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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추진위원회'는 일제강점기에 인천에서 벌어진 강제동원과 관련한 역사 강연회를 두 차례 열었다. 두 번째 강연은 지난 7일 오후 7시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교육실에서 열렸다. 정혜경 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위원회' 조사과장이자 서울대 교수가 '인천지역 강제동원 현황과 일제강점기 노동자의 삶'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강제동원의 전국ㆍ인천지역 상황과 국내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펴봤다. 아래는 강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기자주

일본, 강제동원 공식 인정

일본에 끌려가 학대와 고된 노역에 신음중인 조선인들의 모습
 일본에 끌려가 학대와 고된 노역에 신음중인 조선인들의 모습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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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는 사람이 나가는 것도 '공출'이라고 했다. 사람과 물자를 같이 취급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제징용'이라는 말을 썼다. 1960년대부터 사용했고, 1990년대부터는 '전시동원'이라는 말을 썼다. 강제징용이라는 말은 뜬금없이 사용됐다. 징용(徵用)이라는 말 자체가 강제적이라는 말인데 또 강제를 붙여 강조한 거다. 그냥 징용이라는 표현으로도 충분하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일제강점기에 동원한 것에 강제성이 없다'고 하는데, '있다 없다 논쟁'의 의미가 없어지는 일이 생겼다. 2015년에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하시마 섬(군함도) 등 14곳을 등재하려했다. 반 이상이 강제동원의 현장이었다. 유네스코에서는 강제동원을 인정한 후 등재하라고 했고, 일본은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된 사람이 있다'는 걸 공식 인정했다.

일본 변호사협회도 2002년에 '강제'를 완력으로 끌고 간 것뿐만 아니라 꼬임과 협박에 의해 자기 발로 간 것까지로 정리했다.

일본은 우리나라 인력ㆍ물자ㆍ자금을 강제로 동원했다. 인력 동원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월급을 많이 준다거나 편하다는 등의 당근과 함께 협박 등 채찍의 두 가지 방법으로 동원했다.

여성과 아이까지 강제동원

 ‘인천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추진위원회’가 지난 7일 개최한 역사 강연회에서 정혜경 교수가 ‘일제강점기 인천지역 강제동원 현황과 노동자의 삶’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인천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추진위원회’가 지난 7일 개최한 역사 강연회에서 정혜경 교수가 ‘일제강점기 인천지역 강제동원 현황과 노동자의 삶’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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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기업을 내세워 노동자를 동원하기도 했다. 일본 기업으로부터 필요 인원을 신청 받은 후 조선총독부에 연락해 모으게 했다. 필요 인원이 파악되면 지역별로 배분해 조직했다. 징용된 노동자들은 기차로 부산으로 간 뒤 배로 일본 시모노세키로 갔다. 그곳에서 동남아시아 등 전 세계로 흩어졌다. 끌려가는 데 사용된 비용, 예를 들면 차비와 도시락, 옷 등 모든 비용을 끌려간 노동자가 부담했다. 인솔자가 사용한 비용과 탄광 기숙사 비용, 곡괭이 대여 비용까지 지불했다. 당시 월급 봉투를 보면 30여 항목이 공제됐다. 일종의 인신매매다. 징용자의 빚이 1년 치 임금과 맞먹었다.

노동자들이 징용됐던 탄광을 답사한 적이 있다. 탄광촌 주변은 산이라 도망갈 곳이 없고, 길을 못 찾겠더라. 찻길이 있지만 차가 한 대도 안 보였다. 지금도 그런데 그때는 도망가도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서 650만여 명이 동원됐다. 노인들은 광산에서 물건을 운반하는 일을 했고, 젊은이들은 사할린이나 일본으로 많이 갔다. 아이들은 대부분 맨손으로 일했고 노역에 시달렸다. 10대 사망률이 높았다. 1945년 6월부터 8월까지 사망률이 높은데, 집단적으로 사망했다. 탄광이나 공사장에서 많이 죽었다.

한반도 동원의 특징은 여성과 아이가 많다는 거다. 여성도 탄광이나 공사장에서 일했다. 안전시설 없이 어려운 일도 다 했다. 노동력 착취가 심했다. 1937년 국제노동기구 기준으로 15세 미만 아동 노동을 금지했지만, 당시 징용된 우리나라 아이들의 평균 연령이 13.3세였다. 예전에는 여성은 이른바 막장(갱도)에 못 들어갔는데, 1941년에 '광산법'이 바뀌어 여성도 광산에 들어가 사망한 사례가 많다.

공장에 징용된 사람은 죽거나 미치지 않는 이상 못 나왔다. 사례를 조사했더니, 팔이 기계에 끼어 잘리고 방적공작에서 바늘로 눈이 찔렸는데도 일했다. 성폭행으로 인한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하니까 그때서야 회사에서 집에 연락해 데리고 가라고 했다.

어린 여공들은 담을 넘어 탈출을 시도하다 잡히면 윤간을 당하고 유곽에 팔렸다. 그래도 담을 넘었다. 공기와 햇볕도 통하지 않은 공장에서 각기병과 폐결핵으로 죽는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12시간 뛰어다니면서 일하다 영양실조로 죽었다. 죽지 않으려면 담을 넘어야 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야 공장 문을 열어 나올 수 있었다.

역사의 거울을 닦아야

가슴 아픈 역사를 겪은 우리에게 필요한 게 있다. '힘을 길러 일본을 이긴다'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이다.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의 시대로 가야 한다. 그러나 걸림돌이 있다. 망각ㆍ왜곡ㆍ미화다. 해결하려면 실천해야 한다. 일본은 모르쇠 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때가 낀 역사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방적공장에 끌려갔던 할머니 중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 다 그렇게 살았다고 치부한다. '피해자성' 회복이 중요하다.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모르니 진상규명에 대한 의식도 없고, 이를 악용해 일본은 부인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질문하는 것이다. 알아가고 기억하고 참여해야 한다.

함께 하는 양심적인 일본 시민들이 있다. 일본에서 강제동원과 관련해 활동하는 단체가 200여 개 있다. 이들은 매주 도쿄에서 집회를 연다. 왜 하냐고 물으니, 당당한 일본인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다. 잘못을 인정하는 상식적 사람들이다. 이걸 보고 우리도 함께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됐던 공장이 일본에 4100여 개, 우리나라에 7400여 개가 있다. 일본보다 우리나라에 더 많다. 인천에는 103개가 있다. 인천은 군수공장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으로 도요방적ㆍ조병창ㆍ인천기계제작소 등이 있다. 분지라는 지형적 특성이 있어서다. 분지는 안개가 끼면 공습하기 힘들다. 또한 항만과 철도시설이 있어 수송이 용이하고, 경성(서울) 인근이라 고급인력 조달이 쉬웠다. 가장 대표적인 군수공장이 부평의 조병창인데 당시 매달 소총 4000정과 탄환 70만발을 생산했다.

피해자 아픔 의미 있게 하는 건,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지 않는 것

인천에 있는 강제동원 유적 103개는 우리가 생활하는 가까운 곳에 있다. 기억하고 찾는 게 필요하다. 103개는 내가 조사한 거라 더 찾으면 발견되는 곳이 있을 거다. 이걸 문화재로 등록하고 활용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사박물관을 찾아가고, 의견을 내고, 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직접 다니는 것이다. 우리 동네 조병창이 있던 곳에 가서 평화를 얘기하다 보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도 가능하다. 인천과 비슷한 곳이 부산이다. 부산시민공원은 예전에 경마장이었고, 미군 하야리아 부대가 있던 곳이었다. 부산시민이 노력해서 시민공원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다. 예전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빈소에 간 적이 있다. 자손 중에 박사도 있고 장학사도 있고 식구가 많은 집안이었는데 빈소가 쓸쓸했다. 그 집 며느리가 한마디 하더라. '어머님과 가족의 인권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어머님과 가족들이 지역사회에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다'면서.

이어서 그 며느리는 '어머님의 아픔을 의미 있게 하는 건 내 주변의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고, 외국인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감동이었다.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우리의 작은 실천이 사회를 바꾸는 에너지가 됐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시사인천>에 실림



태그:#정혜경, #일제강제동원노동자상 건립추진위, #부평 조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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