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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월 14일이다. 밸런타인데이였지만, 동시에 안중근 의사의 사형 선고일이기도 하다. 지난해 2월 14일을 떠올려 보면 많은 언론사들은 "밸런타인데이 상술에 빠지지 마라"며 추모를 강요했다. 페이스북에서 "오늘을 어떤 날로 기억하느냐"며 혼내는 듯 카드뉴스가 나오기도 했다.

올해도 비슷하다. 전날인 13일부터 "밸런타인데이 대신 '안중근 사형 선고일'을 기억하자"는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만약 14일이 안중근 의사의 사형 선고일이 아니었다면 그 무슨 날이든 갖다 붙여서 "상술에 놀아나지 말고 이것을 기억해라"는 이야기를 했을 거다. 어쩌면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창백한 푸른 점"으로 유명한 사진을 전송한 것을 끌고 와서 "상술에 빠지는 대신 우주를 향한 인류의 끝없는 노력을 기억하는 건 어떨까요"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언론이 안중근 의사와 김지섭 의사의 기일은 전혀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년 YTN의 카드뉴스
 작년 YTN의 카드뉴스
ⓒ YTN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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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사형 선고일'에 집중하던 언론, 정작 기일은 외면?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를 잊지 않는 건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후손에게라도 보답을 할 방법을 고민하고, 그들의 뜻을 이어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문제는 평소에는 그런 지점을 이야기하지 않다가 2월 14일에만 "독립운동가들을 잊지 맙시다"고 이야기하며, 밸런타인데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기념하려는 시민들을 "무지몽매한 자들"이자 "우리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을 잊고 지내는 존재"로 몰며 훈계한다는 것이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대신 안중근을 기억하라는 뉴스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대신 안중근을 기억하라는 뉴스들
ⓒ 네이버 뉴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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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대신 안중근을 기억하라는 뉴스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대신 안중근을 기억하라는 뉴스들
ⓒ 네이버 뉴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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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기일은 3월 26일이다. 2016년 2월 14일에 많은 언론사들이 "안중근 의사를 기억합시다"고 썼지만, 정작 기일인 3월 26일에는 그만큼 안중근 의사를 다루지 않았다. 다룬 기사도 "기억해야 합니다"가 아니라 기일 기념행사가 열렸다와 같은 내용을 다룬 뉴스들이 대부분이었다. 안중근 의사를 기억하는 데에 있어서 2월 14일과 3월 26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판단하기는 힘들겠지만, 2월 14일에 아득바득 훈계하던 언론사들이 3월 26일에 조용하게 지나가는 것을 보는 일은 씁쓸했다.

이들이 진정으로 독립운동가를 기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2월 14일의 밸런타인데이와 엮어 '트래픽 장사'를 하는 것에 불과하구나 라는 생각이 확신으로 바뀐 이유는, 지난해 2월 20일을 대하는 언론사들의 모습을 보고서다. 2월 20일은 독립운동가 김지섭 의사의 기일이다. 김지섭 의사는 의열단에서 활동했다. 안정적으로 교직에 근무하다 1910년 일본의 폭압이 시작되자 직업을 그만두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안중근 의사의 기일에는 기일을 알리는 내용일 뿐, 기억하라고 훈계하지 않는다. 기사 수도 2월 14일보다 적다.
 안중근 의사의 기일에는 기일을 알리는 내용일 뿐, 기억하라고 훈계하지 않는다. 기사 수도 2월 14일보다 적다.
ⓒ 네이버 뉴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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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으로 한국인이 억울하게 일본에서 학살되자, 분개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간다. 제국의회에 참가하는 고관을 제거할 목적으로 폭탄의거를 준비했으나 계획이 변경되어 일본 왕궁에 폭탄의거를 진행한다. 결국 실패했으나 일본에 충격을 준 이른바 '나쥬바시 사건'이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김지섭 의사는 사형이 아니면 무죄석방을 요구하며 "나 홀로 적국에 들어와 사형을 받는다는 것은 진실로 넘치는 영광이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끝내 1928년 2월 20일 감옥에서 죽음을 맞는다.

2월 14일과 불과 6일 차이 나는 2월 20일, 김지섭 의사의 죽음을 다룬 뉴스는 2016년에 불과 단 한 건에 불과했다. 전체 날짜로 해도 김지섭 의사의 소식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언론사들이 단순히 밸런타인데이와 엮어서 '트래픽 장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하고자 한다면 왜 김지섭 의사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고 2월 20일날 "그를 기억합시다"고 훈계하지 않는가? 왜 3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에는 상대적으로 조용히 지나가는가?

2월 20일, 김지섭 의사를 다룬 뉴스는 한 건 뿐이다.
 2월 20일, 김지섭 의사를 다룬 뉴스는 한 건 뿐이다.
ⓒ 네이버 뉴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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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안중근 팔이' 하시겠습니까?

곧 2월 20일도 온다. 3월 26일도 온다. 김구 선생의 기일인 6월 26일도 온다. 윤봉길 의사의 기일인 12월 19일도 온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기억해야 할 사건들로 가득한 날들이 반복된다. 안중근 의사를 잊도록 만든다는 그 악명 높은 '밸런타인데이'가 문제인가? 아니면 밸런타인데이를 기회 삼아 트래픽에만 신경 쓰며 기억을 강요하고, 정작 다른 날에는 무심하게 지나가는 언론들이 문제인가?

어쩌면 언론들에게 독립운동가는 '트래픽 장사'의 수단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들이 대중을 '아득바득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중근 의사도 기억하지 않고 초콜릿 주고받기에만 열을 내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데에는 더 중요한 날짜도, 덜 중요한 날짜도 없다. 더 중요한 사람도 없고 덜 중요한 사람도 없다. 그들이 다른 날에도 그렇게 시끄럽다면 이해할 수 있다. 올해에도 "상술에만 속아 넘어간 채 독립운동가를 잊은 너는 나쁜 사람"이라며 세상 중요하게 떠들다가도 다른 독립운동가를 기념하고 배워갈 날들에 침묵한다면, 나는 그들을 더 이상 신뢰하기 힘들 것이다.


태그:#밸런타인데이, #최효훈,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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