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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위풍당당 서있는 일주문 사이로 희미하게 국사봉의 모습이 보인다.
▲ 관악산 공원 입구에 위풍당당 서있는 일주문 사이로 희미하게 국사봉의 모습이 보인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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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봉을 뒤로 한 채 다시 자하동으로 향했다. 장군봉 앞에서 남쪽으로 꺾인 물줄기는 미림여고 입구 교차로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여기서부터는 하천 양쪽으로 나있는 산책로가 끊기기 때문에 하천 밖으로 나와 차도를 따라 걷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제 몸의 일부를 자동차도로로 내어준 도림천은 관악산 아래 물과 돌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옛 명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흐르고만 있는데 그마저도 이내 복개천으로 변해 도로 밑으로 사라졌다가 서울대학교 정문 근처에 이르러서야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관악산 공원 입구를 지나 서울대학교 정문 쪽으로 가다가 복개천이 시작되는 지점의 난간에 기대서서 잠시 상류의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니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을 자하동 골짜기는 안타깝게도 수많은 인공구조물에 갇힌 채 옛 모습을 잃어버리고 없다. 조선 정조~순조 연간에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로 이름을 떨쳤던 자하.

신위가 젊은 시절 독서와 산수 유람을 즐겼던 곳이고 또 윤상도의 옥사 등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 관직을 내려놓고 몸을 의탁했던 곳이기도 한 이곳 자하동은 어쩌면 자하 신위가 늘 마음으로 그리던 청산(靑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서도 자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가 머물렀던 별장과 이로당의 옛터, 물가 바위에 새겨져있던 '제일계산(第一溪山)' 바위 글씨, 그리고 형과 아내와 자식들을 묻었던 선영 등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없다.

끝까지 남아서 이로당의 옛터를 지키던 느티나무마저 지난 1975년 이곳에 대학이 들어선 후 몇 년 만에 죽고 말았다. 300년 이상의 수령으로 자하동의 옛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물이었건만 지금은 그 위치마저도 알기 어렵다. 그나마 이 나무의 고사(枯死)로 인해 서울대학교의 교목이 느티나무로 바뀌었다고 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겠다.

물줄기도 달라졌다. 본래 지금의 규장각 어름에는 연주대 우측에서 시작되어 버들골, 자하연 등 서울대 중앙부를 관통하여 흐르던 계곡이 있었으나 지금은 땅속에 묻힌 채 사라지고 없다. 서영보가 <자하계>라고 불렀던 이 계곡 동구에 신위의 자하동 별장이 있었는데 계곡이 사라지고 없으니 자하동 별장 또한 그 위치가 묘연하다. 서영보는 그의 <유자하동기>에서 자하계 주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강태사서원 앞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다시 근원을 좇아 동쪽으로 수 리를 가니 작은 봉우리가 은은하게 수풀 위로 솟은 것이 보이는데 곧 국사봉이다. 그 아래 수목이 울창한 곳에 인가(人家)가 은은하게 비치는데 아름드리의 늙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다. 그 아래 이로당의 옛 터가 있으니 이는 신씨의 <자하동 별장>이다."

국사봉은 곧 국수봉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행정관 앞 잔디밭에서 바라본 국사봉
▲ 국사봉 행정관 앞 잔디밭에서 바라본 국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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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정문을 지나 속칭 감골로 접어들자 주차장을 겸한 널찍한 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불과 사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 근처 어딘가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 있었고 그 아래로 계곡이 흘렀을 것이지만 지금 느티나무는 사라지고 계곡은 땅에 묻힌 지 오래다.

만약 옛 자하계의 물길이 이곳 주차장 아래로 흘렀다면 연안부사 신호(申瓁)가 쓰고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이 바위에 새겼다는 대자(大字) 글씨  '제일계산' 또한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묻혀있을 것이다. 신호는 이곳 자하동에 이로당을 짓고 소요했던 병조판서 신여철(申汝哲)의 차남으로 자하에게는 고조부가 된다.

답답한 마음을 뒤로한 채 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보니 멀리 동쪽 방향으로 작은 봉우리 하나가 눈에 띠는데 곧 국사봉이다. 사실 국사봉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현재 서울대학교 캠퍼스 내에 국사봉이라는 봉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1970년대 중반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들어서기 전까지 이곳 대운동장 인근에 의성 김씨 집성촌인 자하동 마을이 있었으며 그 마을의 뒷산을 국수봉이라고 불렀다는 점에서 국사봉은 곧 국수봉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생각한다. 국사봉이 국수봉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다음의 두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매년 음력 시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산정(山庭)에서 제를 지내는데 이곳을 '도당(禱堂)'이라고 한다. (중략) 시골구석의 무당이라 능히 신도(神道)를 형용하지 못하므로 '영송신사(迎送神辭)'를 지어 그 말하지 못한 바를 보충하고자 한다. - 신위, <구십구암음고> 중 <관악영송신사 병서(冠嶽迎送神辭 幷序)>

자하동 뒷산 국수봉에는 민간신앙인 미륵님이 모셔져 있어 기복신앙의 발원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도당과 군웅님이 있어 매년 10월 상달에 당주를 선출하여 부락의 안녕과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미륵님은 현재 신림 9동(대학동) 성불암 앞마당에 방치되어 있는데 이를 원위치로 환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김영헌, <관악의 역사를 찾아서>(예사랑, 1999)

위 자하의 글은 그가 윤상도의 옥사 사건으로 강화유수 직을 사임하고 이곳 자하동에 머물 때 쓴 것으로 <관악영송신사>라는 시를 쓰면서 그 이유를 적어 놓은 것이다. 비록 산 이름을 관악이라고는 하였지만 여기서는 자하동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음력 10월에 제를 지내던 관악산 아래 국수봉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아래 쪽 인용문은 향토사학자 김영헌 옹이 쓴 국수봉 도당제에 관한 글이다.

김영헌 옹의 글을 보면, 1970년대 초 자하동 마을이 해체되면서 국수봉 도당에 있던 미륵 또한 유랑의 신세를 면치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문득 성불암 앞마당에 방치되어 있다는 미륵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얼마 전 한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국수봉 석조 미륵 좌상'이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곧 김영헌 옹이 말한 국수봉 미륵이 아닌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지친 듯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은 '국수봉 석조 미륵 좌상'

본래 국수봉 도당에 모셔져 있던 것인데 도당이 없어진 후 인근 성불암 앞마당에 방치되어 있다가 다시 서울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 국수봉석조미륵좌상 본래 국수봉 도당에 모셔져 있던 것인데 도당이 없어진 후 인근 성불암 앞마당에 방치되어 있다가 다시 서울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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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박물관으로 들어서는 젊은 부부들의 모습이 간간이 눈에 뜨일 뿐 박물관은 적막하기만 하다.

두 개의 대형 전시실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한참 만에야 '국수봉 석조 미륵 좌상'을 발견했다. 미륵님은 다소 지친 듯한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고 계셨는데 제아무리 마음씨 좋은 미륵님이라도 박물관 한쪽 귀퉁이에서 더부살이 하는 신세가 편치는 못한가 보다. 서둘러 사진을 찍고 혹시나 자세한 설명이 있을까 하여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으나 '국수봉 석조 미륵 좌상, 고려시대'라는 표지 외에는 어떤 설명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만약 이 '국수봉 석조 미륵 좌상'이 지난 수백년 동안 국수봉 도당을 지키며 자하동 마을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생명과 재산을 지켜준 그 미륵님이 맞다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접이 너무 소홀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이라 박물관 관계자들은 출근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뒤로한 채 박물관을 나와 성불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국사봉 남서쪽 사면에 있었을 평산신씨 선영과 고려총, 자운암 등의 흔적을 더듬어보려는 계획은 잠시 보류한 채 궁금증을 풀기 위해 오던 길을 거슬러 대학 정문 쪽으로 향했다. 성불암은 관악문화원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암자다.

사방이 아파트와 관공서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서 어떻게 이런 곳에 암자가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나이 지긋한 보살님을 만나 사연을 들어보니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해도 오늘날과 달리 호젓한 자연 속 사찰이었단다. 박물관에서 촬영한 미륵상 사진을 보여주며 혹시 알겠느냐고 물었더니 금방 기억을 해낸다. 지금은 복개가 되어 보이지 않지만 성불암 바로 앞으로 흐르던 개울가에 계시던 미륵님이시란다.

성불암을 뒤로 한 채 오던 길을 되돌아가려니 어느덧 해가 서산마루에 걸렸다.  국사봉 답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근처 자하동 계곡을 찾아 시원한 물속에 발을 담그니 하루의 피로가 눈녹듯 사라진다. 윤상도의 옥사 사건으로 자하가 이곳 자하동에 머물 때 소악부라는 제목으로 30여 수의 시조를 한역했는데 그 중 '호접청산거(蝴蝶靑山去)'는 오늘날에도 '나비야 청산가자'라는 제목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나비야 청산가자' 한 자락 읊조리며 이 골짜기 저 언덕을 넘어가는 당년 자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白蝴蝶汝靑山去 黑蝶團飛共入山 行行日暮花堪宿 花薄情時葉宿還)

의성 김씨 집성촌인 자하동 마을은 1973년 집단 이주 전까지 현재의 서울대학교 대운동장 쪽에 있었다.
▲ 관악산 성주암에서 본 자하동 마을 의성 김씨 집성촌인 자하동 마을은 1973년 집단 이주 전까지 현재의 서울대학교 대운동장 쪽에 있었다.
ⓒ 2012서울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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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자하동, #국수봉, #국사봉, #자하신위, #현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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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기행 작가. 콩나물신문 발행인. 저서에 <그리운 청산도>,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느티나무와 미륵불>, <이별이 길면 그리움도 깊다> <주부토의 예술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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