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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학생이었다.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은 한껏 들떴고 우리들 수중엔 귀한 카메라가 들려 있었기에 더욱 폼이 났다.

대천해수욕장에 도착해 백사장에서 바다를 등 뒤에 두고 많은 사진을 찍었다. 어깨동무를 하거나 짝다리로 허리에 손을 얹기도 하고 그렇게 그 나이에 맞는 겉멋들이 사진기 안에 차곡차곡 담겼다.

필름 한 통을 다 쓰고 돌아오는 기차 안, 괜히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무심결에 카메라 뒷뚜껑을 열어 버린 것. 으악! 종일 담은 해수욕장의 추억이 홀랑 날아가 버렸다. 내 등과 머리 위로는 친구들의 주먹이 쏟아졌다.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의 추억이다.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

광시면소재지 도로변에 있던 미림사진관 80년대 모습.
 광시면소재지 도로변에 있던 미림사진관 80년대 모습.
ⓒ 김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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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제 사장이 집마당으로 옮긴 사진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인제 사장이 집마당으로 옮긴 사진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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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카메라가 디지털 카메라로, 또 스마트폰으로 진화한 지금이야 자기가 자기를 찍고, 음식도 찍고 그렇게 필름값 걱정없이 밥먹듯이 사진을 찍어대는 세상이지만….

지나온 시대엔 돌, 입학, 졸업, 환갑, 영정.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념이 되는 날에만 사진관에 가거나 사진사를 불러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한세기 동안 인간사 희노애락을 풍경으로 담아냈던 사진관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충남 예산군내 몇 곳 남지않은 사진관 중 면소재지에서 50년 넘게 간판을 걸고 있는 곳이 있다. 광시에 있는 미림사진관이다. 6일, 그 곳으로 달려가 김인제 사장(75)을 만났다.

"18살 때 중학교 그만두고 사진기술을 배웠어. 없어서 공부하기 힘든 시절이었거든. 마침 아는 형이 사진기술을 가르쳐 줬는데 그게 평생직업이 됐지."

52년째 사진사로 외길을 걸어온 김 사장이 청년시절 기억을 더듬는다.

공주에 있는 탄천사진관에서 기사로 근무하다 고향인 청양 정산면으로 와 현대사진관을 열었다. 그의 나이 스무살 때다.

사진인화 영수증.
 사진인화 영수증.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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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얼마 안 돼서 '대구로 가면 수지 맞는다'는 친구의 권유로 달성공원 옆에 있는 달성사진관에 적을 두고 사진업을 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프리랜서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잘되긴 했지만 신통치는 않았다. 그래서 다시 고향 쪽으로 향했다. 1964년 스물셋에 광시로 와 미림사진관을 인수했고 오늘에 이르렀다.

"증명사진값이 50원인가 할 때 시작했는데 지금은 1만2000원이야. 장사 참 잘됐지. 처음부터 쭉~ 정말 잘됐어. 학생들 앨범도 많이 했고 특히 명절 때는 사진찍느라 날 새다시피 했으니까"

추석이나 설명절엔 새옷을 입었으니 사진관 앞에서 줄을 섰다고 한다. 그렇게 1970년에서 1990년까지 호황이었다.

시골 환갑집 출장사진

시골 출장도 많았다.

"환갑사진은 아침에 꼭 찍는데 서너집이 겹치는 주말이면 서로 먼저 와서 찍어 달라고 독촉을 했어. 상차림을 해놓고 사진부터 찍어야 잔치가 시작됐거든. 한 집에 보통 5판씩 찍었는데 시골 구석구석까지 가려면 교통편이 있간? 자전거에 카메라를 싣고 다니던 시절이었지."

꾸불꾸불 시골길을 달리는 자전거와 사진박는 것 구경하려고 자전거 뒤를 따라 달리는 꼬맹이들이 보이는 듯하다.

김인제 사장이 젊은 시절 손때묻은 흑백원판 카메라와 당시에 쌀 2~3가마씩 주고 산 비싼 기계를 꺼내 보여주고 있다.
 김인제 사장이 젊은 시절 손때묻은 흑백원판 카메라와 당시에 쌀 2~3가마씩 주고 산 비싼 기계를 꺼내 보여주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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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원판사진을 쓰던 당시엔 약품을 제대로 써서 현상하고 연필로 수정하는 기술이 얼마나 좋으냐에 따라 사진사 등급이 결정됐다. 특히 인물사진은 주름살을 없애고 자연스럽게 고쳐야 '그 사람 기술 좋다'는 소리를 들었고, 그게 곧 손님으로 연결됐다고 한다. 또 붓글씨로 사진아래에 '○○기념'이란 문구로 멋지게 써넣어야 했다.

시골집마다 마루 바람벽 위에 액자에 넣어진, 지금은 빛바랜 환갑·돌기념 사진들이 그렇게 김 사장의 솜씨로 만들어졌다.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고생했지만 돈버는 재미로 힘든 줄도 몰랐다고 한다. 사진기술을 배우겠다고 머문 기사들도 1982년도까지는 한두 명씩이나 있었다.

흑백사진 원판, 그리고 조명으로 쓰였던 전구다.
 흑백사진 원판, 그리고 조명으로 쓰였던 전구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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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는 그냥 밥먹고 살 정도 됐고, 70년대는 그보다 나았어. 도민증도 세 번인가 바뀌어 증명사진을 많이 찍었고. 또 그 때는 일찍 죽으니까 환갑사진은 꼭들 찍었단 말야. 그리고 돌사진, 영정사진 등등 밤새우며 사진을 말리는 날이 많았어. 가장 재미있던 시절은 아무래도 80~90년대야 칼라필름이 나오고 운동회와 소풍, 동창회 모든 행사에 사진이 빠지면 안 됐으니까. 어떤 때는 행사 출장 나가서 카메라 가방에 돈을 담느라 카메라를 못넣을 정도였어. 대여하는 카메라도 30대나 있었지.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 내리막길을 탔고 디지털사진기와 핸드폰이 나오면서 끝났지뭐. 허허..."

김 사장이 보관하고 있는 사진관협회 발행 가격표를 보면 1965년도에 증명사진 50원, 반명함판 80원, 명함판 120원, 1982년엔 증명사진 2000원, 반명함판 3000원, 명함판 3500원이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 70년대초, 세 살던 미림사진관 자리(광시면 광시리 82-6번지)도 사들였다. 당시 48평짜리 기와집이었는데 32만 원 줬다고 한다. 그리고 10년 전 손님이 끊어지기 시작한 사진관터를 팔고 지금 사는 집(면사무소 아래) 한 켠에 컨테이너를 놓고 간판을 옮겨 달았다.

사진 한 장에 쌀 두가마니

52년 세월 사진관을 하며 에피소드도 많았다.

"한 번은 광산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현장사진 부탁받고 갔다가 조명 불꽃이 튀어 시신이 보관된 천막을 태우기도 했지. 내 밑에서 일하던 기사는 환갑사진 찍다 초가삼간을 태울 뻔한 적도 있고…. 그 때는 화약과 마그네슘을 터트려 조명을 만들었거든. 한 손으로 조명을 터트리고 한 손으로 셔터를 누르는데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해. 연기가 나면서 번쩍하고 밝아지면 그 때 셔터를 누르는 거야.

또 한 번은 장곡(홍성군)에서 노인네가 객사를 했는데 지서에서 연락이 왔어. 사진 좀 찍어 달라고. 연고자가 없어 누군지를 모르니 매장하기 전에 사진을 찍어 놔야 하거든. (경찰이) '사진값이 얼마냐'고 해서 '쌀 두가마니 값만 내라'고 했지. 서로 잘 알고 지내니까 농담을 한 거야. 그 땐 관공서 부탁받고 사진 찍어주면 거의 공짜였어. 아 그런데 한참 후에 사망자 가족이 나타났는데 어마어마한 부자야. 사진을 보고 아버지인 것을 확인했다며 진짜로 쌀 두가마니 값을 내놓은 거야. 시신을 매장했던 동네사람들에게는 신발도 사주고 정말 후하게 보답을 했어."

옛날 재미좋았던 일을 기억해 내며 그는 연신 사람좋은 웃음을 터트린다.

"또 수지맞은 얘기 좀 할까. 한 번은 광산에 있는 공기를 주입하는 기계가 고장이 났댜. 외국산인가 본데 이걸 사진을 찍어 보내야 하는데 사진을 찍어도 안 나온다는 거야. 나한테 와서 제대로만 찍어주면 사진값 100배라도 주겠다고 하네. 그만큼 급했던 거지. 우비를 입고 탄광지하로 까마득하게 내려가서 보니 렌즈에 습기가 차서 사진이 안 나왔던 거야. 렌즈를 닦아가며 사진을 찍는데 성공했고 약속대로 사진값도 충분히 받았지."

보기만 해도 정겨운 흑백사진들이다. 맨위사진은 미림사진관 김사장의 가족사진이고, 나머지 사진들은 수십년 전 찍은 것인데 찾아가지 않은 사진들이다. 사진에 그림을 넣는 당시 유행을 볼 수 있다. 혹시라도 사진의 주인공이 신문을 본다면 충남 예산 지역신문<무한정보>로 방문해 찾아가면 좋겠다.
 보기만 해도 정겨운 흑백사진들이다. 맨위사진은 미림사진관 김사장의 가족사진이고, 나머지 사진들은 수십년 전 찍은 것인데 찾아가지 않은 사진들이다. 사진에 그림을 넣는 당시 유행을 볼 수 있다. 혹시라도 사진의 주인공이 신문을 본다면 충남 예산 지역신문<무한정보>로 방문해 찾아가면 좋겠다.
ⓒ 김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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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을 하며 여행도 많이 다녔다. 전국에 있는 유명관광지 중 안 가본 곳이 없고 제주도도 수십 번을 다녀왔다. 학생들 수학여행에 동행한 덕분이다.

"정말 원없이 다녀봤네. 한 번은 큰 사고도 있었지. 49년 전(1967년) 일인데 신문에도 났지 아마. 합승차에 학생들 16명, 어른 4명 그렇게 타고 소풍을 가는데 예산읍내 영나다리 쯤에서 차안에 불이 났어. 차안에 실은 여벌 휘발유통에 불꽃이 튀어 삽시간에 화릉화릉 타는데 유리를 깨고 학생들 8명인가를 차안에서 끌어냈어. 1명은 죽고 나머지는 화상을 크게 입었지."

그 때 입은 화상 흉터라며 양쪽 손등을 보여준다.

쌀 두세가마니씩에 달하는 큰 돈을 주고 사진기계도 많이 장만했다. 꼭꼭 포장돼 창고에 보관했던 원판사진기계들을 꺼내놓고 지긋이 바라보는 김사장의 눈빛이 흐려진다. 젊은 시절 수만 번도 넘게 손길이 갔을, 고락을 함께한 기계 아닌가.

"나 죽으믄 다 없어질 것들이야…. 그냥 문 닫을 수도 없고 해서 집마당에(컨테이너를 놓고) 간판을 걸어놓긴 했는데 이제 사진 찍으러 오는 손님은 거의 없어. 그저 여권이나 면허증 사진 때문에 더러 오지. 그냥 심심풀이로 친구들과 차 한 잔 할 정도 벌어."

김사장은 예산군내에서 사진관을 열고 있는 1대 사진사 중 나이와 연륜이 가장 많다. 예산읍에는 최고 오래됐다는 평화사진관이 2대째 가업을 잇고 있고, 면단위에서는 덕산과 고덕에 한 두곳 있을 정도다. 삽교에는 3곳이나 됐지만 모두 간판을 내렸다.

아리랑·전원·남산·미도파(예산읍), 허바허바·제일·삼성(삽교읍), 서울·풍경·국제(덕산면), 현대·서울(대흥면), 진(오가면), 대술·신양·신암사진관…. 오래 전부터 하나둘씩 문을 내렸지만 많은 예산사람들 기억 한 켠에 사진관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사진관, #필름카메라, #흑백사진, #역사,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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