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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빛 미나미 시마바라 올레를 걸으러 온 사람들.
 핑크빛 미나미 시마바라 올레를 걸으러 온 사람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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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빛 티셔츠를 입고, 분홍빛 배낭을 멘 사람들 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온다. 따사로운 햇빛 아래 분홍빛이 화사하게 빛난다. 이번 올레는 '핑크빛 올레'란다. 머나먼 남쪽나라에서 살포시 다가오고 있는 봄을 맞이하러 간단다. 

화사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분홍빛 셔츠와 배낭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머금어진다. 봄은 규슈올레 길에서 우리의 고운 숨결을 타고 세상으로 퍼져 나갈 모양이다. 규슈올레를 걷는 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질 것 같다.

규슈올레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는 시마바라 반도 끄트머리에 있는 구치노츠 항에서 시작된다. 이 코스,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넘치는 길이다. 규슈올레 가운데 이렇게 오밀조밀하게 볼거리가 모여 있는 코스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 전체 길이는 10.5km, 난이도는 중. 소요예상시간은 3~4시간. 처음 걷는 사람도 부담 없이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오르막이 거의 없고, 보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라고나 할까. 과장이 심하다고?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일단 걸어보시라. 그러면 무슨 말인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으리라.

규슈올레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
 규슈올레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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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현의 시마바라 반도에서도 끄트머리에 있는 구치노츠 항은 그냥 보기에는 아주 작은 항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올레만 휙 걷고 갈 수도 있는데, 일본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수백년 전 유럽의 무역선이 수시로 드나들던 역사가 서려 있다. 그러니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만 걷고 그냥 가지 말고, 이 동네 유적지들을 찬찬히 둘러보시라.

규슈올레에서는 지난 1월 29일부터 주말마다 봄맞이 올레 걷기 행사가 열리고 있다. 나는 2월 25일에 열린 '핑크빛 미나미 시마바라 올레'에 참가했다. 이 행사는 봄이 절정에 이르는 3월 11일(다케오 코스), 25일(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 26일(오쿠분고 코스)에도 열린다.

2012년에 규슈올레가 처음 길을 열 때만 해도 한국인들이 규슈올레를 즐겨 찾았는데, 만 5년이 지난 지금은 일본에서 규슈올레 열풍이 불어 일본인들이 더 많이 걸으러 온단다. 규슈관광추진기구의 이유미씨의 귀띔이다. 조만간 제주올레에서 시작된 올레 열풍이 일본 전국으로 퍼져 나갈 것 같다. 올 6월에는 몽골에도 올레가 수출돼 몽골올레가 열린다.

풍유갓파(豊乳河童)상
 풍유갓파(豊乳河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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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노츠 항에서 간단하게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고 걷기 시작한다. 하늘은 맑고, 햇빛은 따사롭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한 기운을 품었다. 아직은 겨울이 바닷바람에서 묻어난다. 그래도 좋다. 날씨가 좋아서 좋았다. 일단 걷기로 마음을 먹으면 날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지만, 날씨가 좋으면 덤을 듬뿍 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더 좋다. 이날이 그랬다.

붉은 동백이, 홍매화가 환하게 웃으면서 속삭인다. 봄은 이미 와 있어. 그러니 서두르지 마. 지금을 신나게 즐겨.

야쿠모 신사를 지났고, 풍유갓파(豊乳河童)상 앞에 도착했다. 갓파상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요괴인데 가슴이 유난히 동그랗다. 그 가슴을 만지면 엄마젖이 풍부해진다는 속설이 있다나. 단, 만질 때 제대로 잘 만져야 한단다. 부드럽게 받쳐 드는 것처럼 만져야 한다, 소중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요즘은 엄마젖이 넉넉하지 않아도 분유가 얼마든지 있으니 괜찮지만, 옛날에는 엄마젖이 풍부해야 아기가 배를 곯지 않았다.

올레 이정표를 따라 숲길로 접어들었다가 고개를 드니 갑자기 눈앞이 훤해진다. 하얀 솜을 얇게 펴서 늘어놓은 것 같은 하늘이 펼쳐진다. 그 하늘 아래 인공저수지인 노다 제방이 있고, 그 뒤에 노로시야마가 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밭과 밭 사이로 이어진다. 양상추밭, 양파밭 그리고 감자밭이다. 이 풍경은 멀리서 보는 게 더 멋있다. 밭에는 사람의 손길이 잔뜩 묻어 있다. 이랑을 갈고, 비닐을 씌우고, 씨를 뿌리는 농부의 손길이.

노다 제방과 노로시야마
 노다 제방과 노로시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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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 시마바라는 양파 수확철이었다. 우리나라는 햇양파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 아린 맛이 없는 햇양파를 날것 그대로 먹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밭들이 오밀조밀 펼쳐진다. 그 뒤로 완만한 산의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산 위로 뭉게구름이 떠다니고. 하늘은 그 모든 것을 품어 안은 듯 넉넉하면서 고요하다. 바깥세상은 엄청나게 시끄럽건만 올레 길은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하면서 평화롭다.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맑은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드는 것이 느껴진다. 여기 있는 신선한 공기를 모조리 흡수하려는 것처럼 폐활량이 무한대로 늘어난다. 착각일까?

규슈올레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
 규슈올레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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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밭과 감자밭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감자밭과 감자밭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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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밭을 지나고 양상추밭을 지나서 다다른 곳은 아주 오래된 소나무가 있었던 자리였다. 하지만 모진 바닷바람을 견디면서 긴 세월을 견뎌온 소나무는 그곳에 없다. 재선충 때문에 사람들이 베어 없앴단다. 소나무는 모습을 감추고 소나무가 있었다는 전설이 남아 전해지게 됐다, 규슈올레 덕분에.

올레가 아니라면 내가 시마바라 반도 끝에서 "옛날에 옛날에 여기에 아주 오래된 소나무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을 테니까. 소나무여, 그대는 갔어도 그대의 이름은 남았노라. 환상의 노무키 소나무라는 이름으로.

다지리 해안공원에서 '찌찌빵'을 받았다. 이 지역에서 유명한 빵이란다. 아까 지나왔던 풍유갓파상과 관련이 있다. 빵은 부드럽고 맛있었다. 이곳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도시락은 구치노츠 항에 있는 도시락 가게에서 샀다. 스테이크 도시락을 샀는데, 고기가 식었는데도 맛있다. 작년 3월에 다케오 코스를 걸을 때 다케오 역에서 샀던 사가규 도시락이 생각난다. 참 맛있었는데. 그걸 먹으려면 다케오 코스를 또 걸으러 가야하는 거야?

감자밭과 감자밭 사이로 길이 물처럼 흐른다. 길 끝에는 바다가 있다. 우리가 봄을 맞이하러 간 것이 아니라 봄이 시마바라 반도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즈메자키 등대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앙코르와트가 연상되는 용나무. 커플 사진 찍기에 아주 좋다.
 앙코르와트가 연상되는 용나무. 커플 사진 찍기에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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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 시마바라 길 중간에는 화장실이 없다. 그런데 올레꾼을 위해 집과 화장실을 흔쾌히 개방한 사람이 있었다. 그곳에 들렀더니, 벚나무 잎으로 싼 사쿠라 모찌를 준다. 잎까지 먹는 거라나. 벚나무 잎은 깻잎과 똑같이 생겼지만 맛은 전혀 다르다. 소금간이 살짝 된 벚나무 잎이 모찌와 잘 어우러진다.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걷다가 용나무 군락지를 만났다. 20그루가 있다는데 수령이 300년이 넘는 것도 있다나. 이 용나무는 앙코르와트에서 사원 건물을 삼킬 것처럼 칭칭 에워싼 그 용나무와 같은 종이란다. 그래서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앙코르와트에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정말이냐고? 정말이라니까. 앙코르와트에 갔다 온 사람이 하는 얘기니까 믿으세요.

구치노츠 역사 민속자료관의 모리 관장님
 구치노츠 역사 민속자료관의 모리 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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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천천히 걸었다. 아무리 놀멍 쉬멍 걸으멍이라지만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다 먹고, 참견할 것 다 참견하면서 걷자니 자꾸 걸음이 더뎌진다. 게다가 중간에 커피를 파는 카페에까지 들렀으니 더 그랬다. 지나가는 올레꾼을 불러들여 커피를 나눠주는 주인장의 마음 씀씀이 덕분에 갓 볶은 커피까지 샀다. 향이 어찌나 좋은지, 배낭 안에 커피 향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좋았다.

이날 도보여행의 백미는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의 도착점에 있는 구치노츠 역사 민속 자료관이었다. 얼핏 봐서는 볼거리가 별로 없어 대충 휙 둘러보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모리 관장님이 어찌나 재미있게 구치노츠 항 역사이야기를 들려주는지, 분위기가 확 반전되었던 것이다.

모리 관장님은 낡아서 볼품없어 보이는 전시물과 사진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안 들렀다면 후회할 뻔 했네,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다. 모릭 관장님 덕분에 구치노츠 항의 역사에 정통하게 되는 건 덤이다.

규슈올레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 지도
 규슈올레 미나미 시마바라 코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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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미나미 시마바라 시 초청으로 시마바라 반도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태그:#규슈올레, #미나미 시마바라, #시마바라 반도, #풍유갓파상, #구치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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