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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친숙한 사람이라면 판(版)과 쇄(刷)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판은 활자를 틀에 새기고 그 틀에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내던 전통적인 출판기술에서 유래한 용어로 책을 인쇄할 때 기준이 되는 단위를 말한다. 내용과 목차가 확정돼 책을 처음 찍어내면 초판이라 하고 이를 수정해 다시 찍을 경우 개판 내지 2판이라 한다.

쇄는 판매량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처음 찍어낸 책이 모두 팔려 새로운 책을 다시 찍어낼 때마다 2쇄, 3쇄 하는 식으로 숫자가 늘어난다. 유명 작가의 경우 초쇄로 3000부 가량을 찍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작가의 인지도, 예상되는 매출량에 따라 초쇄가 줄어들기도 한다. 한 쇄 당 부수가 정해진 게 아니다보니 정확한 계량은 어렵지만 쇄가 많다는 건 책이 꾸준히 팔렸다는 뜻이 된다. 쇄 앞에 붙는 숫자가 늘어날 수록 출판사와 작가의 입꼬리도 올라가게 마련이다.

독서인구 감소로 불황에 허덕이는 한국 출판계에서, 그중에서도 특히 고전하고 있는 문학계에서 100쇄는 꿈의 숫자다. 적극적으로 문예지를 찾아읽고 평단으로부터 주목 받는 신인이며 문학계 최신 트렌드를 좇는 마니아 층만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숫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작품이 기존 독자층을 넘어 대중과 만난 뒤에야 꿈꿀 수 있는 수치이며 최소 오륙 년의 꾸준한 판매고가 있어야 도달할 수 있는 업적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100쇄를 찍은 소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것이 사실상 문학계의 명예의 전당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껏 100쇄를 찍은 소설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최인훈의 <광장>,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정글만리>,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이문열의 <삼국지>,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안도현의 <연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김훈의 <남한산성>이 100쇄를 넘겼다. 출판사를 한 차례 이상 옮긴 박경리의 <토지>, 황석영의 <장길산>, 김훈의 <칼의 노래>, 김정현의 <아버지>도 100쇄를 넘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도 빼놓을 수 없다. 동화 중엔 최초로 황선미의 <나쁜 어린이표>가 100쇄를 기록했다. 외국소설 가운데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등이 100쇄를 넘겨 사랑받고 있다. 모두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작품이다. 100쇄가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만하다.

올 봄 90쇄를 찍은 <7년의 밤> 표지
▲ 7년의 밤 올 봄 90쇄를 찍은 <7년의 밤> 표지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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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들 다음으로 100쇄를 찍을 소설은 어떤 작품일까. 누가 내게 내기를 걸어온다면 나는 주저없이 정유정의 <7년의 밤>을 들 것이다. 출간 6년째인 올해 초 90쇄를 찍은 이 소설이 책 깨나 읽는 독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자주 이야기되고 또 팔려나가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답을 내릴 것이라 생각한다.

정유정은 검증된 장르문학 작가가 드문 한국 문단에서 귀한 존재다. 스티븐 킹으로 대표되는 미국 스릴러의 스타일을 마치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 능숙하게 활용하고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스쳐지나가는 작은 배경까지 생동감 있게 살려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이 모두가 장르문학 작가에겐 필수적이라 할 만한 요소로 웬만한 노력과 집중력으로는 달성하기 쉽지 않은 경지에 도달해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창작의 여로에서, 더욱이 전형이라 할 만한 길이 놓인 장르문학의 길에서 완성도 있으면서도 새롭게 느껴지는 작품을 내놓기란 보통의 공력이 들어가는 일이 아닌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7년의 밤>은 딸을 잃고 복수를 꿈꾸는 아버지와 그의 손에서 아들을 지키려는 아버지가 모든 것을 걸고 맞붙는 이야기다. 스티븐 킹을 비롯해 많은 장르소설 작가의 작품이 그렇듯 <7년의 밤>은 1인칭 시점에서 캐릭터 사이를 오가며 두 인물의 치명적 결점을 독자 앞에 가감 없이 까발린다.

아이를 잃은 아버지는 간악한 사이코패스이고 아이를 지키려는 아버지는 무능한 주정뱅이인데 7년 전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온전히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제3의 인물인 소설가가 7년 동안 추적해 기록한 내용을 바탕으로 7년 전 사건의 생존자였던 아이가 아버지를 대신해 악당에게 맞선다.

<해리포터> 팬들에게 킹스크로스역 9와 3/4 승강장이 그렇듯 <7년의 밤>을 읽은 독자에겐 세령댐 인근 마을이 소설과 관련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형성해줄 것이다. 치밀한 취재와 섬세한 묘사로 가상의 지역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꾸민 작가의 솜씨가 세령댐을 둘러싼 이야기에 묘한 설득력을 부여한다. 소설을 가로지르는 음험한 분위기에 세령댐 인근 마을 유지인 오영제와 같은 인간이 우리 주변 어딘가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은 섬뜩함이 불쑥 고개를 치켜든다.

평면적인 악당보다도 소설에 더욱 강한 인상을 심는 건 주인공 최서원의 엄마로 등장하는 강은주와 같은 인물이다. 무능한 남편에게 집요하게 잔소리하며 억척스럽게 가정을 이끌어온 강한 여자. 부드럽고 자유로운 성격의 여동생을 질투하면서도 청년시절 형성된 거칠고 질긴 성미를 좀체 버리지 못하는 애처로운 여자. 엄마이고 아내여서 더욱 강해지는 그녀의 캐릭터는 해외 다른 장르소설을 뒤져봐도 좀처럼 찾기 어려운 희귀한 성격의 인물이란 점에서 이 소설에 하나의 특색을 부여한다.

소설은 악당인 오영제보다도 강은주의 과거에 더욱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강은주라는 인물이 충분한 설득력과 존재감을 얻는다. 그리고 바로 이 같은 선택으로 소설은 악당과 주인공의 단면적인 대결구도에 머물지 않고 등장하는 여러 인물 사이에 긴장감을 생성하며 이야기의 폭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잘 만든 주변인 하나가 이야기 전체를 살리는 긍정적인 사례인 것이다.

정유정은 이 소설로 한국에도 스티븐 킹이나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음을 몸소 입증해냈다. 한 작품을 내놓는데 수년씩의 시간이 걸리지만 기다림 뒤에 어김 없이 완성도 높은 작품을 들고 돌아오는 성실함도 확인됐다. 그녀는 앞으로도 한국 장르문학을 떠받치는 한 기둥이 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같은 시대 독자의 취향을 저격할 수 있는 재주를 가졌으니 정유정의 전성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일 게 분명하다.

<7년의 밤>은 올해 중 개봉을 목표로 영화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연출은 <사랑을 놓치다>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유명한 추창민 감독이, 출연진엔 류승룡, 장동건, 송새벽, 고경표 등이 캐스팅됐다. 영화나 드라마의 원작소설이 인기를 끄는 근래의 경향을 감안하면 흥행성적에 따라 소설의 100쇄 돌파시기가 크게 앞당겨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7년의 밤 (교보 특별판, 양장)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2016)


태그:#7년의 밤, #은행나무, #정유정,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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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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