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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0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한 안건이 올라왔다. 그 내용은 여성 징병 추진. 11일 현재 기준 12만 명이 서명에 동참했으며 일주일 만에 '베스트 청원' 2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지난 8월 30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한 안건이 올라왔다. 그 내용은 여성 징병 추진. 11일 현재 기준 12만 명이 서명에 동참했으며 일주일 만에 '베스트 청원' 2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 국민청원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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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0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한 안건이 올라왔다. 그 내용은 여성 징병 추진. 11일 현재 기준 12만 명이 서명에 동참했으며 일주일 만에 '베스트 청원' 2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 청원 내용의 요지를 전달하기에는 벅차 전문의 일부를 담았다.

"(...) 우리 현역병 및 예비역들에 대한 보상 혜택 또한 없다시피하고 군 가산 이런 것들마저도 과거 이화여대 수천 명 및 페미 단체에서 형평을 이유로 여러 번 폐지청원운동하고 이화여대 공무원 준비학생 5명이 연대 장애인 학생 1명 같이 동참시켜 여성과 장애인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군 가산점 폐지시키겠다고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해 폐지시켜버렸는데 그럼 여성들이 장애인들과 동급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하시는 건가요? 아니잖아요.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일 혹은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들 이야기하시며 남녀평등 주장하셨잖아요? 그러면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병으로 의무복무하고 국가에서 현역병과 예비역들에게 보상 혜택을 늘려주면 의무를 한 자라면 남녀차별없이 동일하게 혜택 보상을 받을진대 그런 방안이 맞지 않을까요? 병역법, 예비군법, 민방위법의 법률을 개정해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일하게 현역, 예비역, 민방위로 의무이행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굳어진 사회 제도에 합리적 의심을 품는 행위는 긍정적인 반응이다. 민주주의 사회이기에 의심은 용인되며 그 의심이 실제적 변화를 몰고 올 수도 있는 법이다. 그것은 제도에 묶여 살 수밖에 없는 시민의 저항이 되고 국가 권력과의 소통이 된다. 우리네 민주주의를 더욱 단단히 하는 일이다.

5대 의무 중 하나인 국방의 의무, 국방의 의무를 실현하는 제도 중 하나인 '징병제'는 우리나라에 굳어진 제도 중 가장 많은 의심을 받아야 한다. '국가'라는 이름이 가장 권력적이고 강제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인 징병제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권을 시한부적으로 박탈해버린다는 핵심적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징병제에 대한 의심은 바로 이 한계를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여성 징병 추진'을 촉구하는 12만 명, 혹은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설정한 방향성의 잘못은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징병제 자체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에 실패하고, '징병의 대상은 오로지 남성'이라는 조건부 징병의 논리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렇기에 현 징병제에 대한 수정 요청은, 징병제도 그 자체를 향하지 않는다. 기어코 여성을 향하고야 만 것이다.

군대 문제 바로잡는 방법이 여성징병제?

현 상황에서 여성을 징병하는 것이 불가한/불필요한 이유는 지난 십수 년 고찰되어 왔다. 군대 내 성차별과 이로 인한 성폭력의 가능성을 논하는 여성주의 담론은 둘째치더라도, 직관적인 자료와 통계들로 그 불가성이 증명되었다. 여성이 생활할 수 있는 군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야 하고, 전혀 새로운 형태의 현대전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곳에 예산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근거로 작용한다.

모든 사회 정책엔 '트렌드'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최근엔 그게 '감군'인 듯하다. 현대전에는 병력보다는 정보전을 대비한 기술이 더 중요하다는 것과 인구가 줄어드니 병력도 줄여야 한다는 이유에서 감군의 필요성이 제기되어온 것이다. 감군은 현역 입대 대상자들의 복무 기간을 줄이거나, 현역 판정 비율을 줄이는 방식으로 가능하다.

문재인 정부는 전자의 방식을 택했고, 이를 대선 공약으로 내건 뒤 당선되었다. 그리고 임기 5년 안에 의무복무기간을 21개월에서 18개월로 줄인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이는 현대전을 준비하기 위한 국방개혁을 게을리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풀이된다. 기존에 징병하던 남성들의 수도 줄여나가는 상황에서 여성을 징병의 대상으로 고려해달라는 요청은 시대착오적이며 현시대에서 군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파악하지 못한 몰이해다.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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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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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이토록 간단한 논리로 '여성도 징병해달라'는 요청은 가뿐하게 처단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요청을 한 12만 명의 목소리는, 군을 대하는 시민들의 전반적인 태도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시민들은 그토록 폭력적인 공간인 군의 존재를 긍정하고 있다. 강제로 그 구성원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이 불합리함을 유지하려 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를 2년간 박탈당한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도 선사하려는 단순한 복수심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징병과 국가 폭력이라는 연결고리를 기어코 외면한 채 쏟아내는 불만들은 유효하지 못하다.

앞서 감군은 현역 입대 대상자들의 복무 기간을 줄이거나, 현역 판정 비율을 줄이는 방식으로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가장 궁극적인 방식은 징병을 폐지하고 모병제를 이 땅에 불러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앞에서는 미뤄뒀던 여성주의 담론과도 맞닿아 있는데,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남자만 군대에 가라'가 아니라 '남자도 군대에 가지 말라'이기 때문이다.

여성주의자와 징병을 반대하는 이들이 주목하는 군의 속성은 '평범한 시민이 폭력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이 존속하는 근거는 적군의 공격으로부터 영토를 보호하기 위함이고, 여기서 말하는 '보호'는 수동적인 보호가 아닌 무력을 반드시 동반한 능동적 보호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 군은 끊임없이 무기를 사들이고 병력을 증가시킨다.

이렇게 징병된 남성들은 군을 "폭력으로 가득한 공간이며, 오히려 그 폭력이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곳. 누군가에게 손쉽게 상처를 주는 것이 계급으로 정당화되는 곳"으로 기억한다.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한다'는 포장과는 별개로, 폭력적 본질을 덮을 수는 없다.

군대에서의 명령과 복종은 오직 그것이 군대의 본질적 가치와 목적에 부합하는 경우에서만 정당화된다. 여성주의자들과 징병폐지론자들은 군 내부에서도 이토록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할 폭력성을 동반한 상명하복의 문화가 틈을 비집고 사회로 흘러나오는 것을 경계한다. 그 폐단을 대학 내 가혹행위나 기업 내 군대식 문화 등의 사례로 제시하는 것은 표면적 접근에 머문다. 군대문화는 가부장제와 결합하여 여성과 소수자, 사회 계층적 약자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된다는 사실과, 군이 만든 문화가 사회에서 기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성주의자들은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병영 문화 개선을 꾸준하게 요구하고, 군 복무를 원치않는 시민이 징병당하는 제도를 반대한다. 군인들의 인권을 수호할 것을 주장하고, 더 많은 시민들이 폭력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공격해야 할 것은 여성이 아니다

청와대 베스트 청원의 댓글을 하나하나 읽어보다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여성징병을 주장하는 이들 역시 '비인도적 병역구조 개선'을 간절히 바라고 있고, 이 지점을 주된 논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대 안에서 육체와 정신을 혹사당하는 상황, 군대에 갈 수 없는 사람조차 '공익'으로라도 끌려가야하는 상황 등을 늘어놓으며 현 징병제도의 폭력성을 도리어 꼬집는다. 징병제의 비합리성을 여성과 남성이 모두 공감하는 상황인데도, 군을 경험한 남성들은 징병제의 적을 여성으로 돌린다. 그들은 징병제를 폐지해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폭력의 경험을 여성도 경험하게 해달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우리는 현 시대의 징병제도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하지만 합리적 의심이란, 법률적 의미를 넘어 철학적 고찰로 이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남성들만 징병의 대상이 된다'는 법률적 한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 속에서 수십년간 유연하게 작동되고 있는 징병의 폭력을 반대하는 결론으로 나아가야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불행의 외연을 모든 성별로 넓히는 것이 아니라, 징병의 불행을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다.


태그:#청와대 국민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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