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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5.3민주항쟁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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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남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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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인천 5.3민주항쟁이 31주년을 맞았다. 그간 5.3기념사업회를 포함해 교수, 시민단체가 모여 인천민주화역사를 새롭게 복원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러나 인력과 재정 등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해 5.3항쟁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확산시키지 못했다.

송영길 인천시장 시절 세운 인천민주평화센터가 여러 단체와 함께 5.3항쟁의 역사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단체는 인천의 민주화 운동과 민족민주 열사 등 역사적 인물을 되새기는 백서 편찬 작업을 이어왔다.

그러나 새누리당 유정복 시장 취임이후 센터의 지원은 지지부진 했고 결국 폐쇄 단계에 이르렀다. 내년 지방선거 이후 센터의 부활과 5.3항쟁의 제대로 된 인천민주화 역사의 복원을 기대해 볼 뿐이다.

5.3민주항쟁,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서막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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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민주화운동 기념사업 토론회 자료에 따르면 1986년 5월 3일 오후 2시, 인천시민회관에서는 당시 야당인 '신한 민주당' 주최로 '개헌 추진 인천·경기 지부 결성 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오전부터 주안 사거리 일대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오후가 되자 인하대·서울대·고려대·연세대 등의 학생들도 운집했다. 또 인천 지역 사회 운동 연합을 비롯한 민주·통일 민중 운동 연합 등 사회 운동 단체 회원과 인노련·인기노련·서노련 소속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당시 나온 구호로는 '광자학살 원흉 전두환 군부독재 타도, 민주정부 수립', '속지말자 신민당', '몰아내자 양키놈', '인천을 해방구로, 해방 인천 만세', '천만 노동자 해방 투쟁 승리 만세', '철천지 원수 미제와 그 앞잡이 깡패적 반동 정권의 심장부에 해방의 칼을 꽂자' 등이었다.

시위가 격해지고 전투경찰과 충돌하면서 순식간에 시위장소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최루가스와 경찰의 폭력진압이 시작됐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끝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당시 군중 일부는 경찰차 1대를 탈취하기도 했다. 결국 당시 신한민주당 이민주 총재, 김영삼 고문 등이 대회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철수했다.(당시 신민당 이 총재 등은 시위대를 폄하하며 좌익학생들을 단호히 다스려야 한다는 망언도 일삼았다)

사실 5.3대회는 전두환 군부정권의 계획된 음모였다. 당시 정부는 민주화 열망에 밀린 혼돈의 정국을 야당인 신민당의 5.3인천대회로 반전시키고자 했다. 시위대를 좌경폭력세력으로 탄압하기 위한 계략을 꾸민 것이다.

결국 정부는 일부 시위대의 반미 구호를 빌미로 5.3사태를 좌경용공세력에 의한 체제 전복기도로 규정, 대대적인 구속열풍을 몰고 왔다.(319명 연행, 129명 구속영장 발부-국보법 위반 및 소요죄 등으로 57명이 구속집행) 시위 배후세력으로 수배를 받은 인사로는 '인사련'의 이호웅 의장과 이우재 국장, '인로협'의 양승조 대표와 홍성복, 민통련의 장기표·조춘구·박계동·정동년·심순봉·안희대 등이었다.  

5.3항쟁 이후 학생, 노동자, 민주화 인사 등의 구속, 수배, 고문이 이어졌다. 민주화운동의 뿌리를 뽑고자 전두환 군부는 부천 성고문사건(당시 서울대 여학생인 권인숙),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끔찍한 인권말살 정책을 자행했다. 결국 5.3민주항쟁은 87년 6월 항쟁의 열기로 그 불꽃이 활활 타올랐던 것이다.

인천 5.3민주항쟁과 한국의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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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한 인천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인천 5.3민주항쟁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항쟁 이후 수도권에서 처음 발생한 최대 규모의 정치적 시위였다. 또한 대학의 울타리를 넘은 이데올로기를 내재한 시위이기도 했다.

"광주항쟁 이후 한국에서 처음으로 미국의 신제국주의적인 역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다. 그리고 85년 겨울을 넘어서면서 이른바 '자민투'의 반미주의가 학생운동에 확산되었지만 일반시민이 참여한 정치적 시위에서 등장한 반미구호와 성조기 소각장면이 미국방송을 탄 것은 첫 사례로 꼽힐 것이다"

인천민주화운동사를 연구해 온 김영곤 박사에 따르면 인천 5.3민주항쟁은 우리 사회의 주의주장이 모였던 저수지 역할을 했다. 국민주권의 권리를 엄혹한 군부독재에 맞서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일으킨 초유의 사건이었다.

항쟁 이후 민주진보운동, 노동조합운동, 하방연대, 시민단체, 진보정당 결성 등의 성과로 이어졌다. 더불어 한반도 자주, 평화, 통일의 이념을 세우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인천 5.3민주항쟁의 요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당시의 주의주장의 화두는 30년이 지난 현재에서도, 그리고 향후 30년 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6월 항쟁이 그러했듯 촛불 혁명이 계승했고 다시 30년 후에 민중혁명이 계승할 것이다.

"5.3항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는 미래 사회에서도 한국 사회를 민주적 복지사회로 이끌고 지구사회를 지속가능한 인권공동체 사회로 이끄는 데 중요한 사상의 수원지 역할을 할 것이다"(김영곤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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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인천 5.3민주항쟁, #6월민중항쟁, #광주민주화항쟁, #신한민주당, #전두환 군사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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