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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2450미터 무로도평원
 해발 2450미터 무로도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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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 깎아지른 절벽 위로 열차가 달리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본 것은 지리산 천왕봉이다.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던 20여 년 전이니 천왕봉에 이르는 길은 참 쉽지 않았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편인 지리산 노고단쪽으로 걸어 올라 능선을 따라 계속 걸었다. 그것도 텐트까지 챙겨서 하루 종일 걷다 저녁이 되면 텐트를 치고 자고, 아침이 되면 다시 걸었다. 그렇게 2박 3일을 걸어 비로소 천왕봉에 닿을 수 있었다. 얼마나 뿌듯하던지 1915미터 비석이 있는 천왕봉 앞에서 자랑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 기록을 깨는 날이다. 오늘 우리가 갈 곳은 '일본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알펜루트다. 최고봉 다테야마의 높이는 무려 3015미터, 백두산이 해발 2744미터라고 하니 백두산을 훨씬 넘어서는 높이다. 오늘 우리의 목표는 비록 다테야마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해발 2450미터에 있는 무로도 평원이다. 해발 2450미터, 고도가 높아 고산증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는데 과연 무사히 갈 수 있을까 ?

알펜루트 종주의 출발지는 해발 475미터에 있는 다테야마역, 그런데 알펜루트 종주를 위해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차림새가 의아하다. 등산할 차비를 단단히 한 사람은 찾을 수 없고 그저 따뜻한 패딩 정도를 갖춰 입은 데다 신발도 간편한 운동화를 신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양복에 정장 구두를 신은 젊은 일본인도 눈에 띄었다. 저 차림으로 해발 2450미터에 도전한단 말일까?

해발 475미터에 있는 다테야마역에서 출발해 2450미터 무로도 평원을 거쳐 다시 하산하기까지의 총 능선의 길이는 무려 90여 km, 그러니까 도야마현에서 출발해 하산은 나가노현으로 하게 되는 대장정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차림이 이렇게 간단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이 산을 걸어서 넘는 것이 아니라 6개의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케이블카, 그런데 이름만 '케이블카'일 뿐 우리가 상상하는 케이블카는 전혀 아니다. 먼저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대기하는 곳부터 경사 30도 정도의 가파른 계단 위다.

다테야마역에서 타는 케이블카
 다테야마역에서 타는 케이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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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위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케이블카 내부도 계단형식으로 돼 있다. 그러니까 산의 경사면을 케이블카를 타고 그대로 올라가는 것이다. 케이블카도 좋은 풍광을 구경하며 가는 것이 아니라 거의 터널 속을 통과해 수직적으로 올라가서 갑갑한 느낌이 드는데 금방 목적지 비죠타이라역에 도착했으니 내리라고 한다.

내려서 보니 고도 977미터, 7분 만에 고도 500미터 쯤을 올라온 것이다. 글쎄, 경사 30도 정도의 산을 고도 977미터까지 걸어서 올라야 했다면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까? 그런데 7분이면 족하다. 

비죠타이라역에서는 고원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고 50여 분 동안 주변 풍광을 감상하며 편안히 앉아있으면 해발 2450미터 무로도 평원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 알펜루트의 감춰진 절경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시원하게 뻗어있는 삼나무를 비롯해 키 큰 나무들이, 울창한 봉우리들이 여러 개 겹쳐져 마치 산수화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19세기 다테야마를 중심으로 2000미터를 넘나드는 봉우리들이 90여 km나 길게 이어지고 있는 이 길을 오른 한 유럽사람이 스위스 알프스에 버금간다고 하여 "알펜루트"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계절마다 전혀 다른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매력을 뽐내는 알펜루트가 가장 곱고 화려한 단장을 하는 계절이 바로 가을, 찬란하리만큼 아름다운 가을단풍을 선보이는 시기는 아주 짧아서  그걸 보려면 절묘하게 시기를 잘 맞춰야 한다.

10월 중순, 산 아래쪽의 나무들은 아직 초록을 자랑하는데 올라갈수록 풍경이 달라진다. 중턱쯤에는 멀리 보이는 산세들이 기품있게 차려입은 여인네의 옷차림처럼 곱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사진에서 본 만큼의 절정의 모습은 아직 아니다. 좀 더 올라가야 볼 수 있을까?

다테야마로 오르는 길의 단풍
 다테야마로 오르는 길의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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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야마 오르는 길
 다테야마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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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차 350미터를 자랑하는 소묘폭포
 낙차 350미터를 자랑하는 소묘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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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를 더 오르자 장엄한 산세 한쪽을 용 한 마리가 힘차게 오르는 듯 흰 물줄기가 보인다. 일본 제일의 낙차를 자랑하다는 350미터의 소묘폭포다. 폭포가 멀어 소리까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 힘찬 모습만으로도 소리가 짐작될 정도로 쭉 내리 뻗어있다.

안타까운 것은 시선을 사로잡는 풍경들을 내려서 감상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차는 미련없이 목표를 향해 계속 달린다. 정확히 어느 정도 높이까지 올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들의 식생이 확연히 달라져 꽤 높이까지 올라왔음을 실감나게 한다.

나무들의 키가 겨우 무릎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이 곳은 12월부터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는 입산이 통제가 되는데 그때는 이 키 작은 나무들 위로 눈이 10미터 넘게 쌓인다고 한다. 추위도 추위지만 눈의 무게도 얼마나 무거울까? 그 혹독한 환경을 견디고도 살아남는 법을 터득한 키 작은 나무들이 한없이 기특하다. 

우리들 또한 누군들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다 힘듦을 견디며 산다. 그러니 겨우내 자신의 키를 넘기는 혹독한 눈더미를 견디고도 봄이 오면 다시 가지에 싱싱하고 푸른 생명을 피워 올리는 저 나무처럼 우리도 또한 기특하게 견디며 살아볼 일이다.

드디어 고원버스가 멈췄다. 해발 2450미터, 무로도 평원이다. 마치 서부의 평원처럼 황량하게 넓다. 주변에 보이는 건 온통 가파른 봉우리들이고 오직 버스노선 하나애 의지해 오르고 올라왔는데, 그 위에 이렇게 넓은 평원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내리자 일단 바람이 다르다. 세찬 바람이 확 몰려와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된다. 누구에게나 화려한 시절은 짧은 법, 이 곳은 단풍이 이미 다 지고 초겨울의 풍경이다.

해발 2450미터 무로도 평원
 해발 2450미터 무로도 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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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을 따라 걸어본다. 바람이 알싸하게 맵지만 견딜 만하다. 산악인들에게 왜 산에 가냐고 물으면 산이 거기 있어서 간다고 하지만, 이렇게 높은 자연의 품에 안겨 있으면 세상과의 거리가 확연히 느껴진다.

때로 살아가는 모든 일에 거리가 필요하지 않은가? 거리는 모든 것을 감정적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보게 해준다. 삶의 거리가 때로는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기도 한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좀처럼 확보할 수 없던 거리가 이렇게 높은 산 속에 있으니 실감이 난다. 그리고 거대한 자연이 건네는 위로가 들린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다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어. 10미터 눈무게를 견디면서 사는 나무도 있는데 뭐.' 

평원을 따라 걸으며 셔터 누르기에 바쁘던 일행들이 한두 명씩 두통을 호소한다. 고산병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최대한 몸의 움직임을 줄이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몸이 안 좋아 걱정을 하던 나는 정작 2450미터 고지에서도 끄덕이 없다. 예전부터도 그랬지만 영락없는 여행체질인가 보다.

마침 이 날은 날씨가 좋아 주변 알펜루트의 산세들이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가 오르지 못한 다테야마 최고봉도 선명히 보인다. 이 곳은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어서 11월말부터 이듬해 4월말 까지는 아예 입산이 금지된다고 한다. 5월 다시 길이 열려 이 곳을 찾아도 길 옆으로 남아 있는 눈이 4, 5미터는 된다고 한다. 봄과 가을의 풍경이 확연히 다르다고 하니 언제 기회가 된다면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5월에 다시 한번 오고 싶다.

하산길에 접어들어서도 교통편을 갈아타는 수고는 계속 해야 한다. 무로도에서 다이칸보까지는 트롤리 버스를, 쿠로베 타이라까지는 로프웨이를 타야 한다.

쿠로베댐으로 내려오는 로프웨이
 쿠로베댐으로 내려오는 로프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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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베 호수 주변 단풍
 쿠로베 호수 주변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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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프웨이가 우리나라로 치면 케이블카같은 것인데, 로프웨이를 타고 내려오는 이 구간이 알펜루트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해발 2316미터에서 1828미터까지 계곡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동안 창밖으로 절정을 이룬 단풍의 모습이 펼쳐져 탄성을 자아낸다. 어쨌든 해발 2000미터를 넘나드는 90km의 산세를 인간이 이룬 위대한 기술 덕분에 가뿐하게 종주하고 왔다.

다테야마에 가면 또 하나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바로 도야마 현 남서부 깊은 산간에 자리한 시라카와코 합장마을이다. 합장마을은 1995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이 됐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에 마을 뒤로 알펜루트의 수려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그 앞을 에메랄드빛 맑은 시내가 흘러간다.

시라카와코 합장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
 시라카와코 합장마을 앞을 흐르는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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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카와코 합장마을, 지붕이 합장할때 두 손을 모은 모양과 닮아서 붙혀진 이름이다
 시라카와코 합장마을, 지붕이 합장할때 두 손을 모은 모양과 닮아서 붙혀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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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장지붕
 합장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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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이 세계문화유산에 까지 등록된 데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더불어 독자적인 생활문화를 간직한 전통취락이라는 점이 한몫을 했다. 이 마을의 집들은 지붕이 마치 사람이 합장하기 위해 양손을 모은 것처럼 가파르다. 합장마을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이 마을의 지붕들이 이렇게 가파른 이유는 겨울이면 눈이 너무 많이 오기 때문에 눈이 쌓이지 않고 빨리 땅으로 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합장지붕을 만드는 재료는 갈대인데 이삼십 년만에 한 번씩은 지붕을 갈아 주어야 한다고 한다. 두께가 1미터에 가까운 이 지붕을 가는 일은 수월한 일이 아니어서 한 집이 지붕을 갈게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다 도와주는 우리나라의 두레 같은 전통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마치 동화 속 마을같지만 특히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에는 마을 전체가 크리스마스 트리를 밝혀놓은 것처럼 아름답다고 한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 이 마을을 목적지로 여행을 와서 꼼짝도 하지 않고 이 마을에서만 한 며칠 묵고 가면 진정한 힐링이 되지 않을까 ?

알펜루트와 시라카와코 합장마을이 있는 도야먀현은 한자로 富山, 산이 많아서 부자인 동네라고 하는데 그냥 산이 아니고 부러울 만큼 아름다운 산이 많다. 내 마음의 지도에 도야마현이 통째로 새겨졌다.


태그:#알펜루트, #무로도평원, #시라카와코, #합장지붕, #단풍 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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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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