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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개입 의혹으로 시작된 파문이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진 청와대발 뉴스 속보들은 온 국민을 경악케 했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정권은 법적·도덕적으로 타락한 정권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분노한 민심은 광장으로 향했다.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들까지도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다. 지난 19일 100만명 이어 26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5차 범국민행동'에 모인 시민들의 수는 주최 측 추산 190만여 명에 달했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은 거역할 수 없는 국민의 명령인 셈이다.

4·19 혁명을 부채질했던 한 권의 잡지

성난 민중의 촛불행진을 지켜보면서 새삼 한 권의 잡지가 생각났다. 4·19 혁명을 촉발시킨 잡지로 평가받는 <사상계>다.

4·19는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온 혁명이 아니었다. 이미 민심은 타락할 대로 타락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돌아서 있었다. 3·15 부정선거라는 결정적인 도화선을 통해 혁명의 불꽃이 타오른 것뿐이다. 그 불꽃이 더 큰 횃불로 이어질 수 있도록 부채질했던 잡지가 바로 <사상계>였다.

1953년 4월 창간된 『사상계』의 겉표지
 1953년 4월 창간된 『사상계』의 겉표지
ⓒ 장준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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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계>는 1953년 4월, 광복군 출신 장준하에 의해 창간됐다. 월간으로 발간하며 각계각층 명사들의 기고를 받아 시민들의 교양 증진과 계몽에 앞장섰다. 당시 학생·교수 등 지식인 계층의 필독서였다. 1970년 5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오적>(五賊) 시 게재로 인해 통권 205호로 강제 폐간될 때까지 <사상계>는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 비판에 앞장섰다.

권력을 쥔 이들에게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정권 차원의 탄압이 비일비재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는 <사상계>에 글을 기고한 함석헌과 발행인 장준하가 경찰에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경찰관들이 전국 서점을 돌며 <사상계>에 대한 강제 압류를 시도했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더욱 잔인한 탄압이 이뤄졌다. <사상계>를 대량 매입한 뒤, 다음 호가 나올 때쯤 일괄 반품을 반복했던 것이다. 재정 적자를 통해 씨를 말리려는 작전이었다. 오죽하면 <사상계>의 수난사를 회고하는 '사상계지 수난사'라는 글까지 나왔을까.

독재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상계>가 반독재투쟁의 펜을 꺾지 않은 데에는 사장이었던 장준하의 특별한 신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그는 광복군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군을 탈출해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맨발로 6천리를 걸어간 바 있다. 추운 겨울 대륙을 횡단하는 장정길 위에서 그는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이 길을 위해 나는 가련다. 나의 일생의 과정은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이정표의 푯말을 꽂고 이제부터 나를 안내할 것이다. 하나님이 날 기어이 그 길로 인도해주실 것이다" - 장준하 자서전, <돌베개> 中

광복군 시절 형성된 그의 신념은 훗날 <사상계>의 사시(社是)로까지 발전했다.

"모든 자유의 적을 쳐부수고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또다시 역사를 말살하고 조상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후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자기의 무능과 태만과 비겁으로 말미암아 자손만대에 누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이 역사적 사명을 깊이 통찰하고 지성일관 그 완수에 용약매진해야 할 줄로 안다" - <사상계> 창간선언 中

권력자들이 두려워했던 '권두언'

광복군 출신으로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광복군 출신으로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 장준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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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들이 <사상계>를 두려워했던 까닭은 권두언, 즉 머리말 때문이었다. 발행인 장준하가 매월 호마다 직접 썼던 권두언에는 부당하게 권력을 쟁취한 이들에 대한 비판이 가득했다. 그들은 장준하의 펜을 두려워했다. 더욱이 <사상계>는 4·19 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권력자들은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2016년 대한민국의 밤을 수놓은 촛불들을 보면서, 새삼 장준하가 피로 쓴 <사상계>의 권두언이 새롭게 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경구처럼, 과거 독재정권의 타락상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사상계>의 권두언은 국민을 우롱하는 권력자들에게 던지는 쓴소리에 가깝다. 장준하는 <민주주의를 기원한다>라는 제목의 권두언을 통해, 이승만 독재정권을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독충들'이라고 매섭게 몰아세웠다.

"어쩌다가 공직을 차지하게 되면 봉건관료의 악습을 노골적으로 발휘하여 백성을 대함에 오만불손하고 국법을 유린함으로써 특권의식을 만끽하고, 정실(情實: 사사로운 정)을 공(公)에 앞세우는 부류들이야말로 전민족의 여망인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독충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 <민주주의의 기원> (<사상계> 1956년 3월 호 권두언)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선 실세의 개입을 허용하며, 스스로 헌정질서를 유린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타락한 지도자의 곁에서 입신출세하는 자들을 두고서는 '오직 보잘 것 없는 아첨꾼·무뢰한이거나 쓸모없는 음모꾼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박근혜 정권의 타락상이 드러났음에도 '예수를 판 유다가 될 수 없다'며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한 여당 의원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위의 글이 쓰인 시점이 60년 전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시계는 여전히 그때에 멈춰있는 것 같아 참담하기까지 하다.

주권자의 관용은 미덕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교살

장준하의 쓴소리는 권력층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주권을 가진 국민들이야말로 각성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주권자의 관용은 미덕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교살"이라고 역설했다. 집권층의 폭주에는 그를 수수방관하는 국민들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왜, 어찌하여 오늘의 질곡을 용납하고 이 현실을 초래한 원인을 우리 주권자는 방관만 하였던가? 언제나, 오직 주권자의 권능만이 조국의 진로를 가리키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 그러하거늘, 집권층은 조국의 진로를 오도하면서 주권자의 나침반의 평형을 교묘히 교란시키고 있다. (···중략···) 주권자의 우(愚)는 조국을 난파선으로 침몰시키고 말 것이다" - <주권자의 관용이 민주주의를 교살한다> (<사상계>1967년 4월 호 권두언)

최근 한 여당 의원은 "촛불은 촛불일 뿐,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해괴망측한 발언을 쏟아냈다. 여전히 국민들을 개돼지 정도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힘든 발언이다. 국민의 공복이라고 하는 국회의원이 주권자의 정당한 의사표시를 우롱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항에서조차 체념하고 방관한다는 것은 스스로 노예되기를 자처하는 꼴이다. 장준하는 "당연한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을 예로부터 노예라고 했다"며 노예정신에서 벗어나라고 일깨운다. 우리에게는 불의한 권력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사실도 상기시킨다.

"오늘날 나라의 주인은 바로 우리들 각자 백성이요, 관은 우리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만든 기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관에 대해서 봉사를 요구할 권리가 있고 관은 이에 응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만에 일이라도 관에 있는 자 번문욕례(繁文縟禮: 법과 규칙이 까다로움을 이르는 말)의 구름 위에 앉아서 백성을 농락하고 법을 짓밟는 일이 있다는 이것은 본말을 전도한 사회적 반역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들의 퇴진을 요구할 권리를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 <민주주의를 기원한다> (<사상계> 1956년 9월 호 권두언)

박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민심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국민의 목소리를 겸허히 듣겠다"는 말과 달리 박 대통령은 '검찰 수사 거부'라는 카드를 내세우며 자신이 며칠 전에 한 말조차 뒤집었다. 이제는 내부에서조차 회의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위 몇 번으로 물러나겠느냐"는 것이다. 체념하는 군중들에 대해서도 <사상계>는 정문일침을 날린다.

"군정을 부인하고 번의와 의혹의 집권을 비판하고 부정부패와 폭력에 항의한 민중의 소리가, 체념 속에서 침묵과 굴종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 오늘 이 집권체제의 정체를 정확히 직시하고, 민족사의 전진은 민중이 악한 집권에 대하여 준엄한 저항과 심판을 내리려는 결단을 선택할 때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저항의 자세를 적극화하자> (<사상계>1967년 2월 호 권두언)

'100만 촛불'은 100만 명의 장준하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5차 범국민대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올리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광화문 일대 가득 메운 '박근혜 퇴진' 촛불 2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5차 범국민대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올리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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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 17일, <사상계>의 발행인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를 두려워한 박정희 정권이 암살의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그의 숙적이었던 독재자 박정희 역시 측근의 총탄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박정희는 그냥 떠나지 않았다. 그가 남기고 간 유신독재의 망령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땅에 살아 숨쉬며 민주화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그러나 장준하 역시 그냥 떠나지 않았다. 그가 남긴 <사상계>의 권두언은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내뿜으며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각성하고 투쟁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현실의 장준하와 박정희는 존재하지 않지만 '100만 촛불'로 대표되는 100만 명의 장준하와 친일군사독재의 마지막 상징으로 남은 박근혜 정권이 세대를 이은 마지막 대결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2016년 11월, 우리는 지금 여느 때보다도 추운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기나긴 겨울이 지나면 기필코 따뜻한 봄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요, 역사의 진리다.

"참다운 민중세력은 언제나 역사에서 승리한다. 겨울이 영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낙관을 지니고 우리는 지칠 대로 지친 이 암흑에서 그래도 지금 일어나야 한다. 봄이 온다. 꽃이 핀다. 저항의 계절에 우리는 민중의 새로운 승리, 민족사의 거대한 긍정을 다짐하자" - <저항의 자세를 적극화하자> (<사상계> 1967년 2월 호 권두언)

<사상계>의 권두언에는 민주화의 길 위에서 우리 조상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과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한 감정들을 감내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일의 승리를 위해 내디뎠던 희망의 발자국들도 찍혀있다. 그러니 우리 역시 함부로 낙담하지는 말지어다. 지금 우리가 겪는 시련은 과거 독재정권 당시 민주투사들이 겪어야 했던 시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안심해서도 안 된다. 체념하고 방관함으로써 국민 스스로 주권자임을 포기하는 그 순간, 우리는 지금보다 더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시련을 청산하는 것은 고스란히 우리 후손들의 몫이다. 우리 스스로 후손들에게 독재정권의 유산을 떠넘기는 못난 조상이 될 수는 없다. 권두언의 행간 속에서 "어서 광장으로 나가 촛불을 들라"는 장준하의 준엄한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다.


태그:#장준하, #사상계, #권두언, #박근혜,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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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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