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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에 참가하느라 꼭두 새벽에 일어나는 게 싫어서 원래는 개인적으로 버스를 타고 모허 절벽(Cliffs of Moher)만 다녀오려고 했다. 그런데 4월 17일 아침에 체크아웃을 하다가 오전 10시에 출발해서 오후 6시쯤 돌아오는 Cliffs of Moher & Burren Tour 전단을 보고 충동적으로 신청해버렸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서둘러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버스에 올랐다. 사실 터미널에 가면 비슷한 투어를 하는 여행사들이 몇 있어서 즉석에서 신청을 해도 되는데 괜히 숙소에 수수료 5유로를 줬나 싶었지만, 어쨌든 투어를 택한 것이 잘한 일이었다는 결론이다.

내내 흐린 듯한 날씨가 조금 불안했지만 비만 안 오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투어를 순조롭게 마칠 수 있기를 바랐다.

16세기 골웨이 만 남동부 해안에 귀에어 왕의 이름을 따서 방어용으로 지어진 이 성은, 내부는 별 볼 게 없으나 성 주위를 벽을 따라 한 바퀴 돌며 풍경을 감상하는 맛이 쏠쏠하다.
▲ Dunguaire Castle 16세기 골웨이 만 남동부 해안에 귀에어 왕의 이름을 따서 방어용으로 지어진 이 성은, 내부는 별 볼 게 없으나 성 주위를 벽을 따라 한 바퀴 돌며 풍경을 감상하는 맛이 쏠쏠하다.
ⓒ 최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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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초기 버른 지방의 부유한 지주가 세운 원형의 요새 입구
▲ Chat Mhor 중세 초기 버른 지방의 부유한 지주가 세운 원형의 요새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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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버른 지역(The burren) 지역으로 이동했다.

"아일랜드 카운티골웨이(County Galway)에 있는 카르스트지형이다.
화산 폭발로 생긴 석회암이 수 천년 동안 침식하여 형성한 거대한 카르스트지형이다. 고산지대의 식물과 지중해성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이 함께 공존하는 특이한 환경으로 지질학자와 생물학자들의 관심을 끌며, 이곳의 바위 위를 걸으면 특이한 소리가 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 네이버 지식백과 내용 중

돌, 바람, 물... 이 세 가지가 풍부한 황량하고 넓은 아일랜드의 땅을 보니 문득 제주도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러고 보니 정작 제주도를 못 가본 지 20년도 넘었다).

약 5,000년 여 전 이 석회암 고원 위에 세워진 이 고인돌에서 30여구의 유골이 발견됐다고 한다.
▲ 고인돌(Poulnabrone) 약 5,000년 여 전 이 석회암 고원 위에 세워진 이 고인돌에서 30여구의 유골이 발견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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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를 위해 한 작은 마을에 내렸는데, 편의점 하나 구멍 가게 하나 없이 식당이 달랑 두 개뿐인 데다가 운전기사가 추천해 준 곳은 자리를 잡기조차 힘들 정도로 인산인해였다. 그나마 좀 덜한 다른 곳으로 옮겨 한참을 줄을 서서 주문을 하고 계산을 하려니 현금만 받는단다.

현금지급기조차 없는 이 작은 촌동네에서 '오갈 데 없는' 관광객을 상대한다는 이유로 이 무슨 배짱인가 싶었지만, 하느님이 보우하사 지갑에 마침 딱 식대만큼의 현금이 있었다. 다른 손님들 중에는 현금이 없어서 쩔쩔매는 이들도 있었다.

아침도 못 먹고 내내 굶은 터라 주어진 1시간 반 안에 어떻게든 요기는 해야겠기에 툴툴거리면서 기다리고 있노라니, 혼자라서인지 주문한 해산물 크램차우더가 생각보다 일찍 나왔다. 지역 재료들만으로 만든 홈메이드 스타일이라는데, 해산물이 듬뿍 담긴 진한 치즈 맛의 뜨끈한 국물을 한 입 떠먹는 순간, 방금 전까지의 불만스러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작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12세기에 세워진 코컴로 수도원(Corcomroe Abbey)에 있는 수녀들의 묘지
 12세기에 세워진 코컴로 수도원(Corcomroe Abbey)에 있는 수녀들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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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일명 '해리포터 절벽'으로 알려진 모허 절벽(Cliffs Moher)에 도착했을 때 처음엔 그 규모에 깜짝 놀랬다. 넉넉 잡고 한 30분 돌아보면 될 정도의 벼랑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중간의 안내 표지판을 기점으로 양쪽에 펼쳐진 끝도 안 보이는 그 어마어마한 거리라니... 실제로는 왼쪽이 모허 절벽이고 오른쪽에는 유료입장인 오브라이언 타워(O'Brien Tower)가 있다.

기사의 안내멘트를 놓쳐서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기사에게 몇 시까지 돌아오면 되냐고 물으니 '파 피프틴(far fifteen)'이란다. 파 피프틴? 보통 4시 15분 전이면 quarter to 4라고 하거나, 4시 15분이면 15 past 4라고 할 텐데 대체 파 피프틴이 뭔지... 소심한 맘에 기사에게 재차 물어보기도 뭣하고 혼자 끙끙댔는데 알고보니 그걸 4시 15분(four fifteen)'으로 단박에 못 알아들은 건 나뿐이었다. 아이리쉬 억양은 역시 독특하다.

암튼 주어진 세 시간 동안 양쪽을 다 끝까지 밟아보기에는 불가능해보이기에 일단 주인공인 왼쪽부터 되는대로 가보기로 했다.

이곳에 도착하니 내내 흐렸던 하늘이 훨씬 맑아져 찌뿌둥했던 내 마음도 점점 개이고 있었다.

해산물 크램차우더
 해산물 크램차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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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가도 끝은 보이지 않은 채 걸으면 걸을 수록 나타나는 장관에 나는 할 말을 잃고 그저 발길이 저절로 멈출 때까지 걸었다. 신기한 건 더블린과 골웨이에서 그렇게 추웠던 날씨가 바다와 절벽이 있는 이곳에선 오히려 따뜻하다 못해 아일랜드에 온 지 처음으로 등에 땀이 삐질삐질 배어나왔다. 오늘 비로서 아일랜드의 참 멋을 느낀 듯했다.

Cliffs of Moher2
 Cliffs of Moh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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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ffs of Moher3
 Cliffs of Mohe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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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80%쯤 왔다고 느꼈을 때 기어코 저 끝을 정복한 이들을 부러움으로 바라보며 방향을 틀기로 했다. 봐도봐도 놀라움과 경외심이 끝없이 샘솟는 이 비경... 계속 걷는데 뒤에서 한 한국인 남성의 말소리가 들린다.

"나중에 미운 사람하고 한 번 더 와야겠다~."

왜??? 이번엔 오브라이언 타워가 있는 오른쪽으로 향했다. 왼쪽에 비해 거리도 짧아보이고 더이상 새로운 풍경은 없었지만, 이쪽에서 바라보는 모허 절벽은 여전히 장관이었다.

경고판이 없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
 경고판이 없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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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있다가 버스로 복귀하려고 내려오는 길에 한 여성이 아이리쉬 전통 민요를 부르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오브라이언 타워(O'Brien Tower)
 오브라이언 타워(O'Brien T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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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별 기대 없이 들은 그녀의 신비롭고 가녀린 목소리에 난 점점 빠져들었다. 노래가 가슴을 울린다는 표현이 간만에 뼈저리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왼쪽에 소년을 안고 있던 여성은 노래가 끝나자마자 감격에 겨워 그녀를 얼싸안고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난 어느덧 한결 밝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다시 투어버스에 올랐다.

골웨이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아일랜드의 변화무쌍하고 광활한 풍경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꼭꼭 담아놓으려 애를 썼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곳이기에...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맡겨놓은 짐을 찾아 바로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다시 더블린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일은 이 병 주고 약 준 나라를 떠나 영국으로 날아갈 것이다.
아름다운 아이리쉬 민요
 아름다운 아이리쉬 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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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개인 블로그 http://arinalife.tistory.com/에도 추후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아일랜드, #골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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