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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염소보다 힘이 세다
권세의 상호 거래와 쌍방 쟁탈이 치열한 격투기장이다
십일조 놓고 십일조 먹는 투전판이다...
돈 많은 사람들의 물질적 은혜로 충만하다
탐욕의 지엠오GMO육묘장, 핵발전소, 명품백화점이다

그곳은, 욕심쟁이들의 은밀한 비트다, 아지트다
이기주의자들의 프리메이슨 결사체다
넘치는 욕심과 돈을 대대로 가둬둘
큰 금고와 큰 건물을 간절히 기복한다
교회의 존립목적, 핵심 일상업무다
성직자로서 최우선 사명이자 본분이다

다른 업종보다 수익성과 성장성도 높은 편이다
투자가치도 매우 커서 교회 임직원의 재산증식, 신분상승에 기여한다
직업으로서 안정성과 지속가능성도 탁월하다
소득이 있지만 소득세는 없을 정도다
북한이나 재벌처럼 권력세습도 가능하다
설교는 선동과 협박의 기술만 좀 신경쓰면 된다
반성과 회개는 어린 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연구 결과, 미래창조과학의 정체는
신학으로 밝혀졌다
어쩐지 아무도 설명 못하더니 그럴줄 알았다
믿지 않는 일반국민사탄들은 눈치 챌 수 없었을 것이다
시중의 신학 교과서엔 한줄도 나오지 않는 진리다
큰 교회끼리 전승해온 치부책의 영업비밀이다
표지엔 바이블이라고 적혀있다

작은 교회, 당신더러 하는 말은 아니다

- 큰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정기석

'청와대'는 '정치의 신'을 믿는 정치교도들의 교회가 아닌가?
▲ 청와대 '청와대'는 '정치의 신'을 믿는 정치교도들의 교회가 아닌가?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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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민중의 아편인가, 진통제가 맞는가

"종교적 고난은 현실적 고난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난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독일의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종교는 아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대로 '통치자들이 민중을 우민화시키려는 마약'으로 '아편'의 의미를 해석하는 건 오독이라는 주장이 많다. 마르크스도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국가가 민중들의 눈물과 탄원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국가보다 더 큰 권위자인 신에게 호소하고 종교의 귀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아편'이라고 일갈했던 19세기 중반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아편은 일반에 보편하된 유일한 진통제였다. 물론 마르크스도 아편을 진통제로 복용했다고 한다. 당시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민중에게 아편은 독이 아니라 약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종교가 경제적, 사회적으로 비탄과 절망에 빠진 민중들을 위로해줄 수 있다는 의미로 종교를 아편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종교는 아편이 맞는가.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최소한 진통제효과는 발휘했는가. 한국민들의 고통과 절망을 위로하고 치유해주었는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종교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힘을 얼마나 보탰는가. 그래서 국민이 생사의 기로에 내몰렸을 때 종교는 국민의 손을 붙잡아 사지에서 구출해주었는가. 그때, 한국 종교는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전경련’은 ‘자본의 신’을 믿는 자본교도들의 교회가 아닌가?
▲ 전경련 ‘전경련’은 ‘자본의 신’을 믿는 자본교도들의 교회가 아닌가?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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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미션계학교 등 미군정 관료체제 3인방

민족경제학자 박현채씨와 나는 오늘날 불행한 한국사회의 씨앗은 '반민족적 친일파·숭미파 관료체제'라는 구조악에서 발아됐다고 확신한다. 이른바 '미 군정 관료체제 3인방'이다. 총독부 근무자 출신의 친일파 관료가 첫 번째다. 지주와 기업가 출신의 미국, 영국 등 유학파도 다수였다. 그리고 기독교 미션계 학교를 다닌 일부 기독교도도 빼놓을 수 없다.

박현채씨에 따르면, 일제는 1930년대부터 순수한 농민들의 소작쟁의, 순결한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를 모두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이라며 매도하고 잔혹하게 탄압했다. 이때부터 '반공'은 일제의 주된 선전자료로 악용됐고 수많은 기회주의적 친일단체들이 반공을 표방하며 새로 조직됐다. 이같은 기조는 미국인들의 군정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반공'으로 재미를 본 친일파 식민지 지배동조세력과 미군정은 어제의 적이 아닌 '오늘의 동지'로 동업자관계를 맺는다.

특히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공산주의자와 선동가들이 해방 후 조선의 평화와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며 치안유지 권한을 요구하자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기다렸다는듯 즉각 승인한다. 일본과 미국 두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조선 먹잇감을 놓고 '둘 다 이기는 Win-Win' 거래를 튼 셈이다. 이후 오늘날까지 ''반공', '빨갱이' '종북'이 한국을 지배하는 친일·숭미파들에게 저항 세력, 혁신 세력을 무차별 공격하는 전가의 보도처럼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1945년, 한국은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됐지만 이후 70년 동안 사실상 독립되지 않았다. 친일파는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 국정농단의 주범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 처럼 일본경찰의 훈련을 받고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한국인 85%가 미 군정의 경찰로 살아남았다. 또 일본인 밑에서 훈련받고 일본에 충성을 다 한 친일파 관리들이 새 행정부의 대다수와 상부를 차지했다. 그리고 미 군정의 최고위간부들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처럼 미국에서 유학한 기독교도들이 영어회화를 잘 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해방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기독교도 등 '미 군정 공무원 3인방'들이 국정과 행정을 농단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박근혜 퇴진, 새누리당 해체'를 위한 전주 관통로 촛불집회
▲ 촛불집회 '박근혜 퇴진, 새누리당 해체'를 위한 전주 관통로 촛불집회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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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종교는 믿을래야 믿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종교는 믿지 않는다. 최소한 앞으로도 이변이 없는 한, 한국의 종교는 전혀 믿을 가능성이 없다. 한국인으로서 나는 영구적인 무신론자 또는 불신론자인 셈이다. 불행한 사회, 한국에서 신의 존재나 권능을 믿는 일이 몹시 힘겹고 어렵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신을 잘 모르겠다. 사람으로 살면서 신을 직접 보거나 만난 적도 없다. 신을 잘 모르고 믿지 않으니 남도 잘 모르고 잘 믿지 않는듯 하다. 도시에서든, 농촌에서든 마을 안에서 남과 더불어 사는 게 늘 불편하고 불안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신이나 종교를 믿느니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을 믿겠다는 입장이다. 차라리 신의 본질이나 실재의 참모습을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 같은 정도의  이기적이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주제나 경험으로는 도저히. '본질적 실재는 신앙의 영역'이라는 임마뉴엘 칸트의 불가지론도 사실 잘 이해되지 않는다. 결국 신앙 또는 종교의 본질적 실재 자체가 나로서는 거의 불가해하거나 불가지한 것이다.

혹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가, 교회나 성당이나 절에 나가는 이유가 자기 위로와 치유를 원하기 때문인가. 종교에 기대하는 효능이 평화와 행복감 따위인가. 더 솔직히 털어놓자면 그저 기복인가. 만일 그렇다면 다행이다. 나는 굳이 주일에 일부러 성전에 출석할 필요가 없다. 굳이 설교를 듣거나 경전을 외우거나 의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산책, 수면, 여행, 독서, 작문, 음악이나 그림 감상 등 사소한 일상 생활 속에서 충분히 위로받고 치유받는다. 특히 작은 마을 안에서라면 적은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평화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종교공동체라는 조직과 제도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마을공동체 안에서 '자기만의 신'으로부터 더 큰 종교적인 효능을 얻을 수 있다. 그 이상의 거룩하고 경건한 종교의 효능과 필요성은 나로서는 불가지하고 불필요하다. 따라서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종교의 내용은 애매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종교는 오히려 자신만의 자율적인 현실 영역과 힘을 가진 어떤 실체"라는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주장이 어느 종교학자의 교리보다 더 믿음이 간다.

독일 오토보이렌의 성스러운 바로크양식의 ‘바실리카 성당’
▲ 바실리카 성당 독일 오토보이렌의 성스러운 바로크양식의 ‘바실리카 성당’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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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람사우의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평화로운 시골교회
▲ 람사우교회 오스트리아 람사우의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평화로운 시골교회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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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마을을 믿고 귀의하려는 종교인들

다만, 신은 믿지 않지만, 종교는 믿지 않지만 농촌마을로 귀의하려는 종교인들은 믿는다.  이른바 '생명평화영성 공동체마을'이 이들이 그리는 피안의 그림이다. 자연친화적인 삶, 농업에 기반을 둔 삶, 마을을 이루는 삶을 대전제로 한다. 기술문명이 발달하면서 자연을 거스르는 삶을 살아왔다면 이제는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자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단 다른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는 것이다. 목사와 신부와 스님이 서로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며 한데 어울린다. 모든 종교가 그 가르침의 핵심으로 들어가면 차이보다는 같음이 더 많다는 논리이자 각성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가난하다. 자본의 신은 믿지 않는다. 가난해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농촌마을은 나눔과 섬김의 밥상공동체, 원시 기독교공동체, 생태영성 공동체 등의 가치와 비전을 공유하는 곳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생태영성을 기반으로 한 지역순환 마을이다. 개발을 최소화하고 자신이 살 집은 자기 손으로 생태적으로 건축하는 것이다. 또 생태순환농업을 기반으로 자급자족하는 마을을 지향한다. 무엇보다 신뢰를 기반으로 교육하는 마을교육공동체다. 특히 종교, 지역, 이념을 넘어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서로 협동하고 연대하는 상생마을이다.

전남 영광 백수읍에 가면 그런 마을을 볼 수 있다. 소태산 대종사가 원불교를 창시한 성지다. 소태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마을 앞 개펄을 막아 농토로 만든 간척사업이다. 제자, 신도들과 함께 5만평 200마지기의 논·밭을 일구었다. 그 너른 들을 '정관평'으로 부르며 평화 안락한 낙원세계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나타냈다. 이 정관평 논·밭 130마지기는 원불교 교무들이, 70마지기는 주민들이 나누어 공동으로 유기농사를 짓고 있다.

신도 믿고, 마을도 믿는 종교인들은 자연과 인간, 생태와 문화가 어우러진 삶, 바로 그 삶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마을을 만들고자 한다. 환경을 보전하고 지속가능한 삶을 구성하고 지구 생태계를 살리고자 하는 목적이다. 누구나 신을 의심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기꺼이 믿을 수있는 복지낙원을 그리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을 갈구하고 있다.

원불교가 창건된 영광 영산성지의 생태평화영성 공동체마을
▲ 영산성지 원불교가 창건된 영광 영산성지의 생태평화영성 공동체마을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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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불행사회, 한국 : 한국인은 불행하다. 한국인은 태어나고 자라고 먹고사는 조국에서 사는 게 불안하고 불쾌하다. 위험하다. 주관적인 기분이나 감정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처해있는 현실이다.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자살률은 부동의 1위다.
한국인은 서로 믿지 않는다. 협동하거나 공유하지 않는다. 사회적, 정치적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가 자꾸 편을 가른다. 남과 북, 경상도와 전라도, 강남과 강북이 자꾸 금을 긋고 벽을 쌓는다. 사용자와 노동자, 선생과 학생, 갑과 을이 서로 반목하고 질시한다. 그래야 겨우 나 혼자라도 먹고살 수 있다.
그렇게 살다보니 한국인은 힘들 때 의지할 친구나 동료 하나 없다. 국가와 정부의 책임과 의무는 개인과 가계가 온통 짊어지고 있다. 대의정치와 민주주의는 조롱당하고 능멸당하고 있다. 일상 생활에서 불법과 반칙이 얼마든지 승소한다. 조폭도 언론과 방송을 소유하고 활용한다. 전문가와 현자는 없고 사이비와 양아치만 난무한다. 친일파와 독재자의 후손이 되려 도덕과 정의를 정의하고 노래한다. 거짓말과 모함도 우기면 진실로 인정된다.
한국 사회에서 정신은 잿빛으로 타락하고 물질만 금빛 찬란하다. 공공성과 공동체는 소멸하고 이기주의와 패거리만 득세한다. 무기력증과 모멸감과 복수심이 일상을 지배한다. 신자유주의 천민자본주의의 완전무결한 표본이다. 불량한 한국은‘불행사회’다. 참‘나쁜 나라’다. 한국, 한국인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않다. 공멸 직전이다.



태그:#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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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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