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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배
 세배
ⓒ 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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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지붕 있던 시절에야 세배의 대가를 덕담에 떡국과 술상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이랬다간 보는 앞에서 수모를 당하는 대참사는 각오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세뱃돈을 현금으로 받을 확률이 99.99%이기 때문이다. 항상 남은 이 0.01%가 문제다.

세뱃돈 대신 독서를 열심히 하라는 덕담과 함께 문화상품권을 주는 이 황당 시츄에이션이 훨씬 품위가 있어 보일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어차피 세뱃돈 일부가 온라인 게임회사 대표님의 뱃속으로 들어간다지만, 원칙적으로 현금으로 주는 게 맞다. 주고도 욕먹는 선물 1위가 '치약, 칫솔, 샴푸 생활용품세트'란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품위는 술자리에서나 지켜라.

혹시 스마트폰 데이터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가? 이거야말로 큰돈 들이고도 조카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빳빳한 현금이 최고인 세상이다. 올해도 아재들은 앞다퉈 세뱃돈 이벤트를 추진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현실은 계획 그딴 거 다 필요 없다. '초등 1만, 중등 2만, 고등 3만. 대학 입학 시에만 5만. 그 후 없음.' 이런 정체불명의 기준도 따르지 마라. 친척 많은 집들은 이것도 '헉' 소리 난다.

혹시라도 '기자 양반, 쓸 기삿거리가 없나? 세뱃돈을 왜 네가 정해?'라는 이런 댓글은 정중히 사양한다. 쓰는 나도 민망하다. 나도 어쩌다가 세뱃돈까지 이렇게 기사로 쓸 줄 꿈에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세뱃돈 주는 위치에 있는 어른들이여, 이것만은 꼭 되돌아보자.

은행 창구에 줄 서서 이제 신권 앵벌이 좀 그만하자. 세뱃돈은 무조건 빳빳한 신권으로 줘야 한다는 미신 따르지 말라. 그러잖아도 구조조정에 떠는 은행 창구직원들 고생시키는 일이다. 설날 앞두고 돈 찍어대는 한국은행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받는 입장에서는 액수밖에 관심이 없다. 꼬깃꼬깃 허름해지고 귀퉁이가 찢어진 돈 말고는 괜찮다. 그냥 액수만 많으면 된다. 그리고 제발, 손맛이라도 느끼라는 차원인지 금액은 몇만 원인데 신권 천 원짜리 묶음으로 주지 마라. 바로 이 상황이 받는 입장에서 제일 짜증나는 상황이다.

아 참, 좋은 돈 주면서 공부 열심히 하란 말도 하지 마라. 엄마한테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지긋지긋하다. 신학기 책 사라는 말도 하지 마라. 책값은 원칙적으로 엄마가 주는 것이 맞다. 돈 주면서 욕먹으며 쪽팔리지 마라. 형편이 어려워서 조금 담았다는 말은 더더욱 하지 마라. 어차피 받는 아이들이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더 잘 파악하고 있다. 세뱃돈 5만 원 받다가 IMF 터지고 만 원 받은 그 고통의 시절도 모두 감내해냈던 민족들이다.

백수 조카 세뱃돈은 눈치 봐서 몰래 줘라

사람은 누구나 동등하다. 사람 위에 사람 없다. 차별하지 마라. 장손이라고, 학교에 입학한다고, 아들이라고 차등을 두지 마라. 처가와 본가에서도 금액을 통일하라. 경제적인 능력 생겼으니 안 주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버려라. 6470원의 최저 시급 받는 조카들이 실은 더 돈 쓸 곳이 많다. 혹시 미취업 백수라는 이유로 성인조카에게 세뱃돈을 준다면, 친척들이 보는 앞에서 절대 주지 마라. 눈치 봐서 적당한 시기와 장소를 선택해 은밀하게 전달하라. (받고는 싶지만) '공식 석상'에서 안 받겠다는데, 강제로 쥐여 줬다가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지름길이다.

나라님께서 뜯어가는 것이 너무 많아 쓸 현금도 없는 평범한 월급쟁이답게 형편껏 줘라. 정 어려우면 1인당 만 원으로 통일하라. 그러나 판검사나 의사 등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사업가라면 통 크게 줘라. 설령 빛 좋은 개살구로 빚이 조금 있더라도 사회적 지위만큼 기부하라. 회사 다니는 사람과 수준이 비슷하면 그것이 바로 새해부터 자라나는 애들 기죽이는 행동이다. 다들 그렇게 지성인의 소양을 배우는 거다.

은연중이라도 남의 돈 받기가 쉽지 않다는 교육적 차원에서 안 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감히 말하지 마라. 회사에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이번 달 월급을 포기할 수 있다면 인정한다. 세배도 일종의 감정노동임을 인식해야 한다. 세배를 마치고 방바닥에 앉아서 현금 착착 세어가면서 액수 헤아리는 조카들 보며 정떨어진다고 생각하지 마라. 신세계가 아니다. 당신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조카들에게 체면도 살릴 겸 조금 넉넉히 준다고 타박하지 마라. 작년에 "평소에 그렇게 나한테 돈 좀 써보시지!"라고 바가지 긁어놓고, 올해 액수 좀 줄이니 "다 큰 애들한테 그렇게 조금 주면 주고도 욕먹어!"라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나는 5만 원씩 줬는데, 형님네는 우리 애들에게 2만 원씩 줬다고? 맘에 두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꾸 생각이 나는 건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각자 사정을 생각하면 그리 싫어할 일도 아니다.

원래 세뱃돈은 부모들이 쓴 총지출을 자식들이 받은 돈의 총수입으로 메꾸는 메커니즘이다. 전체를 놓고 보면 지출과 수입은 엇비슷하다. 그러니 쿨하게 인정해라. 어차피 줄 거라면 친자식 용돈을 조금 많이 주는 날이라고 생각하며 기분좋게 주자.

애들 세뱃돈 삥 좀 뜯지 마라, 정신 건강에 해롭다

모은 세뱃돈 부지런히 카운팅하는 아들에게 제발 삥 좀 뜯지 마라. 자라나는 새싹들 정신건강에 해롭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봐라. 부지런히 적금 부었는데 나라에서 몰수해간 딱 그 심정×1000이다. '어려서 이렇게 큰돈은 필요없다'는 핑계는 경제학자에게 자문부터 구하라. 잠시만 맡아둔다거나 은행에 넣었다가 필요할 때 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을 놈 이젠 아무도 없다.

세뱃돈 몰수 그 자체가 위법이다. 제3자가 무상으로 자녀에게 재산을 수여하고 친권자의 관리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시하면 부모라도 재산관리 절대 못 한다(민법 제918조). 철이 들면서 엄마한테 안 뺏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몰수당한 그 돈 22만 원. 10년 전 일인데 금액까지 생생히 기억하는 고등학생 아들. 일단 정신건강에 해롭고, 트라우마는 평생 간다.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도 없다.

그래도 몰수를 계획하고 있나? 아이를 바늘도둑이 아니라 소도둑으로 키우는 지름길이다. 아이는 이제 잔꾀로 엄마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묘책만을 구상할 것이다. 엄마의 사각지대를 노리며, 안 받았다고 잡아떼는 일이 종종 일어날지 모른다.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억울한 듯한 표정도 때때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집요하게 물어도 당당하게 꿋꿋하게 밀고 나가니 심증은 가되 물증이 없다. 받은 게 없다는데 어쩌겠나. 그런다고 포기 않고 비겁하게 용돈 금지로 협박하지 마라. 기미가 보이면 적당히 합의를 봐라. 빼돌리기로 마음먹은 아들이라면 몰수를 당하고도 10만 원 정도 챙기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이왕 삥뜯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소비가 일시적으로 살아나는 이 틈을 노려 못된 이벤트 좀 하지 마라. 유통 업계의 한몫 잡을 기회로 떠오른 세뱃돈 이벤트가 아이들을 다 망쳐놓고 있다. 왜 하필 이럴 때 '설맞이 완구 대전'을 하고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신상 모델을 출시하나. 가격을 보아하니 금수저 말고는 평소 같으면 구경도 못할 것 같은 아이들인데 제발 현혹하지 마라. 세뱃돈으로 두둑해진 아이들을 노린 캐릭터가 그려진 어린이 통장 유치이벤트도 이젠 짜증난다.

5만 원권이 나오면서 애들이 만 원권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간덩어리가 부은 것이 아니다. 창조경제를 주창하는 이 나라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고 또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자식들 세뱃돈을 밑천으로 '동양화 그리기'에 뛰어들어 한판 쓸어담을 생각도 하지 마라. 설날 가혹한 지출에 삶이 그대를 고달프게 할지라도 결코 슬퍼하지 마라. 열심히 뿌린 당신, 이젠 일해야 한다.

친척 집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 가는 이들에게는 세뱃돈 얘기 자체가 그저 사치일지 모른다. 이제 세뱃돈 걱정은 조금 내려놓자. 모처럼 가족과 한자리에 모여 떡국 한 그릇 나누는 의미있는 날로 만들어보자. 그리고 세뱃돈은 형편에 맞게 주되 멋진 덕담을 준비하자. 한마디 말이 올 한해 사람을 빛나게 한다. 이게 바로 멋진 0.01%가 되는 길이다.


태그:#세뱃돈, #명절, #설날, #설날 세뱃돈, #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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