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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0일 마침내 박근혜가 탄핵됐다. 1,600만 명이 넘는 '촛불 시민'이 일구어낸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다. 물론 마냥 흔쾌하지만은 않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그 중대하고도 지엄한 결정을 왜 선출되지도 않은 극소수 엘리트 법관의 손에 맡겨야 하는가. 이것이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하는가? 세월호 관련 대목이 탄핵 사유로 인정되지 않은 것도 못내 아쉽고 수긍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쨌거나 우린 해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 쾌거를 우리 손으로 이뤄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국회에서의 탄핵소추안 의결이나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을 이끌어낸 힘 또한 궁극적으로는 시민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헌재의 결정은 시민이 이미 내린 결정을 사후적으로 '대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생명의 논리와 물질의 논리

탄핵이라는 일차 고비를 넘어서자 이제는 바야흐로 숨 가쁜 대선 정국이다.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와 미래 전망 등을 둘러싸고 갖가지 주장이 난무한다. 다양한 정책과 공약이 쏟아진다. 고갱이는 참담하게 망가진 우리 사회의 기본 틀과 품격을 뿌리에서부터 새롭게 세우는 일이다. 전면적인 쇄신과 근본적인 거듭남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 대목에서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 '생태주의'라는 화두가 그것이다. 나는 '생태적 사유'가 앞으로 만들어나갈 새로운 나라를 떠받치는 핵심 기둥 가운데 하나가 되기를 소망한다. 알다시피 생태주의는 단순히 친환경적인 정책을 열심히 실천하자거나 단지 자연 생태계를 잘 보전하자는 정도에서 끝나는 얘기가 아니다. 간단히 말해 생태주의는 생태적 원리와 가치에 맞게 이 세상과 사람들 삶을 뿌리째 혁신하고 총체적으로 재구성하자는 주장이다. 이런 생태주의 논리의 핵심은 두 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와 '사람은 자연의 일부다'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길어 올릴 수 있다. 이른바 '유기체적 세계관'이 그것이다. 유기체란 무엇인가? 각 부분과 전체가 긴밀하게 하나로 연결되고 얽혀 있는 조직체다. 우리 몸을 떠올려보라. 몸을 이루는 세포 유전자 안에는 몸 전체가 모두 담겨 있다. 몸의 어느 한 부분이 아프거나 기뻐하면 몸 전체가 통증과 환희를 느낀다. 세계를 이처럼 통합적이고 전일적인 것, 즉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게 유기체적 세계관이다. 여기서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정반대인 것이 소위 '기계론적 세계관'이다. 자동차를 떠올려보라. 자동차가 수많은 부품의 조합이듯이 여기서는 몸이나 자연도 원자나 분자들의 단순한 집합체로 여긴다. 부분은 전체와 분리된 독립체다. 부분 안에 전체가 깃들 수 없다. 부품이 고장 나면 교체하면 그만이다. 그럴 때 전체가 고통이나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따로따로 분리돼 있다. 기계에 영혼이 없듯이 여기선 계산할 수 없고 측정할 수 없는 것, 이를테면 정신이나 마음, 자연과 삶의 질적 가치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대신에 힘, 양, 효율, 속도 따위가 중요하다. 요컨대, 유기체적 세계관이 따스한 생명의 논리라면 기계론적 세계관은 차가운 물질의 논리인 셈이다.
힘,양, 효율, 속도가 중요한가요? 삶의 질적 가치가 중요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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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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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필요한 진보는?

여태껏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것은 기계론적 세계관이었다. 박정희 이래 우리 역사를 압도적으로 규정해온 산업화, 근대화, 경제성장 따위의 바탕에 깔린 것이 이것이었다. 탐욕과 이기심과 경쟁의식을 끝없이 부추기고 확대재생산하는 물신주의 또한 여기서 말미암았다. 그 속에서 인간은 성장의 도구이자 노동력을 제공하는 생산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은 개발의 대상이거나 자원 저장 창고쯤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리하여 생명은 물질의 부속품이나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알맹이와 껍데기가 뒤바뀐 '거대한 사기극'이 펼쳐지는 것이다.

기계론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계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민주주의의 길을 가로막는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도 사실은 이것인지 모른다. 생명의 존엄성과 삶의 긍지가 원천적으로 파괴되는 곳에서 언감생심 무슨 민주주의를 기대한단 말인가. 노예나 부속품이 아닌 자기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자들의 유기적 연대야말로 민주주의를 생동하게 만드는 힘인데 말이다.

지금은 '촛불'에서 탄핵으로, 다시 대선으로 이어지는 중대한 전환기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둘러싼 고민과 토론이 좀 더 활발하고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의 미망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과 사회를 두루 살리는 유기체적 세계관에 대한 공감이 보다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경제성장에 대한 성찰이 아닌가 싶다. 오랜 세월 우리 사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 아마 지금도 미치고 있는 것이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렇게 본다면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서 가장 중시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성장주의에 속속들이 길든 정치·경제·사회 시스템 전반을 뜯어고치는 게 아닐까?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지구는 하나뿐이고 자원은 무한하지 않다. 지구가 허용하는 생태적 용량을 넘어서는 성장은 지구를 망가뜨리고 결국은 그 지구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모든 생명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미 우리는 성장이 없거나 크게 무뎌진 경제를 오랫동안 경험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경제 전반의 필연적이고도 장기적인 추세다. 자본주의의 위기 또한 갈수록 깊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성장 없는 삶에 적응해야 한다. 끝없는 성장은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우리 사회의 최대 현안인 경제 민주화, 양극화 해소, 복지 강화 등도 이런 전제 위에서 또는 이런 맥락에서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일구어야 할 궁극의 진보는 물질의 진보가 아니다. 인간의 진보다. 물질의 진보는 수단이자 단계일 뿐이다. 민주주의와 문화와 사회의 진보. 삶의 질과 생명평화의 진보. 이것은 생태주의가 닿고자 하는 드높은 경지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장성익님은 환경 저술가입니다. 녹색 잡지 <환경과생명>, <녹색평론> 등의 편집주간을 지냈습니다. 지금은 독립적인 전업 저술가로 일하며 환경 분야를 비롯해 다양한 주제로 책 집필, 출판 기획, 강연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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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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