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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생각하는 진로교육은 자신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예요."
 " 제가 생각하는 진로교육은 자신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예요."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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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작가다. 그래서일까, 내 맘속의 응어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 글 쓰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전 한 달에 한 번 쓰는 것도 죽을 맛인데.
"저도 그래요.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현재 인류의 유전자는 농경을 하면서 정착한 이후에 별로 변하지 않았대요. 당시엔 책을 읽거나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유전자가 진화하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유전자는 탑재되지 않은 거죠."

아, 그래서 이다지도 힘든 거구나. 근데 나한테 농경과 관련된 유전자는 있나,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또 다시 불쑥 질문.

- 글 쓰기 힘들 땐 어떻게 극복하세요?
"극복 할 수 없어요. 그냥 써야 끝나요. 갑자기 제가 냉장고 정리를 하면 글 쓸 때가 됐다는 걸 식구들이 알아차리죠, 하하하. 더 이상 치울게 없으면 그제야 책상에 앉아요."

써야 끝난다는, 이 불변의 진리에 떠밀려 오늘도 난 책상 앞에 앉는다.

꿈꾸는 인간

인간에게 읽고 쓰는 것과 관련된 유전자가 없다면 결국 지금의 교육시스템은 인간의 본성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거 아닌가, 라는 의문을 떠올린 건 그녀의 또 다른 직업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등학교에서 사회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여러 꿈 중에 하나가 교사였어요. 만화가나 작가가 되고 싶기도 했었고.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한 <오르페우스의 창>이란 만화를 즐겨보곤 했는데, 그림 실력이 달리는 바람에 만화가를 포기하고 선생님이 되었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는 그렇고 그런 수업에서 조금 다른 수업을 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너무 맞춰서 살려고 하지 마.' 조금 다르게 사는 것도 괜찮다고 알려주고 싶었는데 아이들한테 어떻게 읽혔는지는 모르겠네요."

-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 말하는 선생님이면 인기가 많겠는데요?
"그럴 리가, 하하하. 아이들이 저를 존중하고 제 말을 무게 있게 받아들이긴 하는데 그거랑 사랑받는 건 좀 다른 거 같아요. 학교에 젊고 예쁜 선생님들도 많고…."

- 고등학교 선생님이라서 더 힘든 부분이 있나요?
"아이들이 인생의 너무 많은 부분을 이미 결정내린 채 올라와요. 꿈이 없는 아이들도 무척 많고요. 중학교 때까지는 장래희망에 대해 철없이 얘기할 수 있지만, 고등학생이 되면 소소한 것도 이루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게 되거든요.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슬퍼지죠. 근데 저는 지금 당장 꿈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살면서 새롭게 세상을 만나고 부딪치면서 생겨나는 게 꿈이잖아요."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대입원서를 쓸 때도 1학년 때부터 확고한 진로목표를 가지고 3년 동안 흔들림 없이 노력해 온 것을 보여줘야 유리하단다. 사정이 이렇다면 꿈이 없거나, 꿈이 여러 개거나, 꿈이 바뀌는 것은 감점 요인이 된다. 이 나라에서는 이딴 걸 '진로교육'이라고 하고 있다. 순간, 참을 수가 없어 내뱉었다. 이런, ×× 같은.

"제가 생각하는 진로교육은 자신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예요. 밥 할 줄 알고, 단추 달 줄 알고, 청소할 줄 알고. 사실 이게 진로교육에서 핵심인데 우린 직업을 정하라고 하잖아요. 지금처럼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선 직업을 미리 정해 놓은 게 별 의미도 없는데 말이죠."

성적과 스펙이 되지 않아 꿈조차 꾸지 않는, 이 한없이 무력하기만 한 아이들에게 그녀는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 걸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된다는 얘길 많이 해요. 다 준비되어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좋은 대학가도 그 다음에 또 다른 고비가 오고, 성적과 무관하게 잘 사는 경우도 있고. 한 번에 결정되지 않는 게 인생이니 매일매일 꾸준히 뭔가를 해야 한다고. 예를 들면 교사가 됐어도 어떤 교사로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는 각자 다르잖아요. 아이들이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실패하는 인간

- 사회교사모임도 활발히 하신다던데, 교육현장에서 느끼는 구체적인 고민이 있으신가요?
"사회라는 교과가 무척 재밌거든요, 근데 학습량이 많으니까 정작 애들은 재밌어 하지 않아요. 수능 같은 전국단위 평가를 위해선 교사도 어쩔 수 없이 겉핥기식으로라도 전부 가르쳐야 하고요. 하나라도 좀 깊게 배우면 아이들도 흥미있어 할 텐데, 아쉽죠."

대입도 수시 비중이 높아지면서 학교별 평가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그럼 이제 교사들 각자가 자유롭게 수업을 디자인하고 구현할 수가 있게 된 걸까? 그녀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여전히 수능을 보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기존의 수업 방식을 전부 버릴 순 없어요. 그래도 이 정도는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좀 다른 방식으로 나갔다가, 너무 나갔나 싶으면 다시 돌아오고, 매년 줄타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어쨌든 수능의 위상이 현저히 떨어진 건 맞는데 언론이나 사회에서 수능을 떠받드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어요. 또 신기한 게 자신이 9등급(최저등급) 받을 거란 걸 빤히 알면서도 아이들은 수능을 보러 가요. 대입제도가 달라졌음에도 이걸 확 바꾸는 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계속 끌려가고 있는 상황인거죠."

등급이 낮은 아이들은 경험 삼아 혹은 할인 쿠폰처럼 쓰이는 수험표를 얻기 위해 수능을 본다. 대입이라는 하나의 길만 터준 채 아이들을 몰아대던 세상과 영문도 모른 채 기나긴 시간을 바쳐 그 길을 통과해야 했던 아이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손에 쥔, 할인쿠폰이 되어버린 수험표 한 장. 이 무참한 현실을 외면하듯 나는 자꾸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이 아이들에게 우린 대체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느냐고.

"예전에 재무컨설팅 하는 분을 모시고 학교에서 강연을 들었는데, 그분이 카드대란 났을 때 신용불량 직전까지 갔대요. 그 힘들었던 과정을 아이들에게 쭉 이야기하더니, '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실패를 가지고 벌어먹고 산다' 이러는 거예요. 그분의 이야기가 뻔한 성공스토리였으면 아이들이 그렇게 귀 기울여 듣지 않았을 거예요. 실패도 자산이 될 수 있고 그러려면 두려워도 도전해봐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요."

두려워하는 인간

부조리하고 슬픈 현실을 떠나 얼마든지 꿈 꿀 수 있고 그 어떤 실패도 괜찮은 '책'의 세계로 인터뷰의 방향을 돌렸다. 작가로서 그녀의 이력을 살펴보다 놀란 것은 웬만한 전업 작가보다도 책을 많이 썼다는 것과 그 저서들이 역사, 사회 경제, 소설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책 속에 길이 있고, 독서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는 그녀에게 또 다시 물었다.

- 정말로 그렇게 믿으세요?
"그럼요. 전 제가 읽은 책들이 저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해요. 대학시절에 읽은 책들이 정치적 지향을 갖게 만들었고 제가 읽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저를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만든 거죠.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시대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법이 달라지니까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할 수 있죠."

- 집필 작업과 교사생활 만으로도 벅찰듯한데 그녀는 여러 개의 독서클럽도 진행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일중독자의 냄새가 솔솔 나는데, 대체 책을 얼마나 읽으세요?
"한 달에 20권은 넘는 거 같아요. 사는 게 정상이 아니죠. 집에 TV도 없고 술도 안 마시고. 빈곤한 사교생활을 독서와 집필로 대신하는 거죠. 되게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진행하는 독서클럽만 해도 이번이 벌써 6번째. 이번 주제는 '알파고의 시대를 읽다'이다.

"저는 이세돌이 알파고하고 대국할 때 당연히 이세돌이 이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더라구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엄청 바뀌고 있구나, 나처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이번에 인공지능의 시대와 관련된 부분을 업데이트해보자 해서 기획하게 됐죠."

알파고를 화제로 그녀와 나눈 대화는 참으로 흥미진진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여기.

"4번째 대국에서 알파고가 중간에 멈춰버렸어요. 계속 둬도 결국 진다는 계산이 나오니까 그만 두는 게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한 거죠.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모든 것을 계산해낼 수 있고, 효율성이 중시되는 세계에선 성과가 나지 않는 노력은 인정하지 않는구나…."

알파고를 보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느끼는 건 공포와 두려움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진 인간들….

"사람들이 인공지능의 시대를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가 먼저 움직여줘야 하죠. 아이들에게도 확실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무너지고 있으니까 앞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게 맞는 거라고 이야기해요."

인터뷰도 잊고 우린 인간의 세계를 넘보는 기계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갈 미래에 대해 각자의 고민과 희망을 길게 이야기했다. 한참 후에야 질문이 남아있다는 걸 깨닫고는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다.

- 독서클럽을 잘 운영하는 팁 좀 알려주세요.
"가장 중요한 건, 독서클럽에서는 정말 책 얘기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에너지가 딸리는 날도, 읽어온 사람이 별로 없는 날이라도. 10분, 20분 짧은 시간이라도 꼭 책 얘기를 해야지만 모임의 정체가 흔들리지 않죠. 또 하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람들이 들고 나가는 것에 대해 관대해져야 한다고 할까요, 사람을 가릴 필요도 없고 느슨하고 포용력 있게 만들어가야 누가 좀 빠져도 모임이 되는 거 같아요."

- 앞으로 어떤 책을 쓰고 싶으세요?
"지금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 그리고 팔순이 넘는 제 친정어머니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책을 쓰고 싶어요. 어려운 책을 쓰는 분들은 많잖아요."

"인공지능의 시대를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가 먼저 움직여줘야 하죠."
 "인공지능의 시대를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가 먼저 움직여줘야 하죠."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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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하는 인간

늦은 밤 열린 독서클럽. 평소보다 모인 사람의 수가 적어 함께 읽고픈 구절을 찾아 돌아가면서 낭독을 하기로 했다. 숨죽인 사람들 어깨 위로 책의 구절들이 낮게 내려앉는다. 짙어가는 어둠을 따라 사람들은 점점 더 책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고, 밤은 온통 이야기로 출렁거렸다.

"그날의 경험 때문에 <모모>(미하엘 엔데 작품)가 더 특별한 책이 된 거 같아요. 원래도 좋아해서 아껴뒀던 책인데 유명세에 비해 안 읽은 사람이 많더라고요.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그녀가 이 노래의 모모는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모모라고 일러주었음에도 나는 계속 엉뚱한 모모를 불러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디스토피아로만 그려내는 사람들의 두려움에 대해, '상상하는 힘' 하나로 여러 인간 종들(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등)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에 대해, 그리고 다시 태어나면 책은 덜 읽고 몸으로 부딪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던 그녀의 마지막 대답에 대해….

긴 생각의 끝에, 나는 우리가 막강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사피엔스이기에, 아무짝에도 쓸 데없는 꿈을 꾸며, 질 걸 뻔히 알면서도 도중에 멈추지 않고, 실패라는 깊은 우물에서도 지혜를 퍼 올릴 줄 아는 그런 존재이기에, 인공지능과의 최종 라운드에서 마침내 승리할 것이라는, 발칙한 상상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사피엔스의 한 개체로서 감히 상상하건데, 그녀는 분명 다음 생에 방랑자가 될 것이다. 또 다른 모모처럼.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호모아줌마데스는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입니다.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했고,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합기도 빨간띠 보유자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김경희 미디어홍보팀 간사가 촬영했습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독서, #아카데미느티나무,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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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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