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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에서 먹은 초밥
 홋카이도에서 먹은 초밥
ⓒ 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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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꽃은 과연 무엇일까. 나에게 있어서는 여행의 8할은 음식이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꽤나 있으리라본다. 오죽하면 옛 선조들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만들었으랴. 왜 '맛있는 음식'이란 여행에 있어서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냥 맛있으면 좋으니까"라는 대답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홋카이도에서 맛보았던 '음식'의 발자취를 밟아보고자 한다. 왜 우리가 그토록 타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찾아 떠나는지, 대체 그 놈의 요리가 뭐라고 이 마음을 흔들어놓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자.

4월의 홋카이도
 4월의 홋카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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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홋카이도 새싹
 4월의 홋카이도 새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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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다시 찾아간 홋카이도. 내 키만큼 쌓여있던 1월의 눈들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막 맺히기 시작한 봉오리가 꽃망울을 터트리려 열심히 힘을 주고 있었다. 다시 혼자 방문한 삿포로는 두 번째밖에 안되었는데도 왠지 고향에 온 듯 편안한 기분이었다. 저절로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 처음 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편안함은 오래 가지 못 했다. 해가 지고, 사람들이 점차 제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숙소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분명 1월에도 갔던 집임에도 불구하고 열차를 잘못 타 전혀 생뚱맞은 곳으로 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나는 허겁지겁 내려 역무원에게 일본어를 더듬거리며 길을 물었다. 나는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혼란에 빠져 재차 돌아가는 열차를 기다리는데 괜히 서러운 마음이 들끓었다. 언제나 당당하던 내가 처음으로 타국에 혼자 있는 것이 슬퍼졌다. 시간은 밤 11시가 다 되어가고, 사람들은 저마다 제 보금자리를 찾아 돌아가는데, 나는 쇳덩이 같은 캐리어를 들고 추운 밤바람을 맞고 있으려니 눈물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를 기다리느라 잠을 참고 있는 집주인 아주머니를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잘못 내려서 38분 삿포로 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무셔야하는데 정말 정말 죄송해요." 부랴부랴 라인(LINE) 메시지를 보내자 답장이 왔다. "大丈夫だよ~ 待ってるから気をつけてね(괜찮아~ 기다리고 있으니까 조심하고!)" 1월에 처음 보았을 때처럼 변함없이 친절한 아주머니는 나를 안심시켜주기 바빴다. 그리고 다행히 숙소로 갈 수 있는 열차가 왔고, 나는 몇 번이고 역무원에게 확인한 뒤 탑승하였다. 마중 나오신 아주머니를 보고 나서야 드디어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1월의 조식
 1월의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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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조식
 4월의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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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이불과 방 냄새. 아침부터 쿵쾅거리며 뛰어다니는 어린 삼남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내가 진짜 홋카이도에 왔음을 실감하였다. 눈을 부비고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가 "오하요고자이마스" 아침 인사를 건넸다. 식사 담당이신 할머니의 눈인사와 함께 생선 굽는 노릇한 냄새가 났다. 처음 왔을 때 이 요리들을 보고 꽤나 놀랜 기억이 있다. 고운 자태의 반찬들에 놀라고, 은근히 많은 그 양에 놀랐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할머니의 요리솜씨는 역시 최고였다.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면, 이제는 감사하게도 미리 내 양에 맞게 조절해주시기 때문에 억지로 우겨넣다 체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일까.

이 식사시간의 재미있는 점은 어린 삼남매를 포함한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와 함께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있노라면 내가 이 집의 가족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여행의 계획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사진을 함께 감상하기도 하고, 아이들이랑 열심히 놀아주다보면 시간이 훌쩍 가있었다. 기름칠을 해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새우와, 익숙한 맛이지만 아침 밥상에서 먹긴 처음이었던 사시미, 난생 처음 먹어보았다가 너무 맛있어서 놀랬던 가지조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는 통 먹지 않는데 여기서 맛보고는 정말 달아서 놀랬던 토마토, 넉넉한 흰 쌀밥과 뜨끈한 장국…. 지금까지도 그 따뜻한 냄새가 코를 스친다.

삿포로
 삿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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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든든히 먹은 뒤 삿포로 시내를 구경하다, 한 조그마한 카페를 발견하였다. 거칠게 덧입힌 아크릴 느낌이 나는 검정색 문을 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몇 없는 테이블 한 구석에 조심스레 앉았다. 창가 쪽에는 왠지 푸근한 아저씨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영자신문을 읽고 있었다. 또 반대편에는 우아한 베레모를 쓴 할머니와 할아버지 셋이서 수다를 떨고 계셨다.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듯 껄껄 웃었다. 나는 종업원에게 조심스레 아메리카노와 레어치즈 케이크를 주문했다. 그런데 갑자기 "원두 로스팅은 어떻게 해드릴까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미디엄으로요."

나는 사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1년 가까이 일했던 커피숍에서도 커피를 마신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아메리카노를 시켰느냐고? 그냥 그래야할 것만 같았다. 여행을 왔으면 모든 것을 즐겨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 나름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맛이 없으면 그건 그것대로 경험이니까…. 드디어 커피가 나왔다. 나는 많이 마셔본 척 향을 킁킁거리다 이내 한 입을 홀짝였다.

아! 일본에서 나를 놀래 킨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가지, 토마토, 생강…. 이것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다 내가 한국에서 전혀 먹지 않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 어쩔 수 없이 먹어본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처음 나의 혀를 감싸는 순간 나는 정말 '헉'소리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달고 맛있는 거지? 내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맛은 무엇이란 말인가? 전혀 물컹하지도, 맵지도 않고 목의 갈증을 탁 해소시켜주는 그야말로 '시원한 맛'이었다! 갑자기 이 말을 왜 하냐면, 지금은 이 '놀라움 리스트'에 아메리카노가 추가되는 역사적인 순간이기 때문이다.

쓰거나 텁텁하지 않고 그야말로 커피가 '시원'했다. 온몸의 관절이 쑤실 때, 뜨끈한 온천에 몸을 푹 담군 느낌. 절로 "아, 시원하다"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하는 마성의 늪. 나는 지금 그 늪에 빠진 것이다. 몇 만보를 걸어 잔뜩 피곤해진 몸뚱이가 절로 실타래마냥 풀어졌다. 함께 나온 레어 치즈케이크는 내가 먹어본 것 중에 가장 탱글하고 쫄깃했다. 카페 분위기가 워낙 차분하고 조용한 덕분에 나는 열심히 속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홋카이도
 홋카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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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은 비랑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던 걸까. 꼭 찍으리라 결심했던 사진을 위해 오타루로 향하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대부분의 가게가 일찍 닫는 관광지였기에 내가 갔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상점이 불이 꺼져있었다. 저녁 8시,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닌데 이곳은 거의 한국의 새벽같이 어둑했다. 당연히 사람도 없으니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얼른 사진만 찍고 삿포로로 돌아가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고픈 것이 아닌가. 12시에 점심을 먹고 아무것도 못 먹은 채 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저녁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무엇 때문인지 음식점조차도 다 문을 닫은 상태였다.

나는 여행 온 이래 두 번째로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사람은 거의 없고, 배는 고프고. 한국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거지꼴이었다. 편의점에서 산 자주색 우산을 쓰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들을 헤쳐 나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서 은은한 빛을 내고 있는 가게가 보였다! 열려있다! 밥을 먹을 수 있다! 성가신 빗방울들과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홋카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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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일본드라마 '심야식당'이 떠올랐다.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작품이었다. 모두들 잠이 드는 새벽, 그제야 가게 문을 여는 심야식당. 정해진 메뉴는 없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손님이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 줄 뿐. 고단한 하루를 보낸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 음식으로 위로를 받는 잔잔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포스터에 쓰인 문장이 하나 있다. 바로 이것이다.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포스터
 포스터
ⓒ 심야식당 영화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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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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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규모도 심야식당과 비슷했다. 비가 내려서인지, 카운터석 몇 개가 전부인 이 곳의 손님은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메뉴판을 보며 고민했다. 큼지막한 초밥세트를 먹어볼까, 아니면 고가의 모듬 튀김을 먹어볼까, 뭐가 좋을까. 기나긴 고민 끝에 내가 시킨 것은 작은 소면국수와 생맥주 한 잔이었다.

홋카이도
 홋카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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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지갑도 충분히 두둑했고, 매사에 돈을 아끼지 말자는 신념을 가지고 있던 나였다. 그런 내가 왜 하필 이렇게 소박한 음식을 시켰던 것일까. 사실 그 이유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단지 하나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나는 정말 심야식당에 온 듯 한 기분을 느꼈다는 것이다. 비싸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음식이지만 그 맥주 한 잔과 국수라면 내 하루를 온전히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국수 하나조차도 친절하게 만들어주신 아저씨의 손맛이 더해졌기 때문일까? 뜨끈한 국물이 빗속을 헤쳐 온 내 마음을 데워주었고, 시원한 생맥주가 하루 종일 걷느라 벌개진 내 발을 식혀주었다.

  맥주를 홀짝이며 열심히 재료를 손질하고 있는 주방 아저씨과 조수를 구경하다가, 시골에나 있을 것 같은 구형 TV를 함께 보기도 하였다. "잘 먹었습니다."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오는데, 밖에까지 뛰어나와 내가 놓고 간 100엔을 주신 주인아저씨는 조용하지만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는 우연찮게 만난 심야식당에서, 고단한 내 하루를 위로받았다.

- 2편에서 계속 됩니다

덧붙이는 글 | 위 글은 제라블의 글로그(http://blog.naver.com/asp835)에 동시투고 된 글입니다.



태그:#홋카이도, #삿포로, #오타루, #일본여행, #여행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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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정누리입니다. snflsnfl8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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