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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님... 그래도 마지막인데 영진(가명)이 졸업여행 한 번... 보내주시죠."

우리가 있던 공간에 갑자기 소리가 사라졌다. 연신 속사포로 하소연 하던 할머니께서 말씀이 없다. 3초 정도 침묵하던 할머님이 방금 전 침묵이 무색하게 말을 이어나가셨다.

"아이고, 시장에서 무가 300원이길래 덜컹 5개나 샀는디, 내가 언덕 올라가기 꺽정스러워서가 마을버스 타려했는디도 그냥 포기 허고, 요 무릎을 허고 쩔둑이며 30분이나 그거 들고 올라왔오."

내가 한 질문엔 대답도 안하시고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 본인 사정의 어려움을 말씀 하신다. 할머니도 입 밖으로 보내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전달하기가 어려웠으리라.

복잡한 줄에 얽혀 있는 모습이 빈곤의 문제와 겹쳐진다
▲ 학생집 방문하러 가는 길목의 하늘 복잡한 줄에 얽혀 있는 모습이 빈곤의 문제와 겹쳐진다
ⓒ 박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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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으로 틀어진 '체험의 불균형'

학생들에겐 매해 체험학습과 졸업여행을 떠나는 시즌이 있다. 나의 어린 시절엔 그런 것들을 합쳐 '소풍'이라는 들뜬 표현을 사용하고는 했는데, 요즘 어린 친구들은 '체험' 이라고 표현한다. 그 체험을 가질 때마다 꼭 한두 명은 그 상황을 포기해야만 한다. 본인의 의지가 아닌 가정 형편의 어려움으로 말이다.

어린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른이 뭔가 하고 싶던 것들을 포기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의 커다란 상실감을 남긴다. 그것은 한참 또래친구들과의 동질감을 형성해 나가는 시점에 깨닫게 되는 환경적인 '다름'과 '차이'다. 혹은 그저 뛰놀기만 하던 운동장 밖으로 벗어날 때 직면하게 되는 이야기로, 보호자들이 연신 내뱉어 대던 '아이고 내팔자야'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다시 이걸 물려받아 내뱉게 되는 '내 팔자가 뭐 이렇죠"라는 현상이다.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상처다.

기초생활수급 및 법정 한부모가정 등의 정부수급을 받는 자녀들이 졸업여행으로 체험을 떠날 때 평균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저학년 기준으로 보통 14만5000원 정도를 지원받는다. 요즘은 해외로도 많이들 나간다고 하지만 어려운 지역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학교현장에서는 최대한 아껴서 인근으로 체험을 나갈 때, 부득이하게 보통 1만 원에서 3만 원 정도의 추가비용도 발생하곤 한다. 할머님에게 추가로 내셔야 할 돈을 안내한 것도 문화체험 갔을 땐 1만3000원, 졸업여행비용은 2만1400원이었다.

문화체험 때도 할머님은 영진이를 보내주지 못 하셨다. 그때 지원을 해주고자 다가갔지만 아이는 자신의 할머니가 만 원이라는 돈을 내줄 상황도 안 된다는 현실에 자존심이 상해 "저는 원래 학교 밖으로 나가는 거 좋아하지 않아요! 안 갈 거예요"라는 말을 남기고 지원받는 걸 거부했다. 친구들이 용인에 있는 놀이공원에서 체험을 할 동안, 혼자 하루종일 빈 교실에 앉아 자습을 했다.

몇 개월 전, 문화체험과는 달리 이번엔 졸업여행이라 다신오지 않은 시간에 대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마지막이니 2만 원 정도만 내달라고 할머님을 설득했지만 교통비도 없어 걸어 다닌다는 할머님께 더 이상 요구를 할 수는 없었다.

한참 나이 차이 나는 조선족 여성과 살림을 차린다고 뛰쳐나간 알코올 중독 아들과 기분장애로 정신병원을 왔다갔다하다 집을 나가 고향 오빠와 살림을 차린 며느리를 대신해, 홀로 아동 양육을 맡으며 아둥버둥사시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께 뭔가 더 요구를 하는 것도 어렵다는 걸 사실 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번엔 학생을 잘 설득해 지원받을 수 있게 하려고 했다.

상담을 하던 도중 영진이는 그동안 참았던것들을 터트리 듯 오열하고 통곡하면서 말했다.

"저는요…. 샘(선생님)이 보내준다 해도 김밥 싸줄 엄마도 없어요. 놀러가서 쓸 돈도 없고요…. 전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예요."

별이 빛나는 밤

학생들이 각색해 손가락으로만 그림 그림
▲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ry Night 학생들이 각색해 손가락으로만 그림 그림
ⓒ 박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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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그런데…. 친구들이랑 멀리 놀러가면 그게 그렇게 재미 있어요?"

1주일째 영진이가 내 얼굴을 보러와서 매일 같이 하는 질문이다. 토시 하나 바뀌지 않고 저 질문을 자꾸한다.

"그럼! 낮엔 내내 사진찍고, 밤엔 밤새우면서 이야기하고…. 맞다! 이건 돈 안 들어가!"

나 역시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매일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해주고 있다.

"칫…. 그런다고 누가 갈 줄 알고…."

삐죽거리는 양 입술 옆으로 웃음이 새어나온다. 지켜봐야 알겠지만 이미 가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이제 13살 밖에 안 된 학생 입에서 "불쌍한 내 인생"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아마도 할머니에게서 흘러나오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리라. 졸업여행 보내주기로 한 단기간의 목표를 달성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영진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긴 인생이 있다. 이 정도의 형평성을 맞췄다고 끝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불쌍한 내 인생이라는 말을 하는, 영진이와 비슷한 형편에 있는 학생들을 불러 다 같이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때 학생들은 원작과는 다르게 달에 토끼도 사는 모습이라든가 어설프지만 따뜻한 그림을 그려내기도 했다.

밤이 어둡기만 하면 아무것도 안보이지만, 별이 있고, 달이 있고, 이 시간이 지나가면 밝은 아침이 올 거라는 희망이 있어서 밤은 더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다. 별이 더 빛나 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은 당장 어두워 보이지만 아직 어린 영진이 같은 학생들이 별처럼 빛나며 잘 성장 할 수 있다면, 지금의 힘든 현실도 곧 지나가고 밝은 아침과 그 아침보다 더 밝은 정오가 찾아오리라 확신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그런 거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어른들이, 이 사회가, 좀 더 많은 학생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나눔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소수의 특권층만을 위해 굴러가는 사회가 아닌, 보통사람들이 함께 체험의 기회를 누릴 수 있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어른들이 그 역할을 조금씩 나눠가져야 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미래 세대를 키워내는 데 있어서의 필수적이다.


태그:#빈곤, #체험, #밤, #별, #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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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대 일반대학원 박사 과정 (사회복지) -숙명여자대학교 석사 졸업 -前숙명여자대학교 역량개발센터 진단평가실 (前계절학기강의 비인지영역 실습 프로그램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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