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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의 가치를 실천하는 알마 출판사가 흥미로운 책을 내놨다. 소셜 키워드로 사회 현상을 읽고 현재와 미래를 탐구해보겠다는 '#해시태그' 시리즈다. 이들이 첫 번째로 다루는 현상은 '혐오'다. 사회비평가 박권일씨는 '헬조선론'의 현실 비판보다 혐오 감정 측면을, 아르스프락시아 김학준 미디어분석팀장은 '촛불집회'를 통해 정치혐오를, 연세대 젠더연구원 허윤씨와 웹진 <아이즈> 위근우 기자는 여성혐오를, 고려대 로스쿨 이준일 교수는 혐오 표현에 대한 법적 제재를 다룬다. 읽어보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주장과 갸우뚱할 주장이 뒤섞여 있었다. 필자는 이중 박권일씨와 김학준씨의 글을 차례로 리뷰하겠다.

<#혐오_주의>(박권일 외 / 알마 / 2017 / 9000원) 서점에서 190쪽이 채 안 되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책자를 발견했다. 독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친절함을 갖췄다는 인상을 받았다.
 <#혐오_주의>(박권일 외 / 알마 / 2017 / 9000원) 서점에서 190쪽이 채 안 되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책자를 발견했다. 독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친절함을 갖췄다는 인상을 받았다.
ⓒ 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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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은 "혐오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라는 말로 운을 뗀다. 이어서 현재 한국 사회에는 "전라도 출신이라서, 이주노동자라서, 동성애자라서, 운동권이라서, 여성이라서, 가난해서, 노동자라서" 혐오당하는 이들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혐오 자체에 함몰되기보다 혐오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신기하게도 이 결론은, (지금은 끊었지만) 필자도 SNS를 할 때 자주 외친 구호 중 하나였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세상 어디엔가 같은 결론에 도달한 타인이 존재하며, 심지어 그가 저명한 사회비평가라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런데 그가 이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필자와는 사뭇 다르다.

그는 이 결론이 유효하단 것을 보여주고자, 2015년 부상한 '헬조선' 담론을 시범 타겟으로 삼는다. 그간 헬조선론이 주로 현실비판으로 해석돼 왔지만, 자기가 보기에는 헬조선론의 지배적 감정은 실상 자국 '혐오'라는 것. 왜 그렇게 생각할까. <경향신문> 박은하 기자는 2015년 9월 4일 데이터 기반 전략 컨설팅 기업 아르스프락시아와 함께 트위터와 일베를 분석해 헬조선 담론 지도를 그린 바 있다.

이들의 분석에 따르면, 트위터와 일베 모두 '헬조선'이 '미개'나 '탈출' 같은 단어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잦았는데, 가령 "헬조선은 역시 미개해" "헬조선은 탈출해야 해" 같은 식이었다. 박권일은 이러한 문명/미개 이분법이 '깨어 있는 소수'가 '우매한 다수'를 지도해야 한다는 식의 우열 논리로 귀결되기 쉽다고 지적한다.

또한 헬조선론은 불안정, 열정노동 같은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불평등(부정의)' 아닌 '미개' 문제로 계속 수렴시킨다. 따라서 100% 들어맞지는 않는 문명화와 사회진보를 구분하지 못 하는 오류에 빠진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은 문명화 과정에서 자동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헌신적 투쟁'으로 쟁취됐음, 즉 문명이 아닌 진보의 결과였음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권일은 더 나아가 문명/미개 이분법의 선구적(?) 사례로 국개론("국민이 개새끼다")의 원조격이자 식민주의 영향을 받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까지 든다. 실제로 민족개조론을 통해 식민지 체제지배 세력들은 그들이 착취하던 농민·노동자들이 정치적 각성을 못 하게끔, "거창하게 무슨 계급투쟁이고 민족해방인가. 미개한 문화부터 선진화하라!"는 식으로 물질적 모순을 은폐하고 호도했다.

그러나 필자는 민족개조론을 헬조선론에까지 확장시켜 비교하는 박권일의 논리는 조금 과하게 느껴진다. 박권일은 자신의 주장의 근거들을 크게 셋을 제시한다. 첫번째, 헬조선 청년들이 외치는 '죽창'은 반정치주의의 상징일 뿐이다. 두번째, 분노와 혐오는 다른데 헬조선론의 감수성은 후자에 가깝다. 세번째, 혐오 정서들은 공통적으로 '우열 논리'를 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우선 첫번째 전제부터 따져보자. 박권일은 이 전제의 근거로 헬코리아 누리집 운영자의 인터뷰가 담긴 <프레시안>의 2015년 8월 6일 자 기사를 든다.

1922년 5월호 <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1922년 5월호 <개벽>에 실린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 free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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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 운영자는 죽창에 대해 "창 중에서도 가장 저급한 죽창은 생존을 넘어 '최후의 저항'과 같은 느낌을 풍긴다. (...) 지독할 정도로 자기 파괴적인 포기 선언이라고 보시면 된다. 다른 대안이 없다는 뜻을 가진 헬조선의 키워드인 셈이다. (...)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같이 죽자!'는 식의 비유다."라고 말했다. 박권일은 이에 근거해 "(죽창은) 기득권 또는 체제를 향한 무기가 아니다. 저향의 무용함을 드러내는 (...) 반정치주의"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두 가지 결함이 있다. 우선 (1) 인터뷰이 한 둘의 생각에 근거해 논리를 세우면, 다른 반례가 등장했을 시 논리가 매우 간단히 무너진다. 아래 사진은 2015년 7월 23일 디시인사이드 '주식 갤러리(주갤)'에 올라온 짤방(사진)이다. 헬조선론이 디시 '역사 갤러리(역갤)'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헬조선론을 나름대로 재맥락화, 변용된 수용을 거쳐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곳 중 하나가 주갤이다.

한데 이 주갤은 아래 짤방처럼, '죽창'을 금수저(아마도 재벌로 추정되는 인물)의 배에 꼽아 거기서 흘러나오는 돈을 분배하는 것이야말로 낙수효과의 유일한 실현 방법임을 날카롭게 비유한다. 이 짤방에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청년도, '다 같이 죽자'는 청년도 없다. 다소 잔혹한 비유지만 모두 해맑게 웃고 있을 뿐이다.

결국 죽창을 외치는 헬조선 청년들 중 일부는 한국 사회의 (특히 박권일이 강조하는) 불평등(부정의) 문제를 인식한다. 박권일이 청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응답자 몇 %가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보였다거나 (엄밀한 분석은 아닐지라도) 비평의 수준에서 '어느 정도' 그런 정서들이 존재한다거나 했다면 수긍했을지 몰라도, 단순히 인터뷰 몇 줄에 근거해 헬조선론의 성격 일반을 규정해버린다면 '확증편향의 오류'인 이유다.

물론 금수저라는 이유로 막 죽창으로 찌르면 안 되겠지만, 이 그림은 죽창러들이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금수저라는 이유로 막 죽창으로 찌르면 안 되겠지만, 이 그림은 죽창러들이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디시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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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주갤러들이 짤방은 만들망정 어떤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시위나 운동까지 전개하진 않는다. 고로 죽창이 사이버 공간 밖으로 가시화된 실천(저항)에 대한 "포기"의 상징이란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포기를 "반정치주의"라고까지 몰아붙이려면, (2) 도대체 정치란 것이 정확히 뭔지부터 해명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政治)란 '바르게 다스림'이다. '바르다'는 가치판단이고, '다스림'은 사실판단이다. 결국 박권일 나름의 올바른 정치에 대한 상(image)이 미리 전제돼 않는 이상 '정치에 반한다'라는 결론은 나올 수 없다. 실천이 없는 다스림도 성립할 때가 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 역설적이게도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는 투표 보이콧, 이민이 그런 경우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지옥을 바꾸기 위해 움직이자"는 누군가의 선동에 "부질없다"며 그 이유를 짤방으로 전시해대는 행위나, 탈조선을 통해 국가 자체를 보이콧하는 행위 역시도 일종의 '비행위적 정치'라 못 할 이유가 없다. 필자의 말 뜻은 이런 위악적이고 소비적인 정치들이 옳다는 게 아니다. 다만 어쨌든 박권일은 먼저 죽창을 "반정치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럼 <어째서> 청년들이 죽창 운운 대신 기득권과 체제를 향해 <저항>해야만 옳은 정치를 하는 것인지, 또 그것이 이상적인 방향일지라도 현실적으로 지금 청년들이 저항에 가담할 수 있는 문화적, 정치적, 시간적, 물질적 <자본>들을 충분히 보장받을 수나 있는 상황인지, 근거들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박권일에게 있다. 단순히 "자유와 평등은 (...)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적 투쟁으로 쟁취한 것이다"라고만 하는 것은 좀 무책임하게 들린다.

또한 헬조선론에 적용 가능할만한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조차 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문명화와 사회진보의 과정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고는 하지만(일제 시대는 확실히 그래 보이지만) 2017년 한국도 그런 경우인지도 미지수다. 가령 현대 사회에서 '교육'은 문명과 사회진보 중 어느 쪽에 기여할 수 있을까? 아니 이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는 문제일까?

박권일은 "혐오는 증상이 아니라 원인이다"라고 했을 때, 그는 혐오의 원인으로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신자유주의화를 거쳐 더 극심해진 "성과주의, 서열주의, 경쟁적 문화" 즉 과잉능력주의(능력주의를 넘어서, 무능력자나 저능력자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정당화할 정도로 강도가 극단적으로 높아진 능력주의)를 지목한다. 그런데 이러한 우열 논리를 우리가 거의 처음, 강도높게 체화하는 곳이 어디인가. 바로 학교다.

과잉능력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존속조차도 혐오의 원인이 아니라 또 하나의 '증상'일 수 있다. 경쟁적이고 서열적인 입시와 주입식 커리큘럼을 거친 이상 사람들의 정치적 상상력은 빈곤할 수밖에 없다. 한줌 남은 좌파들이 단번에 세상 바꾸려는 욕심 좀 제발 접고 장기투자(?) 관점에서 교육 제도 변화에 역량을 쏟지 않는 이상 "헌신적 투쟁에 참여"할만한 모종의 사회성이 형성되기란, 우연적 기회를 잡은 사람이 아닌 이상 기대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 우연적인 기회는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 태어나 별 어려움 없이 대학 진학했다가 '꿘' 동아리에 물든 경우일 수도 있고, 일용직 노동자로 근근이 살아다가 고구신 같은 '꿘' 성향의 노무사의 도움을 받게 된 경우일 수도 있다. 교육은 우연을 보편적 기회로 제공해줄 수 있다. '죽창'을 달라던 청년들의 외침이, 필자에게는 자기 파괴라기보다는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할 기회가 부재하다는 절규처럼 들렸던 이유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8일 오전 광주 조선대 강연장에 들어서며 학생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 항의받으며 강연장 들어서는 반기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8일 오전 광주 조선대 강연장에 들어서며 학생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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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은 또한 법철학자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을 인용해, 분노와 혐오가 다른 감정이며 헬조선론의 감수성이 후자에 가깝다고 비판한다. 너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상대방을 배제, 회피하게 만드는 감정이므로 현실 개선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감정이다. 헬조선론의 '미개' 운운도 체제의 모순을 자신과 무관한 자연재해처럼 타자화하는 혐오에 가까우니, 결국 "체제를 유지하는 파국론"일 수밖에 없다는 게 박권일의 주장이다.

또한 박권일은 이 혐오가 우열 논리, 과잉능력주의와 공명해, "부정의를 개선하고 교정하는 대신 능력자가 되어 (현실을) '초월'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강자와 약자, 능력자와 비능력적라는 자의적 구분을 마치 결정적이고 극복 불가능한 차이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체제의 부정의를 은폐"한다고 본다. 그러나 필자는 박권일이 헬조선론을 너무 '모! 아니면 도!'식으로 해석했다고 본다. 헬조선론도 수용 방식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 담론장 내에서는 혐오도 존재할 수 있고 분노도 존재할 수 있으며, 한 사람조차도 아침 기분 다르고 저녁 기분 다를 수 있다. 가령 헬조선론 중 '노오력'이라는 용어는 '미개'나 '탈출'보다 많이 쓰이는데, 이미 한번 열정노동 문제로 실패한 청년인턴 제도를 늘리겠다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면전까지 다가가 "아직도 노오력이 부족해 죄송합니다!!"라는 피케팅을 해 1승을 거둔 청년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혐오'를 드러낸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이 드러낸 것은 차라리 '분노'에 가깝다. 너스바움은 분노는 혐오와 달리, 무엇이 정확히 부당한 상황인지 '인식'을 동반할 뿐더러 좋든 실든 이 감정을 일으킨 대상에게 '다가가' 비난이든 처벌이든 하게끔 만드는 건설적 가능성 있는 도덕 감정으로 본다. 헬조선론을 자기들 나름대로 재맥락화, 변용해 기득권과 체제에 저항하는 위와 같은 모습들이 존재하는 이상, 이를 외면한 채 헬조선론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은 '사실 외면의 오류'다.

박권일이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까지 들먹이며 비교한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헬조선론의 순기능을 사랑하는 한 청년으로서 조금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그래도 그의 글은 그간 사회비판 측면으로만 해석된 헬조선론이 내장한 '혐오'의 결을 드러내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


태그:#헬조선, #노오력, #미개, #박권일, #반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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