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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시민기자는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입니다. [편집자말]

이 기사 한눈에

  • 15일부터 중구 저동의 세월호 특조위 사무실은 참사 규명에 있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빈 공간이 된다.
  • 그러나 참사의 온전한 규명 작업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많은 조사관들이 YMCA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텅 비어버린 특조위 사무실 사진
 텅 비어버린 특조위 사무실 사진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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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오후 5시, 100만 인파에 힘을 보태기 전 필자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세월호 특조위' 사무실을 찾았다. 앞으로 평생 살아가면서 이처럼 중요한 일을 또 하게 될 수 있을까. 요즘과 같은 사회적 분위기로 보아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여망이 또다시 이 공간의 불을 밝히지 않을까 싶어서일까, 아니면 그저 사무실에서 100만 대오가 모이는 장엄함을 한 눈에 내려다보고자 하는 마음일까. 땅거미가 가라앉을 어스름한 초저녁, 그렇게 사무실의 불을 밝혔다.

최근 여러 차례 보도되었듯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을 목적으로 꾸며진 7층의 공간은 주인을 잃은 책상들만 덩그러니 남아 그 처지를 외로이 증명하고 있었다. 사실상 사무처는 파견공무원들의 주도로 9월초부터 정리되고 있었지만, 일부 별정직 조사관들이 끝까지 남아 강제 폐쇄조치에 저항하고 있던 중이었다. 12일엔 이미 그런 조사관들의 자리마저 질서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리 급해서.

저들이 깨끗하게 밀어버린 그 자리들을 보고 있자니 지난 1년의 활동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모든 것을 다 규명하고야 말겠다는 자신감들이 뭉쳐있는 공간이었고 동시에 현실적 한계를 가장 무겁게 느낀 공간이었다. 주관적 의지와 객관적 환경 사이에서 자라나는 회의감에 더해 쉬지 않고 들어오는 특조위에 대한 마타도어는 조사관들에게 두 가지의 선택을 하게끔 강제했다. 강철이 되거나 탈락하거나.

모든 공간은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은 대개 어떤 공간에 들어설 때 분명한 목적성을 갖는다. 구청, 은행, 세무서, 병원, 교회 등 일상에서 마주치는 공간이 모두 그렇다. 2015년 1월 서울지방조달청에 세월호 특조위 설립준비단이 사무처를 마련했을 때의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당시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만은 그것을 꿰뚫어 봤던 것일까. 그의 '세금도둑' 발언은 특조위의 설립준비를 거의 반년 가까이 지연시켰다.

조사관들이 채용되어 그 공간에서 '세월호'를 주제로 조사기획을 하는 것 자체가 정권에게는 눈앞의 폭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 아무도 '7시간 조사'를 주장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이미 '방어'에 들어가고 있었다.

2015년 7월 27일 별정직 조사관들이 처음 출근한 이후 특조위라는 공간은 그야말로 격랑을 겪었다. 특조위 활동의 주도권을 확보해 정부여당의 의중을 관철하고자 하는 여당 추천 위원들의 활동이 지속되었고, 일부 파견직 공무원과 별정직 공무원이 그에 부화뇌동하는 모습이 여과없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2015년 7월부터 2016년 9월까지 '세월호 특조위'를 키워드로 하여 온라인 검색을 해보면, '세월호 특조위'라는 주제가 얼마나 뜨거운 감자였는지 현실감 있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퇴진과 세월호 7시간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4.16특조위 조사관모임'은 지난 4일 오전 광화문 세월호광장에서 기자회견이 열어 박근혜 대통령 조사를 촉구했다.
 '박근혜 퇴진과 세월호 7시간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4.16특조위 조사관모임'은 지난 4일 오전 광화문 세월호광장에서 기자회견이 열어 박근혜 대통령 조사를 촉구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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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조위가 어떤 비난의 여론에서도 자유로운 '선의(善意)'의 영역에만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세금을 배정받는 국가기관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주장할 수 있는 결과물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제출되어야 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검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세월호 특조위 방해史'에 가깝다. 까놓고 말해 세월호 특조위를 대하는 태도에는 그렇게 '합리적'이고 '섬세했던' 이들이 '순실예산'에는 얼마나 관대했던가.  

11월 12일 오후 8시, 100만 인파속에서도 세월호 유가족들의 모습은 더욱 부각되었다. 그간 안산과 세월호 특조위가 있던 중구 저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여론이 광장으로 다시 폭넓게 확산되었다. 국민들은 미궁 속에 빠져버린 참사의 진상규명에 목말라 있었고, '대통령의 7시간' 규명은 여전히 폭발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 역사엔 정사(正史)만이 아니라 야사(野史) 역시 큰 의미를 갖는다. 작성의 주체도 근거도 확인하기 어려운 정감록이 조선시대 민중들에게 실제적 의미로 다가가 변혁의 흐름을 만들어냈듯, '대통령 7시간'의 의혹 역시 단순한 의혹을 넘어 세상을 바꾸는 현실적 힘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15일부터 중구 저동의 세월호 특조위 사무실은 참사 규명에 있어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빈 공간이 됐다. '세월호 특별법' 해석에 대한 기나긴 줄다리기와 특조위 활동 지속에 대한 여망도 이제 이 공간에서는 종언을 고했다. 이 공간은 이제 다른 의미의 공간으로 쓰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사의 온전한 규명 작업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많은 조사관들이 YMCA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한 목적에 따라 그곳은 누군가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온전한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쓰이길 조사관의 한 명으로서 기원한다.


태그:#세월호 특조위, #김재원, #정감록, #세월호 7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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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생기면 항상 펜을 잡는 자유기고가. 시민단체 흥사단에서 이사로 활동했으며, 최근까지 국회 정무위원장 비서관으로 일했습니다. '근거있는' 소통의 공간을 열기 위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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