생각을 했고. 하지만 사람들을 보는 게 힘들었어요. 행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 복지사 장수창씨가 다가오더니 "윤두선씨 혼자 있으면 어떡하냐"고 하면서 휠체어를 밀고 꽃 길로 갔어요. 휠체어도 제 것이 아니었지만. 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구나. 꽃 길이 있더라고요. 강렬한 햇살도 그 때 난생 처음 느꼈어요. 너무 좋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근데, 사람들 하고 같이 있으니까 힘들었어요. 행사장에서는 사람들이 게임을 했고. 나는 안 하고, 어머니들이 열심히 했고, 뭐 먹고. 저희 엄마도 갔어요. 저하고 둘이 갔죠.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 뒤에 원광에서 계속 연락이 오는 거예요. 좋긴한데, 어휴, 사람들 볼 엄두가 안 나고, 복잡한 심사였어요. 그리고 저 자신이 학습된 무기력 같은 게 있었어요. 그 즈음은 밤마다 쇼팽의 야상곡을 들으면서 잤어요. 세상에 나가기 싫다기보다는 나가서 할 게 없다는 생각이었지요.

내가 세상에 나가 할 게 뭐가 있냐. 남들의 시선도 그렇고. 내가 뭘 하겠어요. 그런데 어느 날 김현길 교무라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장수창 선생님은 되게 부드러웠는데 이 사람은 전화해서 빽빽거리는 거예요. 나오라고, 윤두선씨 나오라고.

그래서 제가 "어떻게 나가요?" "걸어서 나오라,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된다.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된다". 내가 "당신도 장애인 돼 봐, 그런 소리 할 수 있나" 하니까, 그는 또 자기가 장애인보다 더 잘 안대요. 그래서 내가 "무슨 소리냐,, 어디서 깝죽대냐"'고 하고... 짜증이 나대요, 그 양반이 말을 도전적으로 해요. 그래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 전화 안 했으면 좋겠네' 생각했죠. 그런데 자꾸 전화가 오는 거예요.

그 때 원광에서 저에게 봉사자 한 분을 연결해 주더라구요. 제가 직접 올 수가 없으니까 연결해 줬는데, 그 봉사자가 박구남씨라고 악세사리업을 하던 사람이예요. 그 분 이야기가, 여기 복지관에 자원 봉사를 신청하니까 "서대문 북아현동에 장애인 하나가 집에만 있는데 그 사람 좀 데리고 나와 달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해주겠다고 그랬나 봐요.

저희 집은 올라오려면 계단이 스무 개는 걸어 올라와야 돼요. 난코스이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못 와요. 그 분이 다마스 차를 하나 가지고 있어요. 제일 조그마한 차인데, 소형 승합차인데 티코 정도의 차예요, 작아요, 얇고. 그분이 저를 그 차로 복지관에 데리고 갔어요.

그즈음 자원 봉사자 모임이 있었어요. 복지관 근처에 사는 어떤 장애인 집을 아지트 삼아 모이는 거예요. 김용구라는 하체 절단 장애인이 거기 혼자 살고 있었어요. 그 집에  자원봉사자들과 장애인들이 드나드는 거예요. 저도 박구남씨를 따라 가게 되었죠.

거길 가보니 별 희한한 사람이 많더군요. 이를테면, 자원 봉사자 김진수라는 사람인데, 좀 특이한 사람이에요. 운전을 하는 사람인데, 자기가 1년 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앓았던 적이 있었대요. 집에서만 누워서 있었다나요. 이 사람이 다시 일어나서 드는 생각이, 세상에서 제일 가엾은 사람이 장애인이더래요. 자기가 당해보니까 세상에 그렇게 슬픈 일이 없더래요. 집안에 꼼짝 못하고 있는데 너무 힘들고 너무 원통하더라고.

그 사람의 지론에 의하면, '장애인이 세상에서 제일 가엾은 사람이다. 돌아다니지 못한 사람은 제일 슬픈 사람이다.' 이 사람이 맨날 우리한테, "너희는 제일 비참한 놈들이야, 아이! 가엾은 놈들아. 왜 사니, 죽지. 왜 그러고 사니." 그래요. 나를 보더니, "어휴, 별 게 다 있네, 너는 누구냐"고 물어요. 그래서 이름을 말해 주었더니, "윤두선씨는 몸도 그렇게... 어휴 심하네. 그거 뭐 하러 살어" 그래요. 나는 속으로 이상한 놈이네, 그랬죠. 근데 그 사람이 악의로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자기 택시가 있잖아요. 그걸로 놀러가자고, 자기가 데리고 나가겠다고. 거기가 중랑구라서 남양주랑 가까워요. 경치가 좋은 데가 많아요. 강 쪽으로 나가면 좋은 데가 많아요. 정약용 생가도 있고, 쭉 있어요. 거길 밤늦게 혹은 새벽에 구경하면 황홀하죠.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진수씨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어요.

저는 두 살 때부터 장애인으로 살았어요. 집에서 형이라든지 그런 사람이 없었고 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셨고.  학교 입학 통지서가 나왔는데 도저히 어머니가 저를 업고 다닐 수가 없는. 그래서 제가 집에서만 살았거든요. 바깥생활을 전혀 못했어요. 그러다가 진수하고 친구가 되면서, 아, 이렇게 사람 만나는 게 재밌구나... 모여서 실없는 얘기 나누고. 진수는 우리를 맨날 놀리고... 저는 재미있었어요.

어느 날 복지관에서 김현길 교무로부터 저한테 상담받게 해준다며 연락이 왔어요, 전화상담. 이행님이라고 하는 분하고 제가 전화 상담을 하도록 해줬어요. 그 분이 복지관측에 봉사를 하고 싶다고 얘기를 하셨나 봐요. 그 분이 일주일에 몇 번씩 전화를 해 오는 거예요. "어떻게 사냐,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그런 얘기를 하는데. 제가 자존심이 되게 쌔거든요. 좀 많이 꼬운 거예요.

이 나이에 나이 서른이 넘었는데,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남한테 지도를 받는다는 게 아니꼬웠는데, 마음을 돌려 먹었죠. 아니, 나한테 맨날 전화 거는데 한번 걸면 한 30~40분도 하고 40~50분도 하고 그러거든요. 이 분도 전화요금이 아까울텐데 이렇게 하시는 걸 보면 나를 생각해서가 아니겠는가.  반항할 필요가 어딨냐 생각하고, 그냥 "뭐...알았습니다." 그랬죠.

그 분이 한 번은 저에게 공부를 하라는 거예요. "무학이지 않냐. 검정고시를 봐라." "아니, 내가 서른이 넘었는데 검정고시를 봐서 뭐 합니까. 지금 그걸 봐서 무슨 쓸 데가 있겠어요?" 그래도 그 분은 한번 해보라고 자꾸 그러시는 거예요.

혼자 살아가면서 사실 저희 같은 장애인들은 아무 희망도 의미도 없으니까 그냥 살아요. 보통 새벽 한 두 시에 자고 밤새 그냥 뭐 라디오 듣고 텔레비전 보고 놀다가, 밥 한 끼라도 아낀다고, 다음 날 늦게 깨요. 그냥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쟤는 장애인이니까 저렇게 사는구나. 니네 주제에 다 그렇게 살지 뭐'. 그런 말은 듣고 싶지가 않아서 일부러 아주 일찍 깨고, 일과를 딱 정해 놓고 그랬어요. 그래서 공부도 좀 혼자서, 영어공부도 하고 그랬어요. 누나가 그때 그랬어요. "너는 쓸 데도 없는데 공부를 왜 하냐 힘들게."

그러던 중 제가 자극을 받게 된 일이 하나 있었어요. 이행님이 자꾸 저한테 캠프를 가라는 거예요. 뇌성마비 복지관에 오뚝이 캠프라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거길 가보니 용인대 체육과 학생들이 봉사활동차 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얘들이 장애인한테 막 충고를 해요. 우리를 모아 놓고서는 "여러분, 이렇게 사시면 안 되고요..." 뭐 어떠고 저떠고. 우리를 완전히 바보 취급을 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 새끼들아, 내가 니네보다 똑똑하다, 새끼들아!' 하고 오기가 생겼어요. 제가 원래 좀 반항심, 오기가 좀 있어요. 얘들이 나를 우습게 본다고 이행님 그 분에게 말했더니, "네가 학력이 있으면 당하겠냐. '나도 대학 나왔어,' 그러면 걔네들이 너한테 함부로 하겠냐"고. "아니,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대학을 가" 그랬더니 검정고시(초등학교부터)를 보라더군요.

신청을 언제 해야 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 다음 날이 마감이래요. 신청서에 사진을 붙여 내일 내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사진이 없어서 안 된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김현길 교무한테 전화가 왔어요. 당장 사진을 찍으러 가재요. 못 찍는다, 그랬더니 자기가 지금 나한테 오겠다고 하는 겁니다. "왜 그러시냐, 도대체. 어떻게 하루 만에 사진을 뽑냐"고 대꾸했지요.

그땐 며칠 걸리는 줄 알았어요. 그가 왔어요. 자기 친구 데리고 스무 개 계단 되는 데를 올라 왔어요. 지금도 그 때 제가 김현길 교무에게 했던 말이 기억이 나요. "도대체 왜 이렇게 사시냐, 좀 편하게 시시지 않고. 왜 이렇게 장애인들을 괴롭히냐." 그가 하는 말이, 며칠 전에는 어떤 여성 장애인이 산에 한 번 올라가는 게 꿈이라고 해서 자기가 그 여자를 등에 업고 산을 올라갔대요. 그 때 자기 목이 삐끗했다나요.

그래서 제가, "왜 그런 짓을 하냐"고 했더니, "나는 맨 땅에 헤딩하기야, 하고 말거야." 그러시더라고요. 나는 속으로, 이 사람 오기 하나는 대단하다, 생각되어 할 수 없이 따라 나섰지요.

저희 집 북아현동에서 내려가면 아현동이 나와요. 아현동까지 되게 멀어요. 거기가 제일 번화가거든요. 거길 갔더니 사진 샵이 쭈욱 있더라구요. 일반사진 찍어주는 데가 아니라 웨딩사진 찍는 데래요. 거기가 웨딩타운이었어요. 서너 군데 샵을 들어가 봤지만 일반 사진은 안 찍어요.

그래서 김현길 교무한테 제가 "이것 보세요. 하느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잖아요."  이 양반이 또 오기가 났어요. 그러면 이화여대까지 가 보자는 거예요. 거기서 쭉 올라가면 이대가 나오거든요, 신촌 쪽으로 가면. 거기에 27분 완성이 있더라구요. 거기서 진짜 사진을 찍었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나온대요. 

카페에 가서 기다리니까 정말 사진 나왔다고 가져 오더라구요. 현길 교무가 휠체어 밀고 집으로 돌아 왔어요. 김현길 교무가 되게 고생했어요. 대단하죠, 자기 이익 아무 것도 없는데. 그 다음날 저희 누나가 사진을 가지고 검정고시 원서를 갖다 냈죠.

시험을 봤더니 뭐 시험이 쉬워. 되게 쉬워. 자신이 생겨서 그럼 이제 중등을 봐야 되겠다 싶었어요. 시간도 별로 없었어요. 3개월인가 있으면 중학교를 보는 거예요. 근데 영어, 국어는 자신 있는데 수학은 너무 어려웠어요. 김현길 교무에게 수학이 걱정된다고 얘기했더니 자원 봉사자를 연결해 주겠대요.

그 사람이 누구냐, 지금 그의 부인이 된 김현정씨. 그 분이 봉사활동을 하다가 현길 교무와 눈이 맞아 나중에 결혼했어요. 김현정씨가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수학을 가르쳐주었어요.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세 개 검정고시를 스트레이트로 했죠. 두 해 만에 다 끝났죠. 시간으로 치면 1년 만에 끝냈죠.

고등학교까지 보고 나니까 조금 허탈해요. 그래서 대학 수능 공부를 했어요. EBS교재, 그런 거 사서 공부를 했고. 그거 하던 중 어느 날 진수가 신촌에 놀러간다면서 데리고 가서 차를 타고 신촌에 갔어요. 거기에 연대가 있잖아요. 그 앞에 가서 학생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쟤네는 참 좋겠다, 연대만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참 행복할텐데...' 그땐 거기만 들어가면 그렇게 행복할 거 같았어요.

시험을 좀 잘 봤어요. 그리고 장애인은 여러 가지 특혜가 있었구요.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이 그 몸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겠냐고 묻더군요. 합격이 됐는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 거예요. 아니,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신문사에 보도 자료가 돌았다는 거예요.

1996년 윤두선에게 보낸 김영삼 대통령의 신년축전
▲ 김영삼 대통령 축전 1996년 윤두선에게 보낸 김영삼 대통령의 신년축전
ⓒ 동아 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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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MBC방송에서 나오라고 해서 나갔거든요. 방송에 나오면서 제가 알려졌고, 후원을 많이 받게 되었어요. 세상에, 제가 삼천리 장학재단에서 4년 간 등록금을 받았어요. 자전거 하는 삼천리는 아니고, 삼천리 연탄. 거기서 만든 재단이 삼천리 재단이예요.

큰 아들이 죽으면서 아버지한테 자기가 장학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못하고 간다고 말했대요. 그래서 아버지가 재단을 만들었어요, 아들을 기념해서 장학재단을. 지금도 그 회사 사옥이 여의도에 있어요. 연탄은 없어졌으니까 에너지 전문 기업으로 변했지요. 제가 학교를 간 다음부터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부터도 벗어나게 되었어요.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제가 원광복지관, 그분들을 안 만났으면 과연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기혐오에 빠진 채로 방안에서 불평만 하면서, 이런 세상은 못돼 먹었어, 그러면서 그렇게 살고 있겠지요.

원래 저는 30년 이상을 집에만 살았기 때문에 되게 수줍어하고, 사회생활이 몹시 어려워요. 처음에 대학 들어갔을 때 사실은 학교를 그만두려고 했어요. 학교를 갔는데 너무 사람이 많은 거예요. 강의가 끝나면 사람이 쏟아져 나오는데, 수백 명이 쏟아져 나오니까 그 시선들이 너무 힘든 거예요.

어느 날 집에 와서 학교를 그만둬야 되겠다고 했어요, 너무 힘들다고.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사람을 봐도 내가 저 사람한테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학교를 도저히 못 다니겠더라구요.  "이러다 죽겠다. 너무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그랬더니, 엄마가 "너 그렇게 많이 알려져서 후원도 그렇게 많이 받았는데, 네가 그만 둬 봐라, 뭐라고 하겠냐고."  "그렇지만 내가 죽을 것 같은데..." 그랬거든요.

성격이 아직도 소극적이고 그래요. 그런데 제가 단체를 이끌고 있어요. '중증장애인 독립생활연대'. 단체를 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저를 알려야 하고 그래요. 그래야 단체가 알려지고 활동을 할 수 있어서…그래서 제가 말을 안 하고 싶어도 말을 해야 하고....(하략),.

윤두선의 삶에서 본 인간 승리

윤두선의 삶에서 우리는 진정한 용기를 배우고 인간 승리의 감동적인 서사시를 읽게 된다. 또한 어둠 속에 버려진 한 인간이 역경과 고난을 딛고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무명의 손길들이 그를 이끌었는지를 알게 된다. 인간 세상은 이래서 아름답지 않은가.

이 세상 모든 장애인들은 몸 성한 사람들의 스승이다.
그들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몸을 이끌고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몸 성한 사람들에게 자각과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조정래-

장애인을 스승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은 우리에게 없다 하더라도,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한다.

장애인을 어떻게 대하는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이 질문은 그 사회, 그 나라의 도덕성, 거창하게는 문명 척도를 묻는 질문이기도 할 터이다. 깔깔대는 장애 소년 소녀의 웃음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들릴 때 진정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되지 않을까 한다.


태그:#미국 장애인, #장애 아동 어머니, #윤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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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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