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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에 동네 술주정뱅이 아저씨가 지나가다 들르면 저녁상을 물리고 쉬고 있다가도 일어나서 술상을 차려주고 얘기를 들어주던 분인데 말이다.
시골집 단감은 꿀맛 / 수채일러스트
 시골집 단감은 꿀맛 / 수채일러스트
ⓒ 권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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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평일 월차를 내고 시골에 부모님을 뵈러 간 아이들 큰아빠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3시 반 정도 도착 예정입니다~"

난데없는 도착 예정 문자에 당황해하고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잘 따르는 큰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서, 우리 신랑이 시골 갔다가 감 배달하러 좀 이따 간다네. 지금 집에 있어?"

문자로 받은 예정시간보다 삼십분이나 일찍 도착하신 아주버님이 커다란 박스를 수레에 끌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모습을 기대에 가득 찬 딸의 호들갑스런 인사와 함께 마중했다.

아이들 할머니 할아버지 댁은 시골길을 굽이굽이 한참을 지나고서야 도착할 수 있는 시골마을. 늘 건강한 먹을거리가 풍부한 시골의 할머니·할아버지 댁에서 보내온 상자에는 가을이 깊어졌음을 실감하게 하는 선물이 가득 메워져 있었다.

커피 한 잔이라도 대접하려 했건만, 시골에서 과식하고 왔다며 한사코 거절하시고 조막만한 아이 손에 만 원짜리까지 쥐어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주버님을 아쉽게 보냈다. 이윽고 감을 깎아달라는 딸의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감을 깎기 전에, 늦기 전에 시골 시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님, 힘드신데 감을 어떻게 따셨어요. 지금 잘 받았어요. 잘 먹겠습니다…."
"내가 팔 아프고 다리 아파서 그거 어떻게 따니. 그거 네 큰시누가 엊그제 주말에 와서 다 딴 거여. 나중에 고맙다고 전화 한 통 넣어. 네 시숙이 잘 배달해줬구만. 우리 아기들 맛있게 잘 먹여."

감이 익으니 손주들 사랑도 무르익고

사실 10월 초쯤 시어머니께서 내게 다른 일로 전화를 하셨다가 '감'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10월 말에 시어머니 생신이 있어서 온 가족이 모두 모이기로 되어 있었는데 모임을 앞당길 순 없냐고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지인 결혼식도 있었고, 그 다음 주에는 친정엄마 생신까지 겹쳐 있던 터라 어렵겠다고 했더니 그런 말씀을 하셨다.

"저 감들을 따야 하는디… 늙은 우리가 딸 수 있어야 말이지. 감이 아주 맛있게 잘 익어서 집에 오는 사람들도 다 따 먹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맛있겠다고 하나씩 따 먹는데 죽겄어. 우리 애기들 먹여야 하는디…."

소싯적 동네 부녀회장으로 선임될 정도로 마을에서 인기도 많고 인정도 많기로 소문난 구여사께서 남들 입에 들어가는 감을 아까워하시다니. 저녁에 동네 술주정뱅이 아저씨가 지나가다 들르면 저녁상을 물리고 쉬고 있다가도 일어나서 술상을 차려주고 얘기를 들어주던 분인데 말이다. 시어머니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며느리였기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무려 너털웃음을 전화기에 대고 흘렸다.

"어머니 감 많은데 누가 좀 따 먹으면 어때서 그래요~ 맛있는 거 같이 나눠 먹으면 좋죠. 저희는 원래대로 그 때 가야 해요."

늦둥이 아들이 낳은 자식들 덕분에 연세가 드셔서도 손주 재롱을 보시게 되었으니, 그동안 나눴던 이웃에 대한 정보다도 이젠 손주들이 우선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자 손녀 먹일 감인데 남들이 따 먹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심적으로 고되셨나 보다. 내게 전화하셔서 비밀 털어놓듯 하소연 하셨던 그 날을 기억하는 일은 지금도 유쾌하다.

시골집 앞마당 뒷마당에 고루 심어져 있는 감나무들은 홍시감나무, 단감나무가 총 3그루. 시부모님의 70여 인생과 함께 한 그 집의 역사이다. 자신의 살을 떼어주듯 손주들을 위해서 감나무의 감을 따주고 싶은데 연로한 몸으로는 이젠 불가능해졌다. 애가 탄 시어머니께서 선택한 방법은 다른 자식들을 불러서 '감 따기'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결국 수도권에 사시는 아이들 큰 고모 고모부가 시어머니 성화에 주말에 한가한 틈을 타 내려오셔서 감을 몇 박스나 땄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이들 큰아빠가 내려간 김에, 택배로 부치려던 감을 우리 집에 한 상자 배달해 주신 것이다.

자신의 살을 떼어주듯 감을 따주고 싶은

시골집에서 태어나 우리 집에서 일생을 보낼 감들을 가장 반긴 건 아이들이었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오자마자 감을 보더니 깎아 달라고 조르며 신이 난 아들과 오빠가 오기 전 이미 배불리 먹었던 감은 다 잊었다는 듯 '나도!' 외치던 딸. 아이들이 감을 좋아하게 된 것은 전부 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이다.

시부모님 일생의 마지막 손주들이 될 우리 아이들은 아직 '늙는다는 것' '나이 들었다'는 것을 모른다. 아이들에게는 지금 먹고 있는 감들을 큰 고모 고모부가 따 주셨다는 상세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감 따서 보내주셨어. 우리 아가들 맛있게 잘 먹으래."

삐뚤빼뚤 '아이의 손글씨'
 삐뚤빼뚤 '아이의 손글씨'
ⓒ 권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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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늙고 나이 들어 죽는다는 것을 알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손주들에게 직접 감을 못 따 줘서 세월이 원통한 할비 할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는 아직 어르신들이 전지전능한 신처럼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식으로 과장해서 알려주고 싶었다. 마음은 이미 그 만큼이니까.

큰 상자 안 가득 쌓여있는 단감이 우리 집에 오게 되기까지 가족들 몇 사람들의 말과 손과 발을 거쳐 왔는지 생각할수록 놀랍다.

덕분에 저도 잘 먹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 http://blog.naver.com/rnjstnswl3 중복게재



태그:#단감, #시골감, #손주사랑, #시어머니, #부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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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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