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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살던 집을 떠나게 된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뀐 집주인이었다. 전 집주인의 경우, 같은 건물에 살면서 나름 세입자도 가려가면서 받아 크게 불편함을 못 느꼈으나, 새로운 집주인은 관리인에게 맡겼는지 공기부터 낯선 세입자들이 입주하기 시작했다.

지난 집은 다른 원룸과 다르게 3중 보안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건물 현관, 계단 입구, 방 현관 3단계의 보안체계를 거쳐야지 방 안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특히 건물 현관의 경우 오직 카드키만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택배나 배달음식을 받을 때는 불편함이 존재했지만, 그만큼 안전성이 보장되어 여자가 살기에는 아주 적합하였다.

하지만 집주인이 바뀌면서 안전한 나의 성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지하 창고에는 밤새워 일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항상 닫혀 있어 수성(守城)의 기능을 했던 건물 현관 앞에서는 현관문을 열고 담배 피우는 낯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종종 건물 현관이 열려있는 걸 보고 놀라며 닫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며칠 전 SBS스페셜에서 '불안한 나라의 앨리스' 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불안함을 동반하는 것인지를 다뤘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심지어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은 집 안에서도 상당한 예민함과 함께하는 일이다. 낯선 사람들을 나는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곧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말하면 되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여자 혼자 사는 집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소리다. 결국, 이런 상황은 이사 결심에 있어 큰 역할을 하였다.

새로 이사한 이곳에서도 당연히 낯선 이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곳은 대화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 아래는 단체 대화방에서 일어난 소소한 우리의 대화들이다.

새로 이사한 이 곳에서도 당연히 낯선 사람이 존재하지만...
 새로 이사한 이 곳에서도 당연히 낯선 사람이 존재하지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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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 모니터 있으신 분 계시나요?

필자는 현재 논문을 쓰는 중이라 한 학기만 모니터가 필요했다. 한 학기만 쓰는 거라 새로 사기도 애매했고, 애꿎은 중고나라만 뒤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들 이사 중이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협동조합 조합원 단체 대화방에 글을 올렸다.

"혹시 남는 컴퓨터 모니터 있으신 분 계시나요? 한 학기만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사실, 큰 기대는 안 하고 올린 글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인 대화가 왔다.

"모니터 구하셨나요? 제가 남는 것이 있는데, 저는 내년 5월 정도에 돌려주시면 돼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옆 건물에 방문했더니 (협동조합에 살면 방문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장점도 있다) 너무나도 좋은 모니터와 모니터 받침대까지 함께 빌려주셨다.

서울살이에서 느껴보는 이웃의 도움이란 꽤 낯선 감정이라서 그 훈훈함이 한동안 오래 남았다.

#. 운동회가 끝났으니, 돌아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 앞에는 초등학교가 있다. 가을이라 토요일 아침부터 어린이들이 운동회를 하는지 마이크를 타고 사회자 소리가 온 건물을 뒤덮었다. 그 소음은 집에 있기가 어려울 정도라 시끄럽기도 하고 마감해야 할 일도 있어 노트북으로 들고 밖으로 나와 있는데, 오후 4시경 단체 대화방이 울린다.

"운동회 끝났습니다~ 시끄러워서 집에서 피신하신 분들 돌아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핸드폰 너머로 보이는 그 문장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고 있는데, 또 알람이 울린다.

"청군 백군 중 누가 이겼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누군가가 대답했다.

"청군이 이겼어요."

상기 대화가 나만 사랑스러운 걸까? 짜증도 나누는 이런 소소한 즐거움은 운동회의 소음도 웃음과 함께 극복할 수 있게 하였다.

다음 날 단체 대화방에 아침 8시 53분 또 다른 글이 올라왔다.

"바야흐로 운동회의 계절인가 봅니다. 오늘은 10시부터 동문체육대회랍니다. 즐거운 휴일 되세요."

앞서 1회 때 말한 것처럼 이 도시에서 우리는 '낯설게 사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리고 낯설게 사는 것이 편하다. 난 이 낯섦에 대한 태도를 크게 변화시킬 생각은 없다. 하지만, '청년주택협동조합 사이'에서 낯선 이의 개념은 조금 수정될 것 같다.

예전에 교수님이 처음 미국으로 갔을 때 프라이버시에 관해서 물어보지 않고 샴푸와 바디 클렌저 등 공산품에 대해서만 대화를 나누면서도 충분히 룸메이트와 교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억지로 술 마시면서 첫사랑 이야기, 옛 연인 이야기, 마음속 고민 등을 털어놓아야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한 공간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속에서 생활 속 공통된 주제를 나누고 웃을 수 있다면 친구이며 이웃임과 동시에 어느 영역에서는 낯선 이이다.

사실, 이 광활한 우주, 지구라는 행성의 여행객인 우리는 모두 낯선 이들이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고 서로의 삶의 그 찰나를 잠시나마 공유하면서부터는 다른 문이 열린다.

오늘도 우리는 계단에서 꾸벅 인사한다.

Hello, Stranger?

#. 우리의 집에 드디어 이름이 생겼다. 청년주택협동조합 사이23, 청년주택협동조합 사이28 로 정해졌다. 이 역시도 이름은 무엇으로 할 것이며, 주택으로 할 것이냐, 주거로 할 것이냐, '사이'를 청년주택협동조합 앞에 붙일까, 뒤에 붙일까 등 장고의 회의 끝에 나온 결과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집의 이름과 형태와 내용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김정은 연구원입니다. <가치살기>는 '같이 사는 가치 있는 삶'이라는 의미로, 신정동 청년협동조합형 공공주택 에 살면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을 다룬 일기 같은 칼럼입니다. 칼럼 <가치살기>는 월 1회 게재될 예정이며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www.saesayon.org)에도 함께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협동조합형 공공주택, #새사연, #김정은, #청년주택협동조합 사이, #가치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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