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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수백 년 대대로 농사지어온 땅을 빼앗기게 된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그어졌던 삼팔선을 넘어 1950년 북한군이 남하했다. 외딴 분지였던 이곳에 그 소식은 쉽게 전파되지 않았다.

낙동강까지 밀린 한국군은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밀고 올라왔다. 북으로 북으로 전진하던 미군과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인해전술' 중공군이었다. 일사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흥남부두에선 피난민 수만 명이 철수하는 미군 배에 올랐다.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북과 남은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그가 씨 뿌리던 고향이 거기 있었다.

1951년, 미군은 동두천의 작은 마을 걸산동에 주둔했다. 마을을 빼앗긴 이들은 산으로 쫓겨갔다. 미군기지는 통행을 불허했다. 산속의 걸산리는 60여 년을 갇혔다.
▲ 육지속의 섬 걸산동 1951년, 미군은 동두천의 작은 마을 걸산동에 주둔했다. 마을을 빼앗긴 이들은 산으로 쫓겨갔다. 미군기지는 통행을 불허했다. 산속의 걸산리는 60여 년을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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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케이시'에 빼앗긴 마을 걸산리

피란민으로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의 땅에는 미군기가 올라있었다. 철조망이 세워지고, 군인들이 총을 들고 접근을 막았다. 그가 살던 집은 불타 없어졌다. 전쟁 중이었고, 더구나 우리나라 대통령이 요청한 외국군대의 주둔이었다. 맨손인 농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부당했다. 군 주둔지를 새로 만든다면, 당연히 빈 땅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을 바깥에, 그러니까 광암리 같은 곳은 비어 있었다. '턱거리'라 불리던 공간이었다. 마을의 원주민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협의해야 했다. 통보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메리카에서 인디언을 쫓아냈던 것처럼, 미군들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그 땅을 보면, 울화가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마을에 살던 많은 이들이 외지로 떠나갔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다행이라고, 스스로 삭였다. 마을을 바라보는 소요산 남동쪽 산골에 화전을 갖고 있는 몇 사람이 거기로 올랐다. 고향 땅을 죽어도 떠날 수 없다는 사람들이었다.

마을 아래서 미군들은 더욱더 넓은 땅를 원했다. 럭비장을 지을 부지도 필요했다. 미군기지 어디에나 있다는 그것이었다. 미군들은 그렇게 거기 평지 걸산리를 다 차지하고는 벽을 둘렀다. 통행은 금지되었다. 철조망을 타고 넘어들어가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에게, 미군들은 총을 쏘고, 폭탄을 던졌다. 보상은 오랜 시간 후에, 공시지가보다 싼 가격으로, 대개 20여 년 거치로 이루어졌다.

산에 사는 걸산동 사람들은 '육지속의 섬'에 갇혔다. 단절된 그들이 택할 길은 두 가지였다. 고립 혹은 북쪽 산을 넘어 풀 길에 사람 발자국 길을 내는 것이었다. 산에서 땔감을 키보다 높게 짊어지고 나가면, 해가 지기 전까지 다시 그 지게에 무엇이고 양식될 것을 동여매고 와야 했다. 울화에 막걸리는 한잔했지, 겨울이면 그 추운 산의 북사면을 걷다가, 그들은 잠시 쉬었다. 따뜻해진 발(실은 동상에 걸려) 때문에 신발을 벗고 한숨 자고 나면, 그들의 한 많은 이 세상도 안녕이었다.

미군기지 통행증이 발급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였다. 첫 패스 발행 때, 통행증은 마을 하나당 열 개였다. 230여 명의 주민들은 번갈아 그 통행증을 달고는 이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 마을 경계 안에 들어섰다. 외부에서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서너 명이 마중과 배웅을 해야 했다. 사람 하나당 2~3명밖에는 동행할 수 없어서였다.

지금도 통행증은 3년마다 재발급받아야 한다. 자동차보험증, 등록증, 주민등록증 면허증을 다 내고 신원조회를 해야 통행증을 내준다. 외부인은 한 달 전에 미리 통행증을 신청을 해야 하고, 3일 동안만 유효하다. 동북아 최대의 미군기지라던 동두천의 캠프 호비, 캠프 케이시의 땅 걸산동 이야기다.

인적 없는 길, 문 닫힌 건물들 광암동

지난 8일, 걸산동에 다녀왔다. 2년여 전인 2015년 8월 8일 '박래군 석방요구 문화제' 때, 지금은 더불어꿈 협동조합 김대용 이사장에게서, 글 하나를 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군기지에 갇혀 60여 년을 고립된 마을에 대해 조사하고,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거였다. 당시 집회에서 처음 만난 사이에, 함께 해보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참여는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년 후인 2017년 촛불시위가 탄핵 인용을 이룬 3월의 봄에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동두천 그곳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동두천 시내 그네들의 터 '더불어꿈 카페'에서 <육지 속의 섬-걸산동 마을기록> 자료집을 받고, 동두천의 속살로 이동했다. 안내를 맡아준 이는 책의 공동 편집인 최희신씨.

'<육지속의 섬, 걸산동 마을기록>은 미군기지에 갇힌 우리땅'에 대한 기록이다. 더불어꿈 협동조합의 김대용씨와 최희신씨가 취재하고 인터뷰하고 편집했다.
▲ 산속의 걸산동 가는 길. 그 마을에 대한 기록 '<육지속의 섬, 걸산동 마을기록>은 미군기지에 갇힌 우리땅'에 대한 기록이다. 더불어꿈 협동조합의 김대용씨와 최희신씨가 취재하고 인터뷰하고 편집했다.
ⓒ 동두천 기지촌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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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른 곳은 동광극장. 시내 동광교 부근에 위치한 이 극장은 과거의 영화(榮華)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영화(映畵)관. 1970~80년대엔 서울 시내 곳곳에도 우뚝했을 지역의 대표 문화공간이었다. 당시에는 '환쟁이'들이 그렸을 극장 간판도 인쇄로 바뀌었고, 상영도 이제는 디지털 영사기로밖에는 할 수 없지만, 이곳 극장 안에는 여전히 아날로그 상영기가 놓여있다. 고장 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필름을 걸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기계. 하지만 요즘 누가 필름으로 영화를 찍겠는가. 영화 <프리즌>이 상영되고 있는 영화관 안쪽으로 들어가자, 시간이 30~40년쯤 과거로 흐른 것 같다. 

광암동-걸산리를 오르는 베이스 캠프

광암동은 소요산을 오르는 베이스 캠프 같은 곳이랄까? 화석처럼 빛바랜 채 남아있는 옛 건물들마다 희미하게 상호가 남아있다. 오래 전 문 닫은 환전소(Money Exchange)는 지붕이 벗겨져 있다. 수많은 '아가씨'들이 들락거렸을 미용실도, 그네들과 함께했을 세탁소 문도 닫히고 비어있다. 이들 아가씨들과 건달들이 묵었을 수많은 임대건물들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한때는 번쩍번쩍했을 네온들은 깨진 채 간판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다.

그런데 이곳 광암동은 왜 이렇게 길이 많나? 큰길 말고도, 골목마다 차도 겸 인도다. "가난한 동네라, 이곳을 방문하는 시장님 혹은 국회의원님들이 매번 '선물'로 마련해 주신 것"이란다. 그렇게 넓게 트인 길옆으로 같은 모양으로 지어진 수없이 많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1970년대 중반, 당시 카터 대통령의 도로 주행을 위한 '장식용'으로 지어졌단다. 마치 서부영화의 세트장처럼, 이 건물들은 앞쪽은 번드르르 높이 섰지만, 안쪽은 부실한 곳이 많다.

미군 캠프 후문 앞, 왼편 언덕 위로 시민 아파트 같은 낡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인적이 아예 없는데, 애초 사람이 입주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동두천 경기의 끝물을 타고 지어진 것. 물은 여전히 지금도 미군기지의 캠프를 내려다보고 있다.

동두천 광암동. 캠프 케이시, 캠프 호비 등 미군기지가 있어 이 마을은 한때 번성했다. 전시작전권 환수 논란, 평택 미군기지로의 이전 등 변화된 환경속에서 광암동은 빈 거리로 변했다.
▲ 문 닫힌 환전소. 동두천 광암동. 캠프 케이시, 캠프 호비 등 미군기지가 있어 이 마을은 한때 번성했다. 전시작전권 환수 논란, 평택 미군기지로의 이전 등 변화된 환경속에서 광암동은 빈 거리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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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들. 전시작전권 환수의 여파로, 미군의 평택기지 이전 건으로, 미군 주둔지의 전환 배치 등으로 광암리의 옛 영화는 사라졌다.
▲ 동두천 광암동의 빈 아파트 사람이 살지 않는 건물들. 전시작전권 환수의 여파로, 미군의 평택기지 이전 건으로, 미군 주둔지의 전환 배치 등으로 광암리의 옛 영화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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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산리 가는 길은 차마고도 같았다. 평지로부터 산을 오르는 산허리 좁은 길이 굽이굽이 이어졌다. 물론 길은 차가 다닐 만큼 넓다. 중간중간 콘크리트 포장도 되어있다. 하지만 앞에서 차가 오면, 바짝 긴장해야 한다. 길 왼편으로 험준한 산길 낭떠러지 길이다.

길은 고립된 마을 걸산동 주민을 위해 난 길이 아니다. 동두천시가 산악자전거와 트레일 대회를 열면서 낸 길이다. 아래 평지로 캠프 케이시와 멀리 캠프 호비가 보인다. 햇살이 고루 비추는 땅에 들어선 보병부대, 기갑부대의 차량들 사이로 너른 공터, 십자가를 가진 교회도 보인다. 햇살이 고루 비추는 평지에 감도는 것은, 오로지 전쟁을 위해 존재하는 압도적 물질력이 뿜어내는 살벌함이다.

걸산리, 60년 고립된 땅에서 여전히

걸산리 사는 어르신을 찾았다. 고향서 쫓겨난 이야기, 고립되었던 60년 세월 이야기, 미군과의 동거로 인해 힘들고 신산했던 삶을 들을까 했다. 하지만 할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신다. 동두천사를 펼치고 그 땅에 살았던 그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 이야기. 할아버지 생신날이면 그의 친구들이 여러 동리서 찾아왔다.

할아버지가 찾는 것, 그 친구들이 내놓은 선물은, 글씨였다. 할아버지도 여러 곳에 글을 썼고, 글씨를 올렸다. 존경받는 삶이었다. 갇힌 섬처럼 되었던 이곳에 사재로 학교를 열어 가르쳤던 장태영 선생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비는 두 번 세워졌다. 그만큼 은혜를 각별하게 대접하는 것이다. 지금은 없어지고만 그 학교, 덕계공민학교 터에서 어르신의 기억은 따뜻하고 존엄했던 옛 삶을 반추한다.  

"동두천에는 미군기지만 있는 게 아니오. 여기 걸산은 걸출한 인물을 내던 땅이라오. 여전히 여기 이 땅 안에서 정직하고 순박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오. 기지촌 주변 성매매 여성들, 그들을 따라온 어깨들만 있는 게 아니야. 미선이 효순이를 깔려 죽게 만든 캠프 케이시의 병사들만 있는 게 아니지. 여기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오. 땅을 빼앗겼지만, 그걸 국민의 생존 값이라고 여기고 있는 생각들이 살고 있다오. "

그의 목소리는 이런 목소리를 내는 듯했다.

걸산리 고개넘이까지 올랐다. 봄이 온통인 마을엔 매화, 산수유, 벚꽃이 피어있었다. 건강한 얼굴의 어린 오누이가 햇볕을 받으며 자전거를 탔다. 할머니들은 아주 천천히 고랑에 구멍을 내고, 거기 한 포기 상추를 겨눠 넣었다. 희신씨가 그 옆에서 할머니와 눈을 맞추고 한참을 앉아 있다. 걸산리의 산은 무릉도원 같았다. 고립되어 찾아갈 수 없는 땅이어서도 그랬겠지만, 이렇게나 따뜻한 햇살이며, 그 안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걸어서 내려올 때, 저기 아래 아스팔트 길에서 너울너울 나무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랫마을에서 대추나무를 이고 오는 지게였다. 마을 길이 막혀,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는 걸산리의 농부가 그 지게를 이고 있었다. 평지 쪽에서 산으로 오르는 희망이었다.

여긴 광주 정씨, 남양 홍씨, 경주 김씨, 김녕 김씨가 묻힌 땅이다. 학교에 가고, 논밭에서 밭 갈고 열매 거두던 삶의 터전이다. 성공회 나눔의 집과 함께 하는 협동조합도 만들고, 화력발전소에 맞서 마을을 지키려 노력하는 미래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들이 여기의 꽃이며 잎새며 동시에 열매였을 것이다.      

나중에 동두천국민학교 걸산분교가 된 이 학교는 마을 문중에서 희사한 700평 땅에 세워졌고, 월남한 장태영 선생이 교사가 되었다. 여기에서 무럭무럭 아이들이 자라났다. 걸산동 산꼭대기에 위치.
▲ 덕계공민학교 설립자 장태영의 공덕비. 나중에 동두천국민학교 걸산분교가 된 이 학교는 마을 문중에서 희사한 700평 땅에 세워졌고, 월남한 장태영 선생이 교사가 되었다. 여기에서 무럭무럭 아이들이 자라났다. 걸산동 산꼭대기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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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이야기를 들을 때, 나는 더 이상 기지촌, 성매매 여성을 상기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수도권 규제, 군사시설 보호구역 등 촘촘한 규제를 상기할 것이다. 주둔군의 횡포를 바로 잡는 대신, 그 위기를 돈 벌 기회로 전환한 국가 정책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1945년 분단, 1950년 전쟁이 잘못 끼운 첫 단추에 대해서도 번민할 것이다.

그들의 희생에 대한 정당한 보상에 대하여, 쇠퇴해 가는 이 땅의 재생에 대하여서도 간절히 원할 것이다. 무엇보다 의연하게 삶을 가꾸어온 걸산리 주민들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기억할 것이다.


태그:#동두천, #걸산동, #기지촌, #캠프케이시, #광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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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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