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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군 '오폭' 모술 사망자 511명... 어린이 187명."

지난 3월 17일 미국 주도 국제동맹군이 모술 서부 알자디다 지역을 공습하여 수백 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난 사건을 전한 어느 신문의 헤드라인이다. 국내 언론은 매체 불문하고 '오폭'이라는 단어를 똑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마침 국제관계전문가인 월러 뉴웰(Waller R. Newwell) 미국 칼턴대 정치학과 교수의 <폭군 이야기>를 읽으려고 할 때였다.

참 이상했다. 무고한 민간인을 죽인 사건을 한낱 '실수'로 치부하면서 양심은 찔리지 않을까? 만일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가 그랬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테러'라고 입에 거품을 물지 않았을까? 전쟁범죄를 선의를 가진 주체의 우발적 실수로 포장해 버리는 기만은 힘의 불균형이 가져온 뒤틀린 정의의 한 단면이다.

한국전쟁 당시 충북 단양, 충남 서천, 경북 김천, 경남 예천, 전남 여수 등 전국 각지에서 미군비행기 폭격과 기총소사로 무고한 양민이 희생당했다. 전쟁범죄를 미군은 '오폭'이라 했다. 한국 정부와 언론 역시 '오폭'이라 받아썼다.

미국 원조로 먹고살 만하게 된 나라 백성들은 미국은 언제나 선의를 가진 주체라는 의식을 강요받아 왔다. 그런 마당에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에 의식이 있을까 싶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군사작전 폭격에 '오폭'이란 변명이 가당키나 한지 물어야 당연한 거 아닌가?

<폭군 이야기>  월러 뉴웰 지음, 우진하 옮김. 예문아카이브 출판
▲ 책 표지 <폭군 이야기> 월러 뉴웰 지음, 우진하 옮김. 예문아카이브 출판
ⓒ 예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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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행정부 정책 자문으로 활동했던 월러 뉴웰의 <폭군 이야기>를 손에 들었을 때, '어차피 미국은 선이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할 거라고 봤다.

미국이 잘못하면 실수로 치부해 버리는 '미국 중심의 뒤틀린 정의관'을 그대로 드러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계절이 계절인지라 대통령 리더십 연구가이기도 한 저자의 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고 읽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저자는 러시아의 크리미아 반도 침략을 진두지휘한 블라드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와 맺었던 영토 협약을 깬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미국인에게 러시아는 가만히 있어도 속을 긁어대는 뭔가 있는 모양이다.

그는 미 국무장관 존 캐리의 말을 빌려 "19세기 인물이 갑자기 21세기에 나타났다"고 한 뒤, 푸틴 같은 인물이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이유, 폭정과 전제정치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밝히겠다고 한다.

<폭군 이야기>는 '시대를 움직인 뒤틀린 정의'를 부제로 달고 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회의 폭정부터 중세 봉건 사회를 끝장내고 근대 국가를 이룩한 전제군주들의 모습을 추적한다. 특히, 1793년 프랑스 자코뱅파의 공포정치로부터 시작되는 전체주의의 폭정 이후 소비에트 공산당 볼셰비키, 독일 나치, 중국 마오쩌둥,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와 현대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까지 다루는 과정은 그 심리적·철학적 기원까지 밝히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이 책은 "역사에서 진보란 실제로 이뤄지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폭정 자체가 세상에 퍼지는데 일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다.

왜냐하면 그런 믿음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구시대의 유물인 폭군과 폭정 따위는 사라졌다고 안심하게 됐고, 폭정처럼 비치는 정치 행위마저도 진보의 과정 속 일부로 착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악의 전체주의 지배 체제 모두가 스스로 진보 역사의 일부라고 목소리를 높이게 됐다면 '역사는 진보한다'는 전제는 잘못된 믿음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다가올 더 나은 세상이 학살과 전쟁 등을 통해 이뤄지리라는 잘못된 믿음까지 심어줬다." -7p.

저자는 전제정치의 근원을 로마에서 찾는다. 그가 묘사하는 로마 정치는 이제껏 알고 있던 위대한(?) 황제들의 속살을 까발린다. 마치 살아있는 신처럼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주인으로서 노예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절대 권력자인 황제는 시민들이 통치하는 공화국의 '제1시민'으로 불렸다. 이 얼마나 교활한가?

"아우구스투스가 창조하고 그 후계자인 티베리우스가 공고히 다진 로마의 황제라는 자리는 선동과 조작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독재자'라는 실체는 온화하고 그럴듯한 모습으로 치장됐다." -14p.

바로 이 점 때문에 질문이 또 나온다. "폭정은 건설적이거나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질문은 알렉산드로스, 아우구스투스, 콘스탄티누스 1세, 샤를마뉴로 잘 알려진 카롤루스 대제 등과 맞닿아 있다. 이들은 모두 국력을 키우고 나라에 번영을 가져왔다. 오랫동안 쉬지 않고 지속돼 온 내전과 갈등을 봉합한 뒤 평화와 질서를 회복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여기에 역설이 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들이 가진 강력한 절대 권력이었고, 그것에 더해 개인적인 야심, 권력 찬탈, 전쟁, 살인 행위가 곁들여졌다." -15p.

왕이 폭정을 하더라도 '공공의 이익'을 펼치려는 자세를 보인다면 로마 시민은 왕이 개개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다는 점을 믿었다. 그런 국민의 호의를 저버리고 개인의 야망을 채우는 것은 폭군의 필수 덕목이었다. 그렇게 전제정치는 천년을 이어갔다. 로마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영국도 전제정치가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요인이었다. 나폴레옹,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 등도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 모두 절대적인 독재 권력과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기형적이고 끝없는 열정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국가가 필요로 한 경제적·군사적·기술적 발전을 불러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없는 생명을 앗아간 전쟁과 대량학살이라는 대가가 지불됐다." -17p. 

자유를 억압하는 동시에 발전을 낳은 독재자들의 역설을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군사독재의 신화, 박정희다. 혹자는 보릿고개와 굶주림에서 국민을 해방시킨 것만으로도 박정희는 구휼제민의 '밥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박정희는 5천년 역사상 최초로 전 국민을 배곯지 않게 해 준 현현신이요, 대를 이어 충성할 왕조요, 민주주의다. 그러나 박정희를 '개발독재'라고 미화하는 그 이면에는 전체주의 동원체제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쏟아 부은 정치·경제·사회적 비용과 정경유착, 부정부패가 있었다. 숱한 인권침해와 민주주의를 짓밟고 역사를 왕조 시대나 다름없이 되돌려놓은 퇴행이 있었다.

서구 사회에서 폭정은 주로 3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전형적 폭군은 국가와 사회를 개인 소유물처럼 다루며 자신의 안녕과 이익, 주변 혈족과 측근들을 위해 국가를 이용한다. ▲개혁형 폭군은 지고한 명예와 부를 소유하고 싶은 열망으로 움직이는 동시에 법과 민주주의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 권력을 추구한다. ▲영원불멸형 폭군은 근대에 들어 처음 등장한 이들로 영속적인 왕국을 꿈꾸는 로베스피에르, 스탈린, 히틀러, 마오쩌둥, 폴 포트와 같은 전체주의 폭군들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이 책의 저자 월러 뉴웰의 기준에 의하면 박정희는 개혁형 폭군이면서 종교성을 띠는 영원불멸형 성향도 없지 않다. 폭군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때로는 비범함 통솔력이 넘치고 매우 유쾌하며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성향을 갖고 있었던" 폭군을 기대한다.

이 부분에서 불편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떠오른다. '현대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는 좋은 폭정이 존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좋은 폭정이란 없다'라고 말해야 하지만, 개발도상국 등에서는 그런 논의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그런 질문에 유혹당하는 세력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슬픈 현실이다.

저자는 근대 이후 등장한 영원불멸형 폭군들의 사상적 근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서구 주류 철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것을 주문한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를, 니체는 초인을 언급했으며, 1827년 하이데거의 '영웅을 선택하는 국민'에 대한 주장은 그대로 히틀러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363p. 

저자에 의하면,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는 진정한 인간의 온전함은 영원불멸의 세상을 만들기 위한 폭력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철학이 영원불멸형 폭군의 사상적 어머니라는 것이다. 확신범이요, 광적인 독재자의 출현이 무서운 이유는 청년 세대들을 세뇌시키기 때문이다. 세뇌는 무늬만 민주주의인 체제에서 살면서도 그것이 폭정인 줄 모르게 만든다. 자유민주주의 가치가 무엇인지 인지할 능력마저 앗아가 버린다.

"스탈린과 히틀러 그리고 마오쩌둥 등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젊은 혁명가들로 하여금 살인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이슬람 극단주의의 진짜 위험은 이전에 있었던 영원불멸형 폭정들과 마찬가지로 청년들에게 폭력과 살인을 이상향에 대한 꿈과 연결시키도록 세뇌한다는데 있다." -511p.

책을 마무리하며 저자는 '민주주의는 승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그의 성향은 그대로 드러난다. 그렇다고 그가 미국 중심으로 편향돼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정치적인 대규모 폭력 사태의 기원과 유혹을 탐색하는 데 필요한 자기검열, 서구 철학에 대한 비판적 접근도 필요함을 주장하는 정도다. 저자는 그 예로 호메이니를 '신비한 성자'라 불렀던 미셸 푸코를 든다.

"은연중에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이해와 옹호의 씨앗이 넓게 퍼지고 있다.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곳곳에서 피어오른다. 부수고 죽이는 영화는 끊임없이 생산된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대변하는 듯 보이는 서구 지식인들의 정체를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513p.

편협한 시각으로 민주주의를 해치는 세력은 언제나 있어 왔다. 저자는 역사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민주주의가 완벽한 체제는 아니지만, 반드시 폭정을 막아낸다고 단언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주주의가 더 나은 체제이기 때문이다. 폭정의 시도가 계속해서 무너지는 일이야말로 냉정한 현실주의와 민주주의의 희망임을 촛불혁명을 보여주었다. 그런 면에서 "모든 권력자는 잠재적인 폭군이다"는 저자의 주장을 민주시민은 되새겨야 한다.

대선을 앞두고 너나없이 나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한다. 모든 문제는 내가 아닌 밖에 있고, 해결사는 오로지 본인뿐이다. 그들은 만족함을 모르는 늑대들이다. '착한 늑대'는 없다. 위대한 시민은 늑대가 출몰할 수 있다는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폭군 이야기 - 시대를 움직인 뒤틀린 정의

월러 뉴웰 지음, 우진하 옮김, 예문아카이브(2017)


태그:#폭군, #민주주의, #촛불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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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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