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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6일 부산 신평장림공단 내 3층 신발공장 옥상에서 몸을 던진 여성 미싱노동자 권아무개씨의 왼팔에는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는 내용의 유서가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1991년 12월 6일 부산 신평장림공단 내 3층 신발공장 옥상에서 몸을 던진 여성 미싱노동자 권아무개씨의 왼팔에는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는 내용의 유서가 또박또박 새겨져 있었다.
ⓒ 손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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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바람 탓이다.

책장서 싯누런 책을 꺼내 들다, 잊혔던 사진 한 장이 날린다. 바닥으로 흐느적 엎어진 사진이 느닷없이 설경구의 하얀 박하사탕이 되어, 아프고 충격적인 기억 속으로 떠민다.

1991년 12월 6일 오후.

부산 신평장림공단 내 신발공장 여성 미싱노동자였던 권아무개씨는 3층 공장 옥상에서 몸을 던진다. 그녀의 나이 23세.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억압의 땅에 묻지 말고
그대들 가슴에 묻어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00이다"


그녀는 혹 이 절규가 사라질 것을 우려해, 자신의 왼팔에 유서를 또박또박 새겼다. 팔뚝의 유서는, 그대로 그녀의 묘비명이 됐다.

완구공장 다니는 어머니, 노동일 하는 오빠, 밑으로 두 동생을 둔 그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생업에 뛰어든 소녀가장이었다. 야간 중학교까지 다니면서, 힘든 하루하루를 견디며 꽃다운 청춘을 꿈꾸던 권씨.

회사 관리자들은 초시계를 들고 다니면서까지 노동자들을 쥐어짰고, 배고파 빵조각을 먹다 들키기라도 하면 들어야 하는 폭언과 징계를, 여린 나이의 그녀가 견디기에는 너무 힘겨웠다.

경찰은 시신은커녕 팔뚝 유서 내용마저 확인해주지 않았다. 결국, 평소 속내를 나누던 한 형사에게 공급원을 절대 밝히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받고, 그녀의 팔뚝 유서 사진을 몰래 건네받았다. 허나 당연히 기사와 함께 실려야 할 이 사진은 무슨 선동적이고, 자극적이란 말 같지 않은 이유로 보도되지 않았다.

2017년 여름.

국민을 '개돼지'로 부르는 고위관료님.
운전기사들에게 쌍욕을 경영지침 삼아 내뱉는 사장님들.
제자에게 인분을 먹였다는 교수님.
썩은 과일 따위를 공관병에게 던지셨다는 육군 대장 사모님.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이 야만적인 레퍼토리들.

이쯤 되면 우리 사회는 이미 계급, 신분사회다. 강산이 몇 번 바뀐들, 정권이 아무리 엎치락뒤치락한들, 그들만의 리그에서 선수와 포지션만 일부 반복 교체되는 꼴이다.

'갑'이라 불리는 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를 이어 하는 짓들이 딱 그렇고, '을'.'병' 취급당하는 대다수는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사소한데에도 목숨 걸고 살아야 한다.

그녀가 옆 동료들에게 울먹이며 건넸다는 마지막 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느냐, 이곳이 바로 지옥 아니냐?"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린 지금 제 이름이 불리고 있는가.
우린 지금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1991년 12월 투신한 미싱노동자 권씨 사망 사건 당시, 공장 앞에서 경찰들과 대치하고 있는 사회노동단체 관계자들 사이에 취재 중이던 젊은 내 모습도 있다. 지금 봐도 참 까칠해 보인다. 당시 시위취재 때 필수 장비인 보도하이바, 군용방독면을 에프엠대로 차고 있다. 어두워지면서 대치상황이 전투상황으로 돌변해 최루탄, 각목이 난무하자 가죽점퍼,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었던 나는 백골단 소대장쯤으로 오인돼(아님 기자인 줄 알고 일부러...) 각목으로 머리를 맞아 병원으로 실려 갔다.
 1991년 12월 투신한 미싱노동자 권씨 사망 사건 당시, 공장 앞에서 경찰들과 대치하고 있는 사회노동단체 관계자들 사이에 취재 중이던 젊은 내 모습도 있다. 지금 봐도 참 까칠해 보인다. 당시 시위취재 때 필수 장비인 보도하이바, 군용방독면을 에프엠대로 차고 있다. 어두워지면서 대치상황이 전투상황으로 돌변해 최루탄, 각목이 난무하자 가죽점퍼,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었던 나는 백골단 소대장쯤으로 오인돼(아님 기자인 줄 알고 일부러...) 각목으로 머리를 맞아 병원으로 실려 갔다.
ⓒ 손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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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뚝유서 #미싱노동자 #노동자투신 #육군대장부인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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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모이, #팔뚝유서, #미싱노동자, #노동자투신, #육군대장부인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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