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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사랑과 낭만의 계절이다. 또한 여행의 계절이다. 바쁘게 일하던 직장인들에게는  휴가가 주어진다. 많은 사람이 국내외로 여행을 떠난다. 7월 말에는 하루에 인천 공항을 이용해 출국하는 사람이 10만 명을 넘어섰다. 하루 출국 인원으로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여행은 낯선 환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준비와 용기가 필요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의미를 부여해야 가치가 생긴다. 여행은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알아가는 탐구와 인식의 즐거움이 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한다. 사람을 만나고 역사를 만나고 문화를 만나고 음식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쌓고 기분도 전환되고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또한 좀 떨어진 곳에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것이 여행이 아닌가? 여행은 배낭 가방을 쌀 때의 설렘이 있다. 배낭 가방을 멜 때의 짜릿한 어깨 맛이 있다. 낚시의 손맛보다 여행의 어깨 맛은 더욱 묵직하고 긴 여운으로 남는다. 여행은 알고 보면 중독성이 강하다. 한번 빠지면 끊지 못하는 마약처럼 멈출 수 없는 달콤한 끌림이 있다. 여름철 덥다고 집에만 있지 말고 가까운 것으로나 먼 곳으로 배낭 하나 메고 가볍게 떠나보자! 여름이 되면 열 일 다 제쳐 두고 습관처럼 배낭 하나 메고 집을 나서보자. 올 여름에는 중국 하북성 지역의 항일운동을 한 인물들을 찾아보자고 나섰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중국 농촌의 모습. 모여있는 마을과 추수를 기다리는 듯한  노란 들판이 인상적이다.  휴대폰으로도 이 정도의 선명한 사진이 찍힌다.
▲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중국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중국 농촌의 모습. 모여있는 마을과 추수를 기다리는 듯한 노란 들판이 인상적이다. 휴대폰으로도 이 정도의 선명한 사진이 찍힌다.
ⓒ 박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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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이사가 아니다! 짐을 가볍게!

배낭여행인지라 가급적 짐을 가볍게 하였다. 꼭 필요한 물건만 챙기고 옷도 2벌씩만 챙겨서 짐이 3kg도 되지 않게 쌌다. 급한 것은 현지에서 조달하고 옷은 숙소에서 빨아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여행은 짐을 옮기는 이사가 아니다. 움직이고 활동하고 보고 느끼고 체험하고 색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짐이 무거우면 여행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역이 된다. 여행의 기분은 가볍고 즐거운데 짐이 무거우면 힘들고 고통스럽다. 작은 배낭 하나면 되니까 화물로 부치려고 공항에서 긴 줄을 설 필요가 없다. 또한 도착하여 짐을 찾느라고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스자좡 정딩 공항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40분쯤 달려서 스자좡 시내 중심부에서 내렸다. 다시 택시를 타고 스자좡 중심부에 위치한 화평공원(和平公園)으로 갔다. 기본요금이 8위안으로 우리 나라 돈 1500원 정도로 택시비는 저렴했다. 화평공원(和平公園)은 화북군구열사능원(华北军区烈士陵园)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도 단위의 국립묘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에 항거하다 전사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공원 입구 앞까지 지하철이 놓여있었다. 평상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하고 운동을 하는 등 공원역할을 하면서 조국을 위해 희생당한 분들을 추모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중앙에는 호국 영령들을 위한 기념비가 있고 분수광장과 국가를 위해 희생당한 분들의 동상과 흉상 등 조각물들이 세워져 있다. 비록 흉상이지만 그 얼굴들은 굳은 결의가 생생하게 느껴지면서 인간적인 따뜻한 표정의 면모였다. 일제의 침략이 없었더라면 저 분들은 자기의 인생을 살면서 가족들과 행복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해졌다.

중국의 공원은 넓다. 다 돌려면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한다. 큰 나무들이 잘 조성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쉬기도하고  운동을 하고 집단 체조도 한다.
▲ 스자좡 화평공원 중국의 공원은 넓다. 다 돌려면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한다. 큰 나무들이 잘 조성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쉬기도하고 운동을 하고 집단 체조도 한다.
ⓒ 박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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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북쪽에는 화북혁명전쟁기념관(华北革命战争纪念馆)이 있고 동쪽에는 열사묘와 열사기념관이 위치해 있다. 공원 안에는 버즘나무들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하늘 높이 솟아서 그늘이 되어주었다. 중앙에는 애국열사들의 흉상이 양옆으로 도열해 있는데 그 양옆으로 크게 자란 버즘나무와 대비되어서 조화를 이루었다. 공원 내에 군데군데 서 있는 백송들은 굳은 절개를 지키고 늘 푸르게 살라는 메시지 같았다.

한국에도 이 귀한 백송이 몇 그루가 있다. 그중 하나가 200여 년 전에 추사 김정희가 중국을 다녀오면서 예산에 심었다는 백송이 아직 남아있다. 예산의 백송은 오래된 노송으로 기개와 기풍이 서려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

이곳 현지의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라서 그런지 위풍이 있으면서 무성하게 자라서 추모공원에 심기에 적절해 보였다. 기개와 절개의 상징이 되는 백송을 전사들을 위한 추모 공원에 심은 것은 중국 당국의 세심한 조경정책 일환인지 아니면 원산지라서 흔하게 잘 자라는 나무라서 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추모 공원에 잘 어울리는 나무라고 여겨졌다. 화평공원은 현재를 살아가는 분들을 위한 휴식과 운동의 공간이면서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진 용사들을 위한 추모공간으로 현재와 과거가 적절하게 조화된 공원이었다.

한국에서는 몇그루 안되는 백송이 공원에 군데군데 심겨져 있었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 줄기가 희다. 가지가 밑에서부터 갈라져서 무성하게 자랐다.
▲ 화평 공원의 백송(白松) 한국에서는 몇그루 안되는 백송이 공원에 군데군데 심겨져 있었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 줄기가 희다. 가지가 밑에서부터 갈라져서 무성하게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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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노먼 베쑨(白求恩)의 묘 앞에 서다

필자가 이 공원에 간 것은 이 공원에 닥터 노먼 베쑨(중국에서는 白求恩이고 부른다)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전 1990년대 실천문학사에서 닥터 노먼 베쑨에 전기가 나왔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살아갈 길이 무엇인지 많은 감동을 받았었다. 의사는 환자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환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라는 말이 가슴 깊은 곳에 새겨졌었다.

그는 실제로 환자를 기다리지 않았다. 1920~30년대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환자들을 찾아서 가난한 동네로 나섰다. 스페인 내전이 나자 그는 스페인 전선으로 달려갔다. 노새가 끄는 이동식 구급차를 개발하고 수혈을 하면서 전선에서 생명을 구하려고 애썼다. 나중에는 일제와 치열한 항쟁을 벌이던 중국으로 들어갔다. 의학적인 지식이나 위생관념 부족했던 중국의 전선에서 무수한 의료적인 성과를 내었다.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죽어가는 생명을 건졌다.

그는 전선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느라 노인이 된 것처럼 수척해졌다. 결국은 젊은 병사를 살리기 위하여 수술을 하다가 손가락에 상처가 났다. 그 작은 상처에 쓸 치료약조차 없어서 패혈증으로 번지고 49세의 아까운 나이에 숨지고 말았다. 그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중국인들은 기념 공원을 만들고 그의 이름을 딴 병원과 의과대학을 세웠다.

베쑨을 기념하는 국제화평의원은 종합병원으로 스자좡 화평공원에서 1km 남짓한 거리에 있다. 흰색 까운을 입은 베쑨의 동상이 병원 앞에 서 있다.
▲ 베쑨국제화평의원 베쑨을 기념하는 국제화평의원은 종합병원으로 스자좡 화평공원에서 1km 남짓한 거리에 있다. 흰색 까운을 입은 베쑨의 동상이 병원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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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공원 안에는 베쑨을 기리는 기념정원과 묘소가 있고 기념관이 있다. 기념 묘소에는 그의 일생에 관한 사진들과 글을 대리석에 새겨 놓았다. 묘소 앞의 바닥은 단풍무늬로 형상을 새기어 놓아서 그가 캐나다 사람이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많은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이 베쑨 묘소에 찾아온다고 한다. 시간은 흐르고 전쟁은 멈추었어도 베쑨의 정신에 감동하고 그의 희생을 추모하는 마음들은 식지 않았다. 이 공원에 대한 안내가 중국어뿐 아니라 영어와 한글로도 표시가 되어있는데 한국인들도 종종 찾아오기 때문일 것이다.

화북열사능원안내도에는 영어와 한글로도 표시되어 있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공원 안에 애국열사들을 추모하는 교육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왼편에 베쑨 기념 정원이 있다.
▲ 화북열사능원안내도 화북열사능원안내도에는 영어와 한글로도 표시되어 있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공원 안에 애국열사들을 추모하는 교육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왼편에 베쑨 기념 정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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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쑨 기념관에는 베쑨의 삶과 활동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를 기념하는 우표, 그가 남긴 시, 그가 개발한 의료기구, 그가 쓰던 의료도구들과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활동했는지 많은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베쑨의 흔적과 그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의사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중국 내륙의 오지로 들어간 베쑨은 수많은 강을 건너고 험준한 태항산맥을 넘었다. 

베쑨의 묘소는 화북열사능원의 베쑨기념정원에 위치해 있다. 앞에는 흰색 가운을 입은 동상이 있고 뒤에 묘소가 있다. 주변에는 베쑨 기념 사진 등이 돌판에 새겨져 있다. 정원 오른쪽에서는 베쑨기념관이 있어서 베쑨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볼 수 있다.
▲ 베쑨묘소 베쑨의 묘소는 화북열사능원의 베쑨기념정원에 위치해 있다. 앞에는 흰색 가운을 입은 동상이 있고 뒤에 묘소가 있다. 주변에는 베쑨 기념 사진 등이 돌판에 새겨져 있다. 정원 오른쪽에서는 베쑨기념관이 있어서 베쑨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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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다들 장사꾼의 세상이라고 한다. 의사는 의료를 이용한 장사꾼, 법을 다루는 사람은 법을 이용해서 돈 버는 장사꾼, 교육도 결국은 출세를 위한 방편이 된 것이 21세기 신자본주의 시대의 병폐인 듯하다. 의사는 고치고 살리는 것이 본질이고 법조인들은 정의를 세우는 것이 본연의 사명일진대 돈벌이와 밥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지는 않았는지 베쑨의 사진을 보면서 부끄러워졌다. 그런데 21세기 신자본주의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한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든 시대가 되었으니 청년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베쑨 모습의 흉상이 베쑨 기념관에 전시되어있다. 베쑨에 대한 중국인들의 사랑을 알 수 있다. 돌로, 청동으로, 부조로 베쑨을 잊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추모하고 있었다.
▲ 베쑨흉상 베쑨 모습의 흉상이 베쑨 기념관에 전시되어있다. 베쑨에 대한 중국인들의 사랑을 알 수 있다. 돌로, 청동으로, 부조로 베쑨을 잊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추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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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쑨을 추모한 마오쩌둥(毛澤東)의 글

베쑨의 묘소 하단에는 마오쩌둥이 베쑨을 추모하면서 쓴 글이 인상적으로 새겨져 있었다.

'한 외국인이 조금의 이기적인 동기도 없이, 중국에 와서 인민들의 해방 사업을 자기 일처럼 당연히 하였다. 이것이 무슨 정신인가? 이것이 국제주의 정신이요, 이것이 공산주의 정신이다. 각각 모든 중국공산당원들은 이런 정신을 배워야만 한다.'

베쑨에 대한 마오쩌둥의 추모와 평가는 또 다른 부조된 여러 글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부조된 글 하나를 소개해 보면 이렇다.

'한 사람의 능력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고귀한 사람, 순수한 사람, 도덕적인 사람, 저급한 관심을 넘어선 사람,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게 하는 한 사람이었다.'

베쑨을 추모하는 마오쩌둥의 글이 베쑨의 모습과 함께 돌판에 새겨져 있다. 짧은 글 속에는 베쑨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순수하고 모두에게 유익을 끼쳤던 고귀한 사람이었다.
▲ 베쑨을 추모하는 마오쩌둥의 글 베쑨을 추모하는 마오쩌둥의 글이 베쑨의 모습과 함께 돌판에 새겨져 있다. 짧은 글 속에는 베쑨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순수하고 모두에게 유익을 끼쳤던 고귀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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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어떤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달려 있다. 척박한 시대 속에서 어떤 정신을 갖고 살아야 하는가? 우리 각자의 미래에 대한 평가는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정신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달려있음을 느꼈다. 사는 것은 단순히 먹고 입는 것이 아니다.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다. 어떤 일을 이루는 것이다. 나는 어떤 정신으로 무엇을 이루며 살고 있는가 반문해 보았다.

베쑨은 환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환자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가난한 동네의 환자에게로, 스페인 내전의 현장으로, 일제와 싸우는 중국의 전투 현장으로 달려갔다. 베쑨 묘소 옆에 새겨진 수술 장면. 산시성의 오대산 전투 현장에서 수술하는 장면이다.
▲ 베쑨의 수술장면 베쑨은 환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환자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가난한 동네의 환자에게로, 스페인 내전의 현장으로, 일제와 싸우는 중국의 전투 현장으로 달려갔다. 베쑨 묘소 옆에 새겨진 수술 장면. 산시성의 오대산 전투 현장에서 수술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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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시대 1919-1949년!

화평 공원 북쪽에는 화북혁명전쟁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을 인상 깊게 하는 것은 건물 옥상에 걸린 붉은 색으로 세워진 1919-1949라는 대형 글자이다. 1919년에서 1949년은 외부적으로는 일제와 싸운 항일전쟁을 치룬 기간이면서 내부적으로는 해방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기간이었다. 이 30년 동안 중국은 외부의 항일전쟁과 내부의 인민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냈고 중국 미래를 결정한 중요한 시기였다.

1919년은 한국인들에게는 곧바로 3.1만세운동을 떠오르게 한다.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해이다. 한국은 중국보다 먼저 3.1운동을 일으키면서 일제에 대항했다. 중국에서도 1919년에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의 기치를 치켜든 5.4운동 일어났다. 1919년에서 1949년 사이, 이 30년 기간에 중국 대륙에서는 외부 침략 전략을 막아내고 구체제와 내부의 문제를 극복하는 내전을 거쳐서 새로운 중국인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화평공원에서 1km 남짓 떨어진 곳에 베쑨국제화평의원(白求恩國際和平醫院)이 있다. 의원이라고 해서 한국처럼 작은 병원이 아니다. 많은 사람과 의사들이 분주히 오고가는 대형 종합병원이다. 중국에서는 병원을 의원으로 표현하고 있다. 베쑨을 기념하는 병원 입구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베쑨의 동상이 서 있다. 중국인들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베쑨을 잊지 않고 그의 정신을 정성으로 기리고 있었다. 화평 공원, 노먼 베쑨의 묘소, 기념관, 화북혁명전쟁기념관, 베쑨국제화평의원 등을 둘러보고 한딴(邯單)의 진광화, 윤세주 묘소를 찾아보기 위하여 스자좡 역으로 택시를 타고 달렸다. (계속)

 1919-1949 조각이 새겨진 전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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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쑨 기념관 안에 있는 베쑨 형상. 베쑨을 기리는 정신이 얼마나 정성인지 돌로 만들어진 베쑨의 모습이다. 그 앞에는 꽃다발로 장식이 되어 있다.
▲ 베쑨을 위한 추모 베쑨 기념관 안에 있는 베쑨 형상. 베쑨을 기리는 정신이 얼마나 정성인지 돌로 만들어진 베쑨의 모습이다. 그 앞에는 꽃다발로 장식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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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쑨에 대한 서적들을 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 베쑨 추모관에는 베쑨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 베쑨추모서석들 베쑨에 대한 서적들을 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 베쑨 추모관에는 베쑨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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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닥터노먼베쑨, #화평공원, #화북열사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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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 출신. 경기도 광주 거주. 환경, 복지, 여행, 문학, 통일에 관심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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