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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건군 제67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모습
 2015년 10월 1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건군 제67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모습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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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군인과 주민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처한 참혹한 실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 국제사회 역시 북한 정권의 인권 탄압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인류 보편의 가치인 자유와 민주, 인권과 복지는 여러분도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권리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북한 정권의 도발과 반인륜적 통치가 종식될 수 있도록 북한 주민 여러분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여러분 모두 인간의 존엄을 존중받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북한 주민 여러분들이 희망과 삶을 찾도록 길을 열어 놓을 것입니다.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를 바랍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올해 국군의 날(10월 1일) 기념사의 한 토막이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언제든 대한민국의 자유로운 터전으로 오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듣기에 따라선 '선동'으로 비칠 소지가 큰 '호소'다.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이후 역대 한국 정부의 대통령 5명(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지 않은 말이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제1장 남북화해'에서 상호 체제 인정·존중(1조), 내정불간섭(2조), 비방·중상 금지(3조), 파괴·전복 활동 금지(4조)를 규정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10월 1일 발언은 그만큼 도발적이다.

"남으로 오라"면서 수해에 고통받는 북한 주민은 나 몰라라

박 대통령은 1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북한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우발 상황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북한 급변사태'와 '남으로 오라'를 한꺼번에 입에 올린 것도 전례 없는 일이다. 박 대통령의 국군의 날 기념사엔 '북한 붕괴론'과 '흡수통일론'이 착종된 괴물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는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는 헌법 규정(66조 3항) 위반이다.

박 대통령은 왜 이런 소리를 공개적으로 했을까? 질문은 두 가지다. 첫째, 박 대통령은 북녘 동포의 인권에 진심으로 관심이 있는가? 둘째, 누구 들으라고 한 소리일까? 순서대로 따져보자.

박 대통령은 공개 연설 때 북한 문제를 언급할 경우엔 거의 예외 없이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한다. 초점은 김정은 정권의 반인권·폭압성을 강조하는 데 맞춰져 있다. 정권과 주민을 분리해 대응한다지만, 북녘 동포의 고통엔 관심이 없다.

박 대통령은 북한 스스로 "해방 후 기상 관측 이래 처음"(9월 1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 호소문)이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함경북도 북부지역 수해와 관련한 인도적 지원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정부 차원의 인도적 지원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의 자발적 인도적 지원 노력조차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히려 북녘 동포들이 겪고 있는 인도적 재앙을 김정은 정권 비난의 소재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렇게.

"북한 김정은은 주민의 민생은 철저히 외면한 채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가면서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광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최근에 북한에 큰 수해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수해 복구보다 5차 핵실험에 매달리고 그것도 모자라 또 신형 로켓엔진 시험에 성공했다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 북한 주민들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정권 유지와 사리사욕만 생각하는 현실이 기가 막힐 뿐이다." (9월 22일 대통령 수석비서관 회의)

인도적 재앙 외면한채 외치는 북한인권... 결국 '국내용'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71차 유엔총회 연설(9월 23일)에서 북한의 유엔 회원국 지위를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71차 유엔총회 연설(9월 23일)에서 북한의 유엔 회원국 지위를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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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박 대통령 말마따나 "북한 주민들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게 김정은 정권뿐인가?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아예 71차 유엔총회 연설(9월 23일)에서 사실상 북한을 유엔에서 내쫓자고 '선동'("북한이 평화 애호 유엔 회원국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를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하고는, 북녘 동포의 인도적 재앙을 김정은 정권 비난의 소재로만 써먹었다. 이렇게.

"(유엔총회) 의장님, 북한의 5차 핵실험은 북한이 명백한 핵 야욕을 갖고 있음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주민들을 완전히 외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수십 년 만에 닥친 최악의 홍수 와중에, 북한은 최대 피해지역에서 핵실험을 강행하였습니다. 북한은 금년도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만 최소 2억 불을 탕진한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홍수피해 구호에 사용될 수 있었던 충분한 액수입니다."

사실 윤 장관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평화와 인권에 대해 '아름다운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렇게.

"완전한 의미에서의 평화는 평화·안보, 개발, 인권이 함께 진전될 때에만 달성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평화의 지속화(sustaining peace)'라는 새로운 개념의 핵심입니다. 이는 평화구축을 분쟁 후 맥락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분쟁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적용되는 것으로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북한 앞에만 서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윤 장관은 71차 유엔총회 계기에 9월 20일 뉴욕에서 열린 '난민정상회의'에서 난민 문제 해결에 "3년간 2억3천만 달러 이상"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북녘 동포들의 인도적 재앙을 완화하는 데는 돈 한 푼 쓸 수 없다는 게 박근혜 정부다. 박근혜 정부의 이런 태도는 명백히 국제인도주의 원칙을 배반하는 것이다.

21세기 지구촌의 지옥도인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이 반인권적 독재정부라고 해서, 국제사회가 시리아 시민의 인도적 재앙을 외면하는가? 박근혜 정부는 유엔 차원의 시리아 인도적 지원을 거부하는가? 아니다. '굶주림은 정치를 모른다'는 인류의 정신은 지구의 모든 곳에 적용되는 원규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북녘 동포의 굶주림과 고통엔 인도적 지원의 손길을 내밀려 하지 않는다. 이런 박근혜 대통령과 박근혜 정부에 "이미 국내에 들어온 3만 명도 안 되는 북한이탈주민도 잘 챙기지 못하면서 무슨 소리?"냐는 비판은 어쩌면 사치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대통령이 걱정하는 것은 북녁 동포가 아니라 지지율

북한 선전매체 '내나라'가 공개한 함경북도 지역의 홍수 피해 모습. 홍수로 가옥들이 파손되고 다리가 끊어지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다.
 북한 선전매체 '내나라'가 공개한 함경북도 지역의 홍수 피해 모습. 홍수로 가옥들이 파손되고 다리가 끊어지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다.
ⓒ 내나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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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새 날이 맵차졌다. 손이 살짝 시릴 정도다. 폭우에 집을 잃은 함경북도 북부지역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국제 인도지원 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의 파올로 파토리 북한 지부장은 7일 자료를 내어 "10월 말이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눈이 내릴 것이다. 이 지역은 겨울이 유난히 길고 험하다"라며 긴급 지원을 호소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도 11일 아시아·태평양 주례 인도주의 보고서를 통해 "10일 현재 갈 곳이 없는 이재민이 6만9천여 명"이라며 "벌써부터 추위를 느낄 정도여서 겨울 채비를 해야 한다. 특히 어린이와 노약자한테 의류 지원이 절실하다"고 짚었다.

사람들 사이엔 국적과 혈통과 피부색과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공유하는 인간관이 있다.

"어려울 때 돕는 사람이 진짜 친구다."

인도적 재앙을 외면하며, '잘해줄 테니 여기로 오라'는 말을 어느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이런 반문은 자연스레 두 번째 질문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일까'의 답을 알려준다.

'김정은 정권은 진짜 나쁜 정권이다. 북한은 곧 망할 거다. 그러니 나의 대북정책이 잘못됐다 하지 말고, 일치단결해 지지해 달라.'

다만, 박 대통령이 염두에 둔 청중은, 북녘 동포가 아니었다. 자신의 지지자를 향한 국내정치를 향한 목소리일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제훈 기자는 한겨레 통일팀장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북한인권, #북한붕괴, #북한수해, #박근혜, #윤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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