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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터졌다. 15일 JTBC 뉴스룸은 지난 2011년부터 박근혜 대통령이 가명 '길라임'으로 차움병원 VIP시설을 이용했다는 뉴스를 타전했다. '길라임'은 드라마 <시크릿가든> 여주인공 이름으로 알려져 더 큰 화제가 됐다.

방송 이후 '재간둥이' 누리꾼들의 깨알같은 패러디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후속 보도도 차고 넘쳤다. 국민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놀라움을 넘어 황당한 뉴스들을 계속해서 마주해야 했다. 이와중에 한 시인이 떠올랐다. '이런 뉴스에 그는 어떤 댓글을 달까' 궁금했다. 뉴스를 보며 든 생각을 시로 지어 댓글을 단다는, '댓글 시인' 제페토 말이다.

<그 쇳물 쓰지 마라> 표지
 <그 쇳물 쓰지 마라> 표지
ⓒ 수오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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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시인 없는 시 낭독회가 열렸다. <프레시안>이 수오서재와 함께 제페토 시인의 시를 낭송하는 모임을 연 것.

서효인 <릿터> 편집장(시인)의 사회로 서울 마포구 레드빅스페이스에서 열린 이날 모임에는 8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해 그의 대표적인 시 '그 쇳물 쓰지 마라'와 '그녀에게 천국을' 등 12편의 시를 낭독하는 시간을 보냈다.

정체를 드러내길 원치 않았던 시인이 독자들에게 남긴 편지가 낭송되기도 했다.

'모든 일은 7년 전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힌 시인은 '29살 젊은 노동자가 쇳물을 녹이는 전기로에 빠져 숨졌다는 기사'를 읽은 것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했다.

'얼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던 시인은 '문득 쇳물이 어떤 식으로든 사용되어 제품이 된다면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 '막연한 바람을 담은 댓글'을 시로 썼는데 그게 바로 '그 쇳물 쓰지 마라'다.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그 쇳물 쓰지 마라>

이 댓글은 순식간에 누리꾼들을 통해 흘러나갔고, 이 경험을 통해 시인은 '글쓰기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글이 갖는 힘과 의미를 처음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시인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 형식의 댓글 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그러길 7년. 시인은 그동안 인터넷 뉴스에 달았던 댓글을 모아 책 <그 쇳물 쓰지 마라>를 지난 8월 발간했다. 지난 낭독회 날 독자에게 남긴 편지에서 시인은 '마음 가는 대로 쓰고자 했지만 슬프게도 매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픈 이들의 사연들이었다'고 토로한다.

그렇게 쓴 시가, 혼자 살던 50대 남자가 숨진 지 10여 일 뒤에 발견된 뉴스를 보고 지은 '명복을 빌며', '남는 밥 좀 주오'라고 생활고를 호소하며 죽어간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그녀에게 천국을',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씨 부고 소식을 듣고 쓴 '마중', 소풍가고 싶다던 여덟살 딸 때려 숨지게 한 새엄마 뉴스를 보고 지은 '소풍' 등이다.

시인은 신문 사회면에 나오는 기사들은 대부분 '정부의 실정과 정치권의 무능 부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하며 '부와 권력을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정글과 다름없는 환경으로 퇴화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슬픈 것은 밀려난 절대 다수의 서민들이 부당한 착취를 자행하는 위를 향해 저항하기보다는 남은 재화를 놓고 서로를 해치려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독자들에게 쓴 편지에 밝혔다.

그럼에도 시인은 희망을 접지 않는다. 편지에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도 그 희망은 발견된다.

'포기하지 않고 악을 쓰며 할 말을 하는 한 우리의 희망은 꺼지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악인의 운은 언제까지나 유효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끝내 폭로된 스캔들처럼 말입니다.'

이는 시인이 끊임없이 댓글로 시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들 대답하고 싶어'하니까. '광활한 우주부터 가깝게는 비와 눈과 꽃과 낙엽같은 주변 풍경과, 친구와 가족 행인들, 더 들어가서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가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의문과 도통 이해되지 않는 모순들에 관해서'.

시인은 책 서문에서 '지금은 비록 아프고 쓸쓸한 댓글이 8할쯤 되지만 오래지 않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오면 사회면 뉴스를 떠나 조금은 나른하고 사소한 것들에 관하여 쓸 수 있을 게다'라고 썼다. 그렇다. 시인이 사회면 기사에 댓글을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나도 바라는 바이지만, 시인의 이런 시들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본다. 부디 그렇다.

내린다는 말보다
온다는 말이 좋다

너도 눈처럼
마냥 오기만 하여라

- 눈이 오네

* 제페토 시인의 편지 전문을 싣는다.  

세상 최후의 계절은 여름일 거라 생각했을 만큼 지난여름은 지독했습니다. 그랬던 여름이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물러갔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달아오른 얼굴로 헐떡이던 우리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선풍기를 닦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을의 중심부를 통과할 즈음 어처구니없는 시국이 제3의 계절처럼 찾아왔습니다.

초현실적인 사태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당황스럽고 언짢아서 몸살 앓는 이의 입맛처럼 일상이 까글거리고 거북합니다. 그런 와중에 낭독회라는 특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주신 수오서재 출판사 분들과 프레시안 관계자분들, 그리고 낭독회 참석을 위해 먼 길을 와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글쓴이로서 함께하지 못하고 인사글로 대신하는 점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책이 나온 지도 벌써 3개월째로 접어들었습니다. 미루었던 숙제를 끝낸 것처럼 후련한 기분이 없지 않지만, 한편에서는 정체 모를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치밀어 '이거 너무 터무니없는 일을 벌인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고민만을 거듭할 뿐 쉽게 결정 내리지 못하는, 요샛말로 결정 장애라고 부르는 제 성격으로 미루어, 출판사 편집자님의 진심 어린 설득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의무감과 욕심 그리고 양심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었을 테지요. 파편 같은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좋은 분들의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일은 7년 전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과를 끝내고 세상 돌아가는 일을 살필 겸 인터넷에 접속했는데, 메인 페이지에 충격적인 제목의 기사가 떠 있더군요. 충남의 한 제철공장에서 새벽 근무 중이던 29살 젊은 노동자가 쇳물을 녹이는 전기로에 빠져 숨졌다는 기사였습니다. 한 인간의 죽음을 전하는 것으로는 비정하리만치 짧고 건조했지만, 당시에 받은 충격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만큼이나 컸습니다.

도대체 왜? 라는 의문에 휩싸여 몇 번이고 기사를 읽어보았지만, 사람이 어째서 그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죽음을 맞아야 했는지 이해할 만한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얼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다가 문득 쇳물이 어떤 식으로든 사용되어 제품이 된다면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쳤고, 곧바로 막연한 바람을 담은 댓글을 써 올리게 된 것입니다.

청년은 부친의 나이 마흔두 살 얻은 늦둥이이며 이듬해 봄에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이었음이 후속 보도를 통해 알려졌지만 그런 사실은 고인의 부재를 더 분명하게 했을 뿐입니다. 그는 10만 원짜리 안전 로프, 안전 펜스가 갖추어지지 않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했고, 안전 교육은 형식적이었기에 그가 아닌 누구라도 죽음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3일 후 식은 쇳물에서 대퇴골 일부가 수습되었고 그것으로 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단서를 삼아 장례를 치러야 했으니 유족이 느꼈을 슬픔이란 짐작조차 하기 힘듭니다. 지금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유족 분들께 위로를 전합니다.

그날의 충격적인 사건과 짧은 댓글, 그리고 누군가가 퍼 나른 댓글에 대한 반향을 지켜보며 글쓰기라는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글이 갖는 힘과 의미를 처음으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새 계정을 만들고 시 형식의 댓글 쓰기를 시작한 것도 그 무렵입니다. 당시만 해도 어떤 글을 쓰게 될지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형식이 바뀌었을 뿐 이전처럼 마음 가는 대로 쓰고자 했지만 슬프게도 매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픈 이들의 사연들이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제가 머무는 곳이 그들이 머물던 고도에서 멀지 않았기에 그들의 일에 공감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니까요.

그렇게 사회면에 등장한 사건들은 대개 정치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정부의 실정과 정치권의 무능 부패는 어김없는 원인이 되어 사회면에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사각지대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고독사와 자살은 이제 충격을 주지 못할 만큼 흔하디흔한 뉴스가 되어버렸고 부와 권력을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정글과 다름없는 환경으로 퇴화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슬픈 것은 밀려난 절대 다수의 서민들이 부당한 착취를 자행하는 위를 향해 저항하기보다는 남은 재화를 놓고 서로를 해치려 한다는 것입니다. 약자가 더 약한 자를 모질게 대하는 사례는 아파트 경비원을 대하는 모습에서, 군대에서, 학교 선후배 사이에서 직장에서 흔하게 목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들 중 가장 약한 자가 세상을 버렸습니다. 그런 일들을 목도하면서 분노를 다스린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계절이 순환하지 않았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비가 내리고, 눈이 오고, 꽃이 피는 것이 모두 위로였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악을 쓰며 할 말을 하는 한 우리의 희망은 꺼지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악인의 운은 언제까지나 유효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끝내 폭로된 스캔들처럼 말입니다.

이쯤에서 왜 댓글을 쓰는가에 대해 궁금해하실 분이 계실 것 같아 예전에 있었던 일을 꺼내볼까 합니다. 학회지에 실을 인터뷰 일환으로 저에게 댓글을 쓰는 이유가 무어냐 물어온 학생이 있었는데 도무지 명쾌한 답이 떠오르지 않더군요. 결국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노라는 말로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고, 한동안 답을 찾기 위해 골몰했었습니다.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우리는 다들 대답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뉴스를 보면 뉴스에 대하여, 풍경을 보면 풍경에 대하여, 음악을 들으면 음악에 대하여, 대상이 무엇이든 그리고 대답을 요구받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거의 모든 대상에게 대답하고 싶어합니다.

감탄이든 푸념이든 칭찬이든, 노래든 연주든 시나 그림 또는 조각이든, 모두 응답의 방식이었던 셈이지요. 그런 점에서 매일 뜨거운 이슈를 던지는 뉴스를 보며 댓글을 쓰고 싶어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이일 것입니다. 종이 신문만이 있던 시절에도 신문을 읽고 혼잣말을 내뱉곤 했었지요. 그것이 인터넷 시대에 댓글로 바뀌었을 뿐 반응하는 인간의 본능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터넷 초창기에 존재하지 않던 댓글 시스템이 개발된 것도 반응하고 응답하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 대한 개발자들의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대상에 대해 내부에서 일어난 반응을 글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광활한 우주부터 가깝게는 비와 눈과 꽃과 낙엽같은 주변 풍경과, 친구와 가족 행인들, 더 들어가서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가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의문과 도통 이해되지 않는 모순들에 관해서, 중2병으로 치부되더라도 고민은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회전하는 믹서기의 내부처럼 뒤섞이고 요동치는 생각을 주체하지 못해 두통을 달고 살던 시절과 달리 지금은 글쓰기를 통해 생각을 끄집어 정리함으로 머리를 비우고 안정을 얻을 수 있으니, 글쓰기는 살아오면서 받은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입니다.

시를 공부한 적 없이 오로지 사유와 감각에 의지하여 써나가는 일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사는 게 시들해지고 더 이상 의문이 꼬리를 잇지 않을 때, 그래서 어떤 대상을 대하든 내부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날이 오면 자연스럽게 글쓰기는 중단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그런 날이 가급적 늦추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본의 아니게 진입한 세상에서 쓰고 남은 절반의 시간이 지루하지 않기를 바라니까요.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의 남은 날도 길고 기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분에 넘치는 호칭을 붙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 공간 귀퉁이에서 조용히 사라질 댓글을 타인과 나누기 위해 일일이 갈무리하여 옮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분들입니다. 덕분에 글이 널리 퍼졌고 출간까지 이어진 것이니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께 드리는 감사의 글로 인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감사합니다
일과 중에 눈치껏 읽었을 가자미눈과
후미진 곳까지 퍼 나르는 수고를 자청한 일과
번거로이 소감을 남긴 손들과
공감을 기다리며 상기됐을 순진한 뺨들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삶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약간의 면목이 생겼습니다

아아, 착하기만 한 사람들

2016년 가을 제페토 드림.


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수오서재(2016)


태그:#제페토, #댓글 시인, #쇳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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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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