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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일 오전 서울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불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불출마 선언 중 기침하는 반기문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일 오전 서울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불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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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 내용 브리핑은 이따 정론관에서 하겠습니다."

1일 오후 3시 18분 국회 2층 정의당 대표실 앞, 심상정 대표와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의 면담이 끝나길 기다리는 취재진에게 반 전 총장 쪽 관계자가 말했다. '무슨 내용이냐'는 질문에는 "모른다"는 답만 돌아왔고, 오후 3시 30분 정론관 기자회견장이 강효상 새누리당 의원 이름으로 예약됐다는 소식만 알려졌다. 

잠시 뒤 많은 카메라 앞에 반기문 전 총장이 섰다. 그는 준비해온 자료를 차분히 읽어내려가던 중 모두가 깜짝 놀랄 말을 꺼냈다.

"정치 교체와 국가 통합을 이루겠다던 순수한 뜻을 접겠다."

대선 불출마 선언이었다. 1월 12일 화려하게 귀국하며 "분열된 나라를 다시 하나로 묶어 세계 일류국가로 만드는 그런 의지냐는 것이라면 분명히 제 한 몸 불사를 각오가 돼 있다"고 한 그였다. 하지만 정확히 20일 만에 반 전 총장은 꿈을 접었다. "이 결정을 한 저 자신에게 혹독한 질책을 하고 싶다, 양해해달라"는 말만 남긴 채 떠났다.

[반기문은 왜①] 숨 가쁜 행보, 텅 빈 메시지

1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반 전 총장은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찢어진 보수층에게는 더욱 절실한 존재였다. 여기에 부응하고 싶었던 것일까. 반 전 총장은 의욕이 넘쳤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겠다'며 곧바로 전국을 누볐다. 충북 음성과 충주에서 일가친척을 만난 뒤 부산과 경남 거제, 김해 봉하마을을 방문하고 전남 진도 팽목항으로 갔다. 이후에도 광주와 여수를 훑고 대구, 대전을 찾는 숨 가쁜 행보가 이어졌다.

문제는 메시지였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반 전 총장이 내놓은 말은 매번 같았다. 그는 패권주의·낡은 정치 청산을 주장하며 정치를 교체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떻게'는 없었다. 또 청년 일자리 문제가 중요하다면서도 인턴 확대, 자원봉사, 해외 진출 등 공허한 대안만 제시했다. '진보적 보수주의자'를 자청했지만 역시 내용이 없었다. 주변에는 보수 쪽 인물들만 모였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8일 오전 광주 조선대 강연장에 들어서며 학생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 조선대에서도 항의받은 반기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8일 오전 광주 조선대 강연장에 들어서며 학생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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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진 반 전 총장은 개헌 카드를 꺼냈다. 그는 지난달 25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개헌이 정치 교체의 조건이라며 대선 전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때리기'에 나섰다. 반 전 총장은 1월 3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개헌추진협의체를 제안하며 "민주당과 그 당의 유력한 대권 주자(문 전 대표)는 개헌을 하기엔 시간이 없다는데 핑계일 뿐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이 생각하는 개헌의 필요성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빅텐트'를 세우겠다며 김종인 민주당 의원,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 손학규 국민주권개혁회의 의장 등을 만나는 그의 모습은 "정치 바꿔야 한다"는 자신의 발언과 달리 낡은 정치에 가까워 보였다. 보수 성향 의원조차 "개헌이 정치권 중심으로 논의되면 국민들이 정치 공학으로 생각한다, 진정성에 의문이 들면 개헌 자체가 안 된다"고 할 정도였다.

[반기문은 왜②] 문재인 절반 수준으로 토막 난 지지율

속 빈 행보는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반 전 총장은 2014년 12월 26~28일 <서울신문>이 여론조사 전문업체 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후보 선호도 38.7%를 기록, 2위를 차지한 문재인 당시 의원(9.8%)을 압도했다. 한동안 주춤했던 지지율은 지난해 12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서 다시 20%대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귀국 이후에는 줄곧 하락세였다. 반풍(潘風)은 불지 않았다. 매주 조사를 실시한 리얼미터 자료를 보면, 12월 내내 상승세를 탔던 반 전 총장의 지지율은 1월 첫째 주 들어 23.5%에서 21.5%로 하락했다. 리얼미터가 1월 23~24일 실시한 조사에선 반 전 총장의 지지율이 15.4%까지 떨어졌다. 반면 1위를 차지한 문재인 전 대표는 32.8%를 기록, 넉넉한 차이로 반 전 총장을 제쳤다.

아직 바닥이 아니었다. 1월 31일 <세계일보>는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한 조사에서 반 전 총장의 지지율은 13.1%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지금껏 나온 숫자 중 가장 낮았다. 또 같은 매체가 시대정신연구소에 의뢰, 1월 2일 보도한 조사보다 8.2%포인트 떨어진 수치였다.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그의 지지율은 15% 전후를 기록했다. 30%를 넘긴 문 전 대표의 절반 수준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반기문은 왜③] 맷집 없이 링에 올라... 검증에 속수무책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일 오전 서울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불출마 기자회견을 마치고 기자들에 둘러 싸여 자리를 떠나고 있다.
▲ 기자들에 둘러 싸인 반기문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일 오전 서울 국회 정론관에서 대선 불출마 기자회견을 마치고 기자들에 둘러 싸여 자리를 떠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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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라면 피할 수 없는 검증의 칼날도 거듭 그에게 상처를 냈다. 반 전 총장은 2004~2006년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냈지만, 국회법이 바뀌기 전이라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지 않았다. 링에 올랐지만, 맷집은 키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귀국 당일부터 의혹들이 쏟아졌다. 이날 뉴욕 검찰은 반 전 총장의 동생 기상씨와 조카 주현씨를 경남기업 관련 건물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중동 관리에게 뇌물을 건넸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또 둘째 동생 반기호씨가 UN 현지 방문대표단 직함을 이용, 미얀마 사업과정에서 특혜를 봤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반 전 총장 아들 우현씨가 아버지 덕분에 SK텔레콤 뉴욕사무소에 쉽게 들어갔고, 회사에서 그의 골프 예약을 잡아줬다는 얘기도 나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반 전 총장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23만 달러를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반 전 총장은 첫 기사를 낸 <시사저널>을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했다. 거듭 "제 이름이 왜 나오는지 알 수 없다, 제 말이 진실에서 조금도 거짓이 없다"며 결백을 호소했고, 법률대리인단을 꾸려 박 회장과 만난 날 쓴 일기까지 공개했다. 그러나 의혹은 말끔히 사라지지 않았다.

반 전 총장은 1일 "인격 살해에 가까운 모해, 각종 가까운 뉴스로 인해 정치 교체의 명분은 실종됐고 저와 가족, 그리고 제가 10년 봉직했던 UN의 명예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됐다"며 의혹을 제기했던 이들을 비판했다. 또 "일부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도 지극히 실망스러웠다"고 했다. 이 행태를 바꿔보겠다던 그의 의지는 사라졌고, 낙담 가득한 말들로 채워진 5분짜리 기자회견이었다. 그렇게 반기문의 꿈은 20일 만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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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반기문, #반기문 불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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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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