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독립기념관에서는 지난 6월 27일부터 7월 1일까지 4박 5일 간 '2017 대학생 나라사랑 역사탐방'을 실시했습니다. 전국의 역사학과 및 교육대학교 재학생 30명으로 구성된 탐방단은 일본 가나자와·도쿄 지역 일대의 독립운동사적지 등을 둘러보고 한·일 양국의 역사청산과 화해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탐방 간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기 위해 탐방 수기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 – 기자 말

(* 3부 <또 다른 군함도, 누카다니 동굴>에서 이어집니다)

"개선의 노래는 높게 울려퍼지나 / 지금은 돌아올 수 없는 대장부 / 깊은 바다에 가라앉아 /지금은 황국의 수호신이로다 /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 공훈을 그리워하는 국민들이여 / 영원히 잊지 말도록 하자 그 이름"

1944년에 발표된 일본군가 <아아! 가미가제특별공격대(鳴呼神風特別攻撃隊)>의 한 대목이다. 이 노래가 발표됐을 당시는 이미 일본 전역에 패전의 기운이 짙게 드리워진 때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는 광기에 휩싸여 청년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덴노를 위해 기꺼이 옥쇄(玉碎: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하라"는 명령과 함께.

가사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당시 군인들은 덴노를 위해 죽은 뒤 '황국의 수호신'으로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 합사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했다. 오죽하면 전장으로 떠나기 전 그들이 나누었던 마지막 인사말이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것이었을까.

전범들이 '신'으로 모셔진 장소, 야스쿠니

 가미카제가 탑승한 제로센이 미 군함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
 가미카제가 탑승한 제로센이 미 군함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
ⓒ 자료사진

관련사진보기


야스쿠니는 개항 이후 일본이 치른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전사자들의 넋을 받들기 위해 1869년(메이지 2년)에 세워진 신사다. 메이지 유신 당시 옛 막부 세력과 싸우다 죽은 이들부터 태평양전쟁 전사자에 이르기까지 그 수만 246만 6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끊임없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시설이기도 하다.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을 비롯해 침략전쟁을 일으키거나 참여했던 이들을 신으로 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신격화는 과거 일제가 저지른 침략전쟁에 대한 정당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존재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곳에 합사된 이들 중에는 조선인과 타이완인 등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식민지 백성들도 존재한다. 그 수만 각각 2만 1천여 명과 2만 8천 명에 달한다.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로 끌려갔던 그들이 성전(聖戰)의 완수를 위해 싸우다 죽은 일본의 신(神)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국과 타이완의 유족들이 함께 야스쿠니를 찾아 위패를 돌려달라고 항의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야스쿠니 측은 "이곳에 합사된 신들은 이미 하나가 됐기에 분리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위패 인계를 거부했다. 앞서 가나자와의 대동아성전대비가 그랬듯이 이곳 야스쿠니 역시 영혼의 강제동원이 이뤄지는 비극의 현장인 셈이다.

 지난 2013년 12월 26일, 일본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지난 2013년 12월 26일, 일본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이런 문제들이 있기에 야스쿠니는 늘 국제적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내각 수반인 총리가 적극적으로 참배에 나서는 등 보란 듯이 피해자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당연히 야스쿠니에 대한 한국과 아시아 여러 국가들의 감정도 좋을 리 없다. 과거 발칸 반도가 유럽의 화약고였다면 이곳 야스쿠니는 21세기 아시아의 화약고나 다름 없는 셈이다.

문제적 장소, 야스쿠니에 가다

우리가 '문제적 장소'인 야스쿠니를 방문한 것은 지난 6월 30일, 탐방 4일차가 되는 날이었다. 야스쿠니는 빌딩으로 빽빽이 들어찬 도쿄 번화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사 입구에는 근대 일본군의 창설자로 불리는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 1824~1869)의 동상이 높이 선 채 참배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사에 들어선 이후부터 온 몸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과거 야스쿠니에서 벌어진 일들이 떠오른 탓이다. 2009년 야스쿠니를 방문했던 한 캐나다인 청년이 신사참배에 대해 항의성 질문을 던졌다가 신변의 위협을 받는 일이 있었다. 최근엔 한국인 청년이 폭탄 테러를 시도했다가 검거되면서 혐한 세력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혐한 시위를 대대적으로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야스쿠니는 일본의 우익·혐한 세력들의 단골 정모 현장인 탓에 자연스레 주위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하이덴(拜殿)'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하이덴(拜殿)'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방문객들이 야스쿠니의 신령들에게 참배하는 하이덴(拜殿)을 지나 우측으로 꺾으니 커다란 현대식 건축물이 등장했다. '유슈칸(遊就館)'. 근대 일본이 치른 전쟁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전시관이었다. 우리로 치면 전쟁기념관인 셈이다.

유슈칸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고전인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에 있는 '君子居必擇鄕遊必就士(군자는 장소를 잘 가려 거처하고, 교제는 반드시 훌륭한 선비와 해야 한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위치한 전쟁기념관, '유슈칸(遊就館)'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위치한 전쟁기념관, '유슈칸(遊就館)'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야스쿠니에 외국인 판사의 기념비가 세워진 까닭

입구에는 인도인 '라다비노드 팔(Radhabinod Pal: 1886~1967)'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팔은 전후 도쿄에서 열린 국제군사재판에 참석했던 인도인 판사였다. 왜 일본은 야스쿠니에 자신들을 심판했던 외국인 판사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워둔 것일까.

팔은 친일 성향이 매우 뚜렷한 판사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대동아공영'이라는 일제의 허황된 논리에 경도됐던 그는 도쿄재판에 참여한 12명의 판사 중 유일하게 전범들 전원에게 무죄 의견을 냈다. 그가 든 논거는 "전쟁 수행은 국가의 주권행사이며 침략이라는 개념은 법적으로 정의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팔의 무죄 의견 덕분에 당시 사형을 앞두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安信介: 1896~1987) 전 총리도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그의 외손자가 바로 아베 신조 총리다. 아베 총리는 2007년 인도를 방문했을 당시, 팔의 아들을 만나 "많은 일본인들이 당신의 아버지를 기억한다"고 감사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을 옹호한 팔은 '생명의 은인'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1966년 일본을 방문한 팔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또 2005년에는 유슈칸 앞에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적극 활용해오고 있다.

 전후 도쿄 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들에게 무죄 의견을 제시했던 친일 성향의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Radhabinod Pal: 1886~1967)' 기념비
 전후 도쿄 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들에게 무죄 의견을 제시했던 친일 성향의 인도인 판사 '라다비노드 팔(Radhabinod Pal: 1886~1967)' 기념비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침략전쟁이 성전으로 둔갑해 있던 '유슈칸'

입구에서부터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유슈칸 안으로 들어섰다. 1층 로비에는 일제가 가미가제 자살공격에 활용했던 '제로센' 전투기를 비롯해 각종 비행기와 화포, 어뢰 등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사무라이의 혼'을 테마로 하는 제1전시실이 나타났다. 들어서자마자 우리가 마주한 것은 한 자루의 예리한 칼이었다. 일명 '원수도(元帥刀)'였다. 덴노가 일본군 육·해군 대장에게 하사했다는 원수도는 지휘권을 상징하는 칼이었다.

이 칼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수많은 총구가 불을 뿜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을 것이다. 조명이 반사되어 빛나는 검광(劍光)은 무자비했던 일본군의 눈빛을 닮아 있는 듯해 섬뜩하기까지 했다. 수많은 피로 물든 군국주의의 상징이 신물(神物)처럼 모셔지면서 내뿜는 광기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제1전시실 입구에 신물(神物)로 모셔지고 있던 '원수도(元帥刀)'
 제1전시실 입구에 신물(神物)로 모셔지고 있던 '원수도(元帥刀)'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이어지는 '근대 역사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수행했던 침략전쟁(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역사를 차례대로 소개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당시 일본군이 전쟁에 썼던 무기들을 비롯해 깃발, 군복, 지휘봉 등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동안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워왔던 일제 침략의 역사는 서구열강에 맞서 아시아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본이 수행한 성전(聖戰)이자 근대화의 역사로 둔갑해 있었다.

 근대 역사실에 전시되고 있던 근대 일본군의 군복 및 무기류들
 근대 역사실에 전시되고 있던 근대 일본군의 군복 및 무기류들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일본군 상하이 주둔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1869~1932)'의 피 묻은 셔츠.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일본군 상하이 주둔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1869~1932)'의 피 묻은 셔츠.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일본의 총리대신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A급 전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의 유품들.
 일본의 총리대신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A급 전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의 유품들.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유슈칸에 걸려있던 '제2차 세계대전 후 각국 독립' 지도. 지도는 전후 아시아 약소민족들이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서구열강에 맞서 승리를 이룩함으로써 열강의 압박 아래 놓여 있던 아시아 민족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불어넣어주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었다.
 유슈칸에 걸려있던 '제2차 세계대전 후 각국 독립' 지도. 지도는 전후 아시아 약소민족들이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서구열강에 맞서 승리를 이룩함으로써 열강의 압박 아래 놓여 있던 아시아 민족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불어넣어주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었다.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나부끼는 욱일기 아래 울려퍼지던 군함행진곡

영상실에 들어서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을 느꼈다. 전범기(욱일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익숙한 곡조의 군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일제가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을 독려하며 불렀던 <군함행진곡>이었다.

"바다로 가면 / 물에 잠긴 시체 / 산으로 가면 / 풀이 난 시체 / 덴노의 곁에서 죽어도 / 돌아보는 일은 없으리"

욱일기와 군함행진곡은 일제 군국주의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이따금씩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조차 유명 연예인들이 욱일기로 디자인한 옷을 입고 나올 때마다 누리꾼들의 거센 반발을 마주해야 하는 것도, 그 깃발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짓밟힌 가슴 아픈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억압과 침탈의 상징들이 유슈칸에서는 일본의 우월한 역사를 선전하는 전시물로 활용되고 있었다.

 전범기인 욱일기가 걸린 가운데, 군함행진곡이 흐르고 있던 영상실
 전범기인 욱일기가 걸린 가운데, 군함행진곡이 흐르고 있던 영상실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강제'라는 단어가 쏙 빠져있던 '한국병합'

'한일강제병합'에 대한 설명도 심각했다. '강제'라는 단어를 쏙 빼놓은 채 '한국병합'이라는 말로 축소·왜곡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 43년(1910년) 8월, 신임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한국의 총리 이완용이 조약안을 협의했다. 한국 정부는 22일 각료를 포함한 어전회의에서 이 조약안을 승인·재가함으로써 한국병합조약이 조인됐다."

설명문만 놓고 보면 마치 병합조약이 국가 간 평등한 협상을 거쳐 정당하게 체결된 것처럼 보인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가려지나...'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한 꼼수에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었다. 그마저도 그 넓은 전시실 벽면 한 켠에 달랑 한 페이지 분량으로 소개되고 있어, 하마터면 못 보고 넘어갈 뻔 했을 정도였다.

 일제의 한국 침탈을 '한국병합'이라는 말로 축소·왜곡 설명하고 있던 안내문
 일제의 한국 침탈을 '한국병합'이라는 말로 축소·왜곡 설명하고 있던 안내문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마지막 전시실로 들어섰다. 군복 입은 청년들의 사진이 빽빽이 진열된 추모의 공간이 펼쳐졌다. 이 낡은 흑백 사진 속 청년들은 모두 일제가 대동아성전이라 주장하는 침략전쟁에서 죽어간 군인들이었다. 자신들에게 다가올 미래를 모른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앳된 얼굴의 그들을 보면서 나는 분노가 아닌 연민을 느꼈다.

자발적이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이들 역시 일제 군국주의의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청년들에게 주입시켰고, 순진한 청년들은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만이 진정한 애국이라 믿었다. 그들도 결국 전쟁의 또다른 피해자들이었을 뿐이다.

피어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간 이들의 청춘은 과연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남겨진 자들의 슬픔은 또 어찌할 것인가. 국민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오히려 국민들에게 죽음을 강요했던 일본의 지난 역사를 되짚어보며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 강한 회의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전시실에 도배되어 있던 야스쿠니 합사자들의 사진
 마지막 전시실에 도배되어 있던 야스쿠니 합사자들의 사진
ⓒ 김경준

관련사진보기


이제는 '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공간'으로 거듭나야

우리가 야스쿠니에서 본 것은 반성 없는 일본의 모습이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사과하고, 나치의 발굽 아래 숨져간 유대인 희생자들의 위령탑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한 독일과 달리 일본은 자신들의 역사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미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는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이란 점을 알아야만 한다. 일본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과거 자신들의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하는 움직임을 보여야만 할 것이다.

그 첫 번째 과제가 바로 야스쿠니의 해체다. 전범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야스쿠니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공간'을 조성하면 어떨까. 위안부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위한 추모시설을 건립하고, 아시아의 평화를 약속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일본이 진정 자신들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아시아 여러 민족과 화해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런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반성 없는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용서란 없기 때문이다.

(* 5부에서 계속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애국선열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고자 하는 역사학도 / 以茶靜心 以武健身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