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문명의 화려한 진화에도 살며 사랑하는 일상의 모습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삶의 궤적을 쫓는 여정은 온갖 위험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가보지 못한 길을 동경하고 예측불허의 환경에 몸을 던진다. 도전의 대가는 성공의 신화를 낳기도 하지만 실패 속에 교훈을 얻기도 한다. 그 교훈은 깨달음이 되어 남은 인생의 향방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그러니 성공이 끝이 아니듯 실패는 결코 패배가 아닐 것이다.

산티에고의 밤거리
▲ 남자의 변신은 무죄 산티에고의 밤거리
ⓒ 김경수

관련사진보기


아타카마사막에서
▲ 빛을 보다, 희망을 보다 아타카마사막에서
ⓒ 김경수

관련사진보기


200년 기상관측 이래 비가 단 한 차례도 내리지 않은 곳. 달의 형상과 가장 흡사한 지구 속 또 다른 행성. 지구상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소금사막. 10년 전 남미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을 건너기 위해 시각장애인 이용술씨와 손을 잡았다.

2006년 7월 말, 미국 LA와 칠레 산티에고를 거쳐 고도 3150m의 고원 도시 깔라마(Calama)로 들어갔다. 숨 가쁜 오지로의 여정은 약 100km를 더 달려 설산과 사막이 공존하는 잉카시대 이전의 마을, 아타카마(San Pedro de Atacama)에서 멈췄다. 지구 반대편인 이곳은 벌써 한겨울로 접어들었다. 개울은 살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건조한 대기는 선수들의 입술을 깊게 갈라놓았다. 

고도 4288m, 하늘과 맞닿은 마추카(Machuca) 마을의 성당 앞마당에 극한을 쫓아 20개국에서 134명의 철각들이 모였다. 수천만 년 전 바다가 융기해 만들어진 주변 협곡은 풍화작용이 만들어낸 기묘한 형상들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7일간 252km의 아타카마 산야와 소금사막을 넘나드는 대장정이 시작됐다. 머리를 죄는 고산병보다 오랜 세월 황토와 바람이 빚어낸 자연경관에 더 숨이 막혔다. 좌장처럼 우뚝 선 리칸카부르(Licancabur) 활화산도 웅장한 위용을 과시하며 선수들을 압도했다.

극한 레이스, 진흙·소금 덩어리로 범벅된 신발을 털다 잠들었다

자연은... 예술이다
▲ 고통 속의 환희 자연은... 예술이다
ⓒ 김경수

관련사진보기


마추카 마을 출발선상에서
▲ 아타카마, 더 깊은 곳으로 마추카 마을 출발선상에서
ⓒ 김경수

관련사진보기


레이스 첫째 날, 종일 푸석한 흙먼지를 들이키며 리버 밸리(River Valley)를 오르내리다 석양을 만났다. 태양이 붉은 땅거미를 길게 드리우다 계곡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앞선 선수들은 진즉 시야에서 모두 사라졌다. 어둠이 깔리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주로는 가파른 습지의 소금 펄밭을 지나 계곡의 강줄기로 이어졌다.

굽이 도는 4.5km 계곡을 따라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수십 개의 물길을 넘나들었다.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물속에 몸을 담그자 찌릿한 한기가 허리를 조여 왔다. 피를 말리는 긴장 속에 용술씨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 형, 조심!", "이 형! 조심!"이 전부였다. 

추위와 허기로 에너지는 모두 소진 됐지만 두 다리는 주로를 찾아 흙탕물을 허우적거렸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후미에 처진 일본 여자선수 미애(Minezawa Mie)까지 챙겨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CP4에 도착해 의식을 잃어가는 미에를 의료진에게 인계했다.

밤 10시 40분, 지친 몸을 이끌고 36km를 달려 도착한 캠프는 적막했다. 아타카마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진흙과 소금 덩어리로 범벅이 된 신발을 털다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오늘 온전히 내 어깨에 기댄 두 영혼이 있었지만 길라잡이인 나의 공포와 두려움이 그들보다 덜하진 않았다.

가자! 리칸카부르 화산으로
▲ 자연과 하나 되다 가자! 리칸카부르 화산으로
ⓒ 김경수

관련사진보기


시각장애인 이용술씨와 함께
▲ 여기서 멈출수 없다 시각장애인 이용술씨와 함께
ⓒ 김경수

관련사진보기


투혼과 체념의 경계에서도 아름다웠던 뒷모습

문명의 혜택이 철저히 단절된 아타카마로 너무 깊숙이 들어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창끝처럼 날이 선 소금 결정체들이 성난 야수처럼 신발 밑창과 옆구리를 물어뜯었다. 불어 튼 물집은 모두 터져버렸다. 용술씨의 무릎 부상은 더욱 깊어갔다. 그래도 1m 생명의 끈으로 연결된 아시아의 두 사내는 이 위험천만한 레이스를 멈추지 못했다.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42km와 소금사막 40km을 건너 레이스 4일째를 맞았다. 용술씨의 두 다리는 스스로 몸을 지탱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종일 왼쪽 다리를 질질 끄는 사투 끝에 42.8km의 마지막 3번째 구간인 <악마의 발톱> 입구에 섰다. 부상의 투혼을 안고 들어서려 했지만 의료진의 저지로 멈춰서야 했다. 그리곤 참담한 심정으로 물통의 남은 물을 모두 비우고 후송 차량에 몸을 실었다.

"같이 못 가서 미안하다!"

레이스 5일째 아침, 나는 캠프에 남겨진 용술씨의 배웅을 받으며 무박 2일 81.5km 롱데이 코스로 내몰렸다. '사랑한다. 용술아! 네 몫까지 달리고 오마.' 손인사로 대신하고 홀로 달의 계곡(Valley of the Moon)으로 향했다. 온몸을 오그라뜨리는 칼바람보다 끝내 그의 손을 놓은 것이 더 나를 서글프게 했다. 밤이 깊어지자 축축하던 신발이 얼어붙었다. 심신의 고통을 짊어지고 지독히 외로운 소금계곡 터널로 빨려 들었다. 가혹한 대자연의 시련 앞에 피눈물을 삼키며 밤새 달팽이관 같은 계곡 사이를 맴돌다 여명을 맞았다.

계곡물도 주로다
▲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간다 계곡물도 주로다
ⓒ 김경수

관련사진보기


아타카마사막의 밤
▲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 아타카마사막의 밤
ⓒ 김경수

관련사진보기


레이스 마지막 날. "이 형, 언제 다시 올지 기약할 수 없어. 지금 뛰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지 몰라." 레이스를 포기한 용술씨를 설득한 끝에 그의 손목을 끌고 출발선상에 섰다. 완주가 확정된 선수들은 모두 감격에 도취됐다. 12km를 달려 산 페드로(San Pedro) 마을 어귀로 들어서자 결승선 주변은 축제 분위기로 요란했다. 아르마스 광장을 지나 산 페드로 성당에 다다르자 결승선이 훤히 보였다.

대회 운영자인 메리 가담스(Mary K Gadams)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선수들에게 묵직한 완주 메달을 목에 걸어주며 포옹했다. 지난 7일 동안 사선을 넘나들던 격정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다리를 절며 메리에게 다가서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외면했다. 그 순간 주변의 환호성은 스피커의 연결 잭이 뽑힌 듯 정적으로 변했다.

도우미는 레이스의 주인공이 아니다. 나는 조연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 형, 메달은 목에 걸지는 못했지만 후회 없는 레이스를 한 거야."
"우린 최선을 다했잖아."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 극한의 레이스를 완주로 이어가지 못했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인생의 단면을 알았다. 투혼과 체념의 경계에서도 그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불가능이란 시도하지 않은 자의 변명이다. 도전하지 않으면 성공도 실패도 없다. 이것이 고이 살아온 내 삶의 버팀목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면, 지금 어떤 상념에 잠기던 상관 없다.

캠프에서
▲ 상처의 고통은 참아내면 그만! 캠프에서
ⓒ 김경수

관련사진보기


252km 결승선 앞에서
▲ 기적이란... 환경을 이겨내는 것 252km 결승선 앞에서
ⓒ 김경수

관련사진보기




태그:#사막, #오지, #김경수, #아타카마, #내 인생의 사막을 달리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나는 여행을 핑계삼아 지구상 곳곳의 사막과 오지를 넘나드는 조금은 독특한 경험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오지레이서라고 부르지만 나는 직장인모험가로 불리는 것이 좋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지난 19년 넘게 사막과 오지에서 인간의 한계와 사선을 넘나들며 겪었던 인생의 희노애락과 삶의 지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