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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시내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유달산의 이순신 장군 동상
 목포 시내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유달산의 이순신 장군 동상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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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530.2m인 경북 의성 금성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死火山)이다. 185년, 신라와 조문국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 이 산에서 벌어진다. 물론 신라는 뒷날 삼국을 통일하여 우리 국사에 큰 이름을 남긴 강국이고, 조문국은 지금 그 이름을 아는 국민이 별로 없을 만큼 당시에도 약국이었으므로,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난다.

그런데 크게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지만 금성산 혈투에는 유명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노적봉 전설'이다. 노적봉 전설이라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목포 유달산에 남긴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 바로 그 노적봉 전설이 금성산에 화산 잿더미와 함께 묻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에 묻혀 있는 노적봉 전설

노적봉은 금성산 정상과 해발 670.5m의 비봉산 중간에 있는 봉우리이다. 조문국 왕은 이 봉우리를 짚으로 덮어 군량미가 충분한 것처럼 신라군을 속였다. 또, 흰 빛깔이 나는 흙을 계곡 물에 풀어 쌀뜨물처럼 보이도록 하는 방법도 썼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목포 노적봉에 적용했던 것과 대동소이한 속임수를 조문국 왕은 1400여 년 전에 사용했던 것이다.

신라와 조문국 사이의 전쟁 때 노적봉 전술이 구사되었던 경북 의성 금성산
 신라와 조문국 사이의 전쟁 때 노적봉 전술이 구사되었던 경북 의성 금성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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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조문국 왕이 신라 벌휴왕의 항복 요구를 거절하면서 시작되었다. 2천 명의 신라군이 조문국을 공격한다. 조문국왕은 금성산에 석성(石城)을 쌓고 저항하는데, 신라군은 숫자로 상대도 되지 않는 조문국 군대를 격파하지 못한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조문국 산성 안은 식량이 떨어져 간다. 그래서 노적봉을 만들어 신라군을 속였다. 신라군은 멈칫하였지만 물러가지는 않았다. 여기서 신라군이 물러났다면 조문국의 노적봉 설화는 후대에 더욱 빛이 났을 것이다. 싸움은 결국 조문국에 불리해졌고, 조문국 왕은 신라군의 대장과 결투를 하던 중 전사하고 만다.

안타깝지만, 실패로 끝난 조문국 왕의 노적봉 전술

안타깝지만, 조문국 왕의 노적봉 전술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조문국 왕이 생각해낸 노적봉 전술은 아주 멋진 계책이었지만, 처음부터 적국을 우습게 여긴 신라는 군량미가 산처럼 쌓인 노적봉을 보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조문국 왕은 절묘한 노적봉 계책을 창안하고도 적장에게 목숨을 잃었고,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노적봉이 유달산 앞에 우뚝 솟아 있다.
 이순신 장군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노적봉이 유달산 앞에 우뚝 솟아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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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하면, 이순신 장군의 노적봉 전술은 승리를 일구어 내었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또, 금성산 노적봉의 1/10 수준 높이밖에 안 되는 해발 60m 바위산이라는 데에도 큰 차이가 난다. 결론은, 적이 얕잡아본 조문국 왕에 비해 이순신 장군은 왜군들이 너무나 두려워 해온 불세출의 영웅이었기 때문에, 왜소한 노적봉으로도 목포에서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목포시청 누리집이 간략하게 요약해서 소개하고 있는 노적봉 전설을 읽어본다. 

'노적봉은 해발 60m의 바위산에 불과하지만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호국혼이 담겨 있다. 정유재란 때 12척의 배로 불가능해 보였던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동안 조선의 군사와 군량미는 턱없이 부족하여 바로 왜적이 쳐들어온다면 함락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때의 노적봉은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유달산 앞바다에 왜적의 배가 진을 치고 조선군의 정세를 살피고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은 노적봉을 이용하여 위장 전술을 펼쳤다. 노적봉 바위를 이엉(볏짚)으로 덮어 마치 군량미가 산처럼 많이 보이게 하고 새벽에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밥 짓는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들이 군사가 많은 줄 알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는 후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유달산 노적봉은 생김새가 마치 대장군의 얼굴처럼 생겼다. 노적봉 꼭대기의 울퉁불퉁한 암석 능선은 마치 대장군이 머리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노적봉은 유달산 중턱의 이순신 장군 동상과 마주보며 서 있다. 장군의 동상이 응시하고 있는 바다 쪽 내리막 중턱에 노적봉이 불끈 솟아 있고, 그보다 한참 아래 바다에서 왜적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조선군의 군량미를 쳐다보고 있는 광경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풍경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노적봉에서 내려와, 계단을 올라 장군의 동상을 바라보며 올라간다. 장군은 금세라도 긴 칼을 뽑아들 듯한 자세로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서 있다. 동상 받침돌에는 '忠武公(충무공) 李舜臣(이순신) 將軍像(장군상)'이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다.

유달산 노적봉의 상단 모습. 대장군이 머리를 젖힌 채 하늘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유달산 노적봉의 상단 모습. 대장군이 머리를 젖힌 채 하늘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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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적봉을 등지고 바라본 유달산, 계단 위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인다.
 노적봉을 등지고 바라본 유달산, 계단 위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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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에서 조금 높은 곳에 문화재자료 138호인 오포대(午砲臺)가 있다. 이는, 오포가 아니라 오포를 쏘았던 자리가 문화재라는 뜻이다.

오포는 정오포(正午砲)의 준말이다. 조선 시대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는 시계를 가진 사람이 드물었으므로 관청에서 낮 12시에 맞춰  포를 쏘아 정오를 알렸다. 오포는 포탄 없이 화약만 넣어 쏘았는데, 전쟁 도구가 생활 도구로 이용된 특이한 면모를 보여준다.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천자총통으로, 왼쪽에 노적봉이 보인다.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천자총통으로, 왼쪽에 노적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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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는 1909년 4월부터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온 조선 대포로 오포를 쏘았다. 그 후, 1913년에 8월 포를 일본야포(野砲)로 바꾸었다. 지금까지 오포를 쏠 때 사용했던 조선대포는 송도신사(동명동)에 보관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 때 둘 다 녹여서 군대 무기를 제작하는 데 보태기 위해 공출되었다.

전라남도는 1986년 11월 8일 유달산의 유서 깊은 오포대를 문화재자료 138호로 지정했다. 1988년 12월 목포애향협의회가 오포대의 문화재 지정을 기념하여 1609년에 제조된 천자총통(天字銃筒)과 후대의 차륜식(車輪式) 포가(砲架)를 오포대 자리에 복원했다.

천자총통 발사 체험을 해볼 수 있는 유달산
 천자총통 발사 체험을 해볼 수 있는 유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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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포대 외에도 유달산에는 특별한 전쟁 체험 현장이 있다. '목포 유달산 체험 프로그램'의 한 가지로 실시되는 '천자총통 발포 체험 현장'이 바로 그것으로, 오포대보다 좀 더 높은 곳에 있다.

천자총통은 최무선이 고려 말엽에 제작한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발전시킨 화포이다. 이름에 '하늘 천(天)'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대포 중 가장 큰 총통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천자총통 발포 체험은 매주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 축제 기간의 10시∼13시에 실시된다. www.skygun.kr 또는 www.mokpo.go.kr에 사전 예약한 팀만 참가할 수 있으며, 참가비는 팀당 2만 원이다.

목포진 터에 복원되어 있는 청사의 모습
 목포진 터에 복원되어 있는 청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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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라는 이름은 목포시 만호동 1-55(도로명주소: 목포진길 11번길 1-5) 일원에 자리잡고 있었던 목포진(木浦鎭)에서 왔다. 목포진은 조선 시대 수군 진영 중 한 곳으로, 1439년(세종 21)에 처음으로 설치가 결정되었다. 그때 목포라는 이름이 세상에 출생신고를 했고, 그 이후 줄곧 이 지역의 이름으로 알려졌다.

목포진은, 진의 우두머리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진이라고도 불렀다. 지리상으로 목포는 영산강 하구를 안고 있고, 바다로 연결되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 호남과 경상 남부 지역으로 통하는 세곡(稅穀, 세금으로 거둔 곡식) 운반로로 사용되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목포는 조선 초기부터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또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세종 21년에 설치 결정된 목포진, 오늘날 목포 지명의 시초

하지만 조선 시대 초기에는 만호 등 수군 장수들이 내륙에 성을 쌓고 근무한 것이 아니라 배에 탄 채 이동을 하며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즉, 세종 21년에 목포진 설치가 결정되었다고 해서 즉시 축성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목포진에 성의 면모가 갖춰진 때는 1502년(연산군 8)으로 전해진다. 문헌에 따르면 당초 목포진성의 규모는 석축의 둘레가 1306척(약 392m), 높이 7척 3촌(약 2.2m)이었으며, 우물과 못이 각 1개소씩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702년(숙종 28) 무렵에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기 때문에 화재 이전의 자료가 남아 있지 못한 형편이다.

목포진은 설치 이후 줄곧 한반도 서남해를 방어하는 군사 요지로 역할에 충실했지만 1895년(고종 32) 폐지되었다. 그래도 건물은 부수지 않아 개항 이후 일본영사관 등지로 활용되다가 결국 목포진 유적비만 남게 되었는데, 2014년 들어 일부를 복원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다. 문화재자료 137호이다.

목포진 터를 알리기 위해 세워진 빗돌
 목포진 터를 알리기 위해 세워진 빗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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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진 터 안에는 비석도 세 기 남아 있다. 그중 가장 왼쪽의 비는 그 오른쪽에 건립되어 있는 두 빗돌을 설명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빗돌은 두 기인 셈이다. 당연히, 맨 왼쪽의 빗돌에 새겨져 있는 안내문부터 읽어야 한다. 맨 왼쪽 비석에는 '이 두 석비는 왜적이 우리나라의 민족혼을 말살하고자 당(목포진) 청사의 뒤뜰에 감추어 묻었던 바 다행히 발견되었으므로 수군절도사 신공 및 만호 방공의 좋은 치적을 후인에게 영구히 전하고자 하노라'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굶는 백성과 군사들을 구호한 두 장수의 선정비

가운데 빗돌은 앞면에 '行水軍(행수군) 節度使(절도사) 申候(신후) *** 善政碑(선정비)', 뒷면에는 '癸未(계미) 三月(삼월)'이 새겨져 있다. 이름을 알아보기 어렵게 돌 표면이 마모되었다. 하지만 전라우수영지 등의 기록을 살펴볼 때 계미년에 활동했던 신씨 성의 수군절도사에는 신광익(申光翼)만 있으므로 이 비석은 수군절도사 신광익이 만호진의 굶주린 군졸들을 구휼한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세워진 비석으로 추정된다.

가장 오른쪽 비석은 앞면에 '行萬戶(행만호) 方公(방공) ** 德賑率(덕진솔) 善政碑(선정비)', 뒷면에 '己未年(기미년)'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 비는 1714년에 목포만호로 임명된 방대녕(方大寧)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한 덕을 기려 세워진 비석으로 확인된다.

목포진 터 경내에 세워져 있는 두 기의 비석과, 안내 빗돌(맨 왼쪽)
 목포진 터 경내에 세워져 있는 두 기의 비석과, 안내 빗돌(맨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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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진 터 바로 아래로는 영산강이 흐른다. 그런데 그 영산강 마지막 하류에는 강 아닌 '영산호'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바다와 바로 이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더 이상 강으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가, 영산호에 떠 있던 조그마한 세 개의 섬 삼학도도 지금은 뭍에 붙어 버렸다.

목포진 터 바로 아래는 목포 항만이다. 바다를 건너면 고하도 선착장에 닿는다. 선착장 정면 야산에는 이충무공기념비(유형문화재 39호)가 있다. 하지만 목포대교 개통 이래 모두들 차량으로 고하도에 드나들기 때문에 이충무공기념비는 아주 외딴 곳에 숨어버렸다. 아무튼 목포진은 영산강을 타고 내륙으로 침입하려는 왜적들이 없나 살피기에 아주 적격인 바닷가 높은 봉우리의 군사 진지였다.


태그:#노적봉, #목포진, #이순신, #유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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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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