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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문래동에서 부모님이 작은 구멍가게를 열었다. 작은 테이블 몇 개 놓고 라면도 끓여 팔았다. 새참으로 라면 먹으러 오는 손님들 대부분은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이었다.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을 지날 때면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던 기억이 난다. 어디선가 스멀스멀 다가오는 기름내와 땀내가 묘하게 섞인 냄새 때문이었다.  

혹여 고개를 돌리면 쇳가루가 내려앉은 듯 거무스름한 아저씨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웠다. 고개를 숙인 채 가게를 빠져나가느라 걸음을 재촉했다. 어린 깜냥으로도 그 모습 앞에서는 까닭 없이 숙연해졌다. 단단한 쇠를 절단하고 녹여내는 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듯했다.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우리 가족은 문래동을 떠났다. 세월이 변하면 사람 사는 골목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지하철역이 들어서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서 문래동은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했다. 그래도 아직 문래동에는 재개발의 바람이 미치지 않은 골목이 건재하고 있다. <문래예술공장>이라는 예술거리가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소식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이번 가을, 나는 문래동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곳에 들어선 책방을 찾아가려던 참이었다. 지하철 2호선 7번 출구로 나와 얼마를 걸었을까. 나의 유년시절을 보냈던 골목이 영화 세트장처럼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리둥절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안녕하세요!"라고 아는 척을 하지 않는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낯선 중년의 여자가 활짝 웃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길을 비켜섰다. 뒤이어 "고맙습니다"라는 짧은 인사말이 스쳐지나갔다.

문래동 공장 골목에서 요란스럽지 않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림책 식당>
▲ 책방 <그림책 식당>의 작은 간판 문래동 공장 골목에서 요란스럽지 않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림책 식당>
ⓒ 우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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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사라져가는 자전거 바퀴 아래로 쇳조각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형톱날 금속절단기에서는 깨알 같은 불꽃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중이었다. 마치 이 거리에 다시 온 것을 축복이라도 하듯이. 유년의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골목과 중년이 되어 거니는 문래동 골목은 크게 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여전히 그곳은 쓸쓸해보였다. 자기 몸보다 몇 배나 되는 철강을 손수레로 운반하거나, 입을 다물고 쇳조각을 주무르는 고된 노동의 시간들이 회색빛 거리에 화석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이런 곳에 그림책 책방이 있다니. 이상야릇했다. 큼지막한 책방 간판이라도 내걸었으려니 하는 예상은 빗나갔다. <그림책식당>이라는 간판은 보통 그림책 크기보다도 작았다.

1층 철공소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가니 2층에 거짓말처럼 작은 그림책 책방이 있었다. 이곳은 지난 봄 그림책 관련 기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다 우연히 발견한 책방이었다. <그림책식당>이라는 책방 이름에 저절로 웃음이 났다. 더욱 놀라웠던 점은 이 식당 주인이 그림책 작가 박정섭씨라는 사실이었다.

철공소가 즐비한 바깥 골목 사정과는 달리 책방 안은 의외로 고즈넉했다. <그림책식당>은 그림책만 파는 전문서점이자 함께 차와 음료를 즐기는 카페로 문을 연 지 벌써 5개월째다. 맨 처음 작업실을 구하려고 이곳저곳을 수소문 하다 우연히 이곳을 알게 됐다고 한다. 카페였던 이 공간의 장점을 살려 작업실과 서점의 역할까지 더해 복합적인 공간으로 재탄생된 것. 왜 <그림책식당>일까. 이 물음에 박정섭씨의 유쾌한 답변이 이어졌다.

"밥을 해먹듯이 일상적으로 그림책을 생각하고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고 싶었어요. 요리사만이 음식을 하지 않는 것처럼 누구나 그림책을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서는 그림책 작가를 '그림책 셰프'라고 불러요. 작가라는 무거운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개인적으로 저도 좋더라구요."

누구나 그림책을 요리하자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 <그림책식당>이었다. 마침 그날 들른 서점에서는 박근용 그림책 셰프가 노트북으로 그림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림책식당>은 그림책 작가들과 모여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방이자, 작업실이 필요한 작가에게는 개인적인 공간까지 제공한다.

책방 중앙에 마련해놓은 진열대에는 요즘 주목받고 있는 그림책과 보드게임이 전시되어 있다.
▲ <그림책 식당>의 내부 책방 중앙에 마련해놓은 진열대에는 요즘 주목받고 있는 그림책과 보드게임이 전시되어 있다.
ⓒ 우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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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작업은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남짓 정도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서 예전처럼 출판사에서 책을 많이 출판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한 권의 베스트셀러에 의존해 적자를 면해가는 출판구조는 더 이상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이니 한 권의 책을 출판하기가 여간 까다로워진 게 아니다. 출판사들이 대중적인 그림책만을 출판하려는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그 말인 즉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작가로서 성장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앞으로 그림책 작가로써의 삶을 언제까지 버텨낼지 작가들 모두의 걱정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출판시장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할 자구책이 필요했다. 요즘 박정섭씨는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다.

그 대책은 바로 1인 출판사. 작가의 개성을 살린 다양한 그림책이 세상에 빛을 보기위해서다. 작가 개인마다 스스로 책임지고 완성해가는 출판 구조이기 때문에 유통에 대한 합리적인 체계가 이루어져 인세에도 경제적인 혜택이 미칠 것이다. '작가-출판사-독자'가 하나의 순환 체계로 묶여져 그 파급효과가 클 거라고 기대한다. 당장 내년 3월부터 소량의 규모로 펴낼 출판물을 계획 중이다. 이에 대해 박정섭씨는 그림책 작가로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1인 출판사까지 확장하는 데에는 고민이 많았어요. 기존의 그림책 시장은 그 주제가 극히 제한적이거든요. 가령 호러 그림책은 출판사에서 쉽게 출판하기 어려운 편이에요. 아무래도 대형 출판사들은 대중적인 측면을 고려할 수밖에 없어요. 무엇보다 어두운 주제와 그림책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선입견 때문이죠. 그림책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그려내는 것에 있는데 말이지요."

앞으로 <그림책식당>은 1인 출판물을 판매하는 창구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원활한 그림책 창구로 거듭나기 위해 그림책을 접근하는 다양한 방식을 고심하고 있다. 문화행사나 그림책 기획 전시뿐만 아니라 가족단위의 그림책 수업 교실도 준비 중이다. 특히 어머니들이 그림책을 직접 만들어보기를 권장한다. 그림책을 만드는 경험은 실제 그림책에 대한 성숙한 이해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많지 않지만 책방지기가 나름대로 엄선해 놓은 그림책들이 진열돼 있다.
▲ <그림책 식당 > 에 마련된 책꽂이 많지 않지만 책방지기가 나름대로 엄선해 놓은 그림책들이 진열돼 있다.
ⓒ 우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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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 만이 아니다. 그림책과 보드 게임을 한 세트로 엮어 출시할 계획을 갖고 있다. 시중에 판매 중인 보드 게임은 일등을 가리는 내기 위주의 형식이지만, 새롭게 출시될 보드게임은 가족 모두가 스토리텔링 위주로 참여하는 방식이다. 그림책과 보드게임엔 닮은 점이 있다. 서로 배려하고 관계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데 탁월한 매개체라는 점이다.

더구나 그림책과 보드 게임은 아날로그 감성이 짙은 장르라면서, 박정섭씨가 직접 개발에 참여한 보드게임을 보여줬다. <이너보이스>는 점을 찍어 그림책을 만드는 일본의 <도시락 그림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원과 점으로 구성된 네 장의 카드로 나열하기, 겹치기 등을 통해 단어에서 문장, 이야기로까지 확장시키는 스토리텔링 게임이다.

이너보이스 게임을 하면서 박정섭씨는 '소문'에 관한 그림책을 생각해냈다. 바로 지난 9월에 출간된 <감기 걸린 물고기>다. 함께 보드게임을 출시할 계획이었는데, 사정상 그림책이 먼저 출간됐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당부하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었다. 딱 하나 있다고 했다. 책 제목만 기억하지 말고, 그림책 작가의 이름도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국내 그림책 작가의 인지도는 외국 작가들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란다.

<그림책식당>은 색다른 시도로 그림책에 대한 인지도를 넓혀 가기 위해 애쓸 것이다. 이 식당이 산으로 갈지 바다로 갈지 아직 구체적인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거대한 자본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을 자구책을 실험하는 공간이 될 것이다.

따뜻한 음식처럼 삶의 일용한 양식이 되기 위해 그림책 요리사가 만든 이야기와 그림이 보글보글 끓고 있는 곳. 그림책 책갈피 사이로 후루룩 냠냠 쩝쩝 소리가 어우러져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듯이 그림책과 만나는 곳. 문래동에 가면 <그림책식당>이 있다.

박정섭씨가 주문받은 원두커피와 차를 내어준다. 이곳 말고 편하게 티 테이블이 따로 마련돼 있다.
▲ <그림책 식당>에 마련된 작은 카페 공간 박정섭씨가 주문받은 원두커피와 차를 내어준다. 이곳 말고 편하게 티 테이블이 따로 마련돼 있다.
ⓒ 우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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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아쉽게도 <그림책식당>은 내년 3월까지 1인 출판사 준비로 당분간 문을 닫습니다. 그림책 행사나 전시회 및 수업이 있을 때에는 게릴라식으로 문을 엽니다. blog.naver.com/centerzone에 공지하오니 방문 시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방문을 희망하시는 분은 연락주시면 적극 환영합니다.



태그:#그림책 식당, #박정섭, #<감기 걸린 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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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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