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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는 100만 촛불 뒤에 10대가 있었다. 똑소리 나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보며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도 정치적 의견을 내는 학생이 있었다. 지금처럼 거리로 나서진 못했다. 집단적인 행동을 생각하지 못하던 때였다. 10대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전교조 결성, 열광하던 10대 

전교조 결성 집회
 전교조 결성 집회
ⓒ 전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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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이슈가 됐던 사건은 전교조 결성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89년 5월 28일.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내걸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아래 전교조)이 만들어졌다. '더 이상 학교를 입시지옥으로 만들지 말자', '우리 아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자'며 선생님들이 거리로 나왔다.

아이들은 학교에만 오면 전교조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우리 학교 선생님 중 누구누구가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야기로 교실이 떠들썩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선두주자 중 한 명이었다. 새로운 교육이 시작될 것 같은 기대감으로 공부도 잘 되지 않았다.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 실패로 민주화가 후퇴되었던 시기. 선생님들은 전교조를 통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였다. 우리 학교 교사 중 99%가 전교조에 가입했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어디선가 쿵쾅쿵쾅 2층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반 소식통인 정숙이가 교실 문을 열며 숨이 찬 목소리로 외쳐댔다.

"교장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게 되셨대."
"그게 무슨 말이야?"
"해직되신다고!"

호흡이 멎은 것 같은 정적이 반 전체를 에워쌌다. 5초쯤 지났을까? 아이들이 한두 명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교장 선생님이 쫓겨나신다고? 아니, 무슨 잘못이 있다고?'

가슴에서 시뻘건 불덩이가 올라왔다.

'무슨 학교가 이래? 무언가 잘못됐어!'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상처받을 것을 우려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이 선생님들을 대신해 해직되시게 됐다는 소식은 학교 전체에 퍼져나갔다.

전교조가 결성된 데는 입시 위주의 교육, 열악한 교육환경, 국가의 교육독점, 관료적 교육행정 같은 구조적 문제가 버티고 있었다. 정부는 전교조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이 두 집단 간의 싸움은 전교조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하부조직을 구축하자 더 맹렬해졌다.

가입률 99%에서 0%로

마침내 정부는 7월1일 주동 교사뿐만 아니라 단순 가담자까지 탈퇴하지 않으면 전원 파면 해임 등 중징계를 시키겠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우리 학교는 전체 교원 중 대다수가 전교조에 가입한 상황이었다. 잘못하면 선생님들 대부분이 직업을 잃을 판국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전교조 가입 선생님들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탈퇴를 설득했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선생님, 선생님의 열정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그냥 두면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합니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피해를 봐서는 안 되지요."
"선생님들에게는 절대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제가 2년 후면 은퇴입니다. 재단 이사장님께는 정년을 앞둔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교육 현장에서 30년 세월을 보낸 백발노인의 읍소에 선생님도 마음을 움직였다. 교장선생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그리고 며칠 뒤. 월요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셨다.

"지난 7년간 여러분과 함께 지낼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자랑스러운 000여고 학생이 되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담임 선생님은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셨다. 선생님들은 서둘러 조회를 마치셨다. 썰물이 빠져 나가듯 순식간에 밀려 나가는 아이들을 교장 선생님은 끝까지 남아 바라보셨다. 그렇게 교장선생님은 떠나셨다.

'딸딸 외우는 공부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쓸 수 있는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분통이 터졌다. 일부러 교복 밑에 체육복을 입고, 머리도 아무렇게나 하고 다녔다. 여성답게 보이는 게 싫었다. 학교 도처에서 대학입시 준비로 짓눌린 아이들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사회상을 반영하듯 1989년 7월 28일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개봉됐다.

행동하지 않은 사람과 행동한 사람의 차이

전국동시다발 4차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가 19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개최되는 가운데,  청소년들이 청계천 영풍문고앞에 모여 시국대회를 열고 있다.
▲ '박근혜 퇴진' 청소년 시국대회 전국동시다발 4차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가 19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개최되는 가운데, 청소년들이 청계천 영풍문고앞에 모여 시국대회를 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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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나는 정치적 행동을 할 생각을 못 했다. 왜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내가 한 일이라곤 비판하다가 절망했고 방황한 일뿐이다.

촛불을 든 아이들 얼굴 위로 27년 전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행동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행동 했다. 나와 다른 경험을 한 10대들은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무엇을 보고 겪었을까?

중앙일보 11월 22일 자에는 촛불집회에 참여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담았다. 

"소위 '최순실 증후군'으로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광화문에 나가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보고 희망을 가졌다." (김혜수)
"우리나라가 이렇게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였나 실망하고 있었는데 시민의식을 보고 '아직은 괜찮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영일)
"국가에 대한 맹세에 나오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라는 마음이 샘솟았다."
"우리 다음의 '국정교과서 세대'가 걱정된다. 우리 세대에선 안 되더라도, 다음 세대는 조금 더 평등한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다." (변아름)


태그:#10대 정치참여, #박근혜대통령하야, #최순실국정농단, #전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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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밥 대표이자 구술생애사 작가.호주아이오와콜롬바대학 겸임교수, (사)대전여민회 전 이사 전 여성부 위민넷 웹피디. 전 충남여성정책개발원 연구원. 전 지식경제공무원교육원 여성권익상담센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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