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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2학년 쯤 되었을 때 일이다. 요즘처럼 쌀쌀한 어느 오후였다. 그날 따라 비가 왔는지 언니와 남동생과 함께 집안에서 놀고 있었다. 텔레비전이 하루 종일 나오던 때도 아니고 장난감도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랫목에서 담요를 덮고 앉아 있자니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언니와 남동생에게 물었다.

"소원이 뭐야?"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는, 뭔가를 잘 해서 부모님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라는, 재미없고 진부한 대답을 했다. 세 살 어린 남동생의 소원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돈 많은 부자가 된다든가 하는 조금 세속적인 것이었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질문을 하기 전부터 이미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내 소원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뜨거운 감자를 먹으면서 콧물을 흘리는 거야."

얼마나 솔직하고 따뜻하고 기발한 대답인가?

삶은 감자
 삶은 감자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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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한 공감과 감탄사가 나오리라 기대했는데, 반응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콧물이 문제였던 걸까? 언니와 남동생은 한참 동안 깔깔대며 웃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콧물, 콧물' 하는 놀림을 받아야 했다.

엄마가 삶은 감자를 간식으로 내놓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콧물' 이야기부터 등장했다. 물론 나는 묵묵히 감자를 먹으며 '소원성취'의 순간을 즐겼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게 놀릴 일인가?' 하는 생각에 억울하고 화도 났다. 놀림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줄어들었고 이후 그 일은 잊혀졌다.

몇 년 전, 친구들과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주제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데, 우리가 보내는 하루하루는 그와 거리가 멀다는 데에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도 내가 바라는 행복이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라며 맞장구를 쳤다.

곧이어 내 입에선 오래 전 그 '삶은 감자와 콧물'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기억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쑥스러워하며 얼른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던 그때, 친구들이 "오~!" 하는 탄성을 보냈다.

"어릴 때인데 기특한 생각을 했네" "그때 이미 인생을 알았구나" "그래, 그게 행복인데"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긴 세월을 사이에 두고 드디어 공감을 받게 된 것에 감동한 나머지, 찔끔 눈물이 나려 했다.

나는 그제야 평범한 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어린 나는 '소원이 뭐냐'고 물었지만, 내가 궁금했던 건 '언제 행복한가?'였다. 그리고 그 대답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겐 여전히 '삶은 감자'가 행복이다. 거창한 그 무엇은 나와 어울리지 않고 나를 힘들고 지치게 할 뿐이다.

하지만 가끔 흔들릴 때가 있다. 세상이 정해놓은 행복의 조건은 저리도 빛나고 화려한데 나는 고작 감자 따위에 만족하다니. '이게 맞는 걸까? 무언가 얻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 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문득 찾아온다.

삶은 감자를 눈앞에 두고도 서글픈 마음에 도무지 먹을 힘이 안 난다. 이럴 때 힘이 되는 건, 나와 함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다. 어린 내 곁에 함께 감자를 먹던 언니와 남동생이 있었던 것처럼. 비록 소원은 달랐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내가 느낀 행복감은 아주 미미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중요한 건 함께 감자 먹을 이들을 만나는 것이다. '감자 따위'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다보면 나와 다른 행복을 말하는 이들과 그들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눌 수 있겠지. 삼십 여 년 전 컴컴한 방에서 소원을 말하던 그 어린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단짠단짠_그림요리, #요리에세이, #삶은_감자,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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