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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15편에서 20편 남짓의 작품들이 화면해설로 제작이 되었는데, 올해는 부산 국제영화제 자체가 파행을 겪으면서 4편밖에 화면해설작업으로 제작되지 못했다.
영화 < 두 남자> 화면해설 작업중인 모습
 영화 < 두 남자> 화면해설 작업중인 모습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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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영화를 본다. 아니 영화를 듣는다.

"뿌우웅~"

기차소리의 긴 여운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어딜까? 기차역일까?"

잠시 후 나지막한 목소리의 해설이 들린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목소리를 들으니 남자다. 내용을 보니 아마 아직 어른은 되지 않은 십대 후반 청소년인 모양이다. 잠시 후 배경소리가 바뀐다. 굉장히 소란스럽다. 거리인가? 여러 명 목소리가 한꺼번에 겹쳐 나온다. 그리고는 철커덕, 뭔가를 여는 소리가 들린다. 어딜까? 무슨 문을 연 거지?

올해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마동석과 최민호(샤이니) 주연 영화 <두 남자>(감독 이성태)의 서두 부분이다. 눈으로 영화를 볼 때보다 더욱 신경을 집중해 영화를 듣고 있지만 궁금증은 점점 늘어난다. 내가 영화를 이렇게 눈을 감고 보는 이유는 '화면해설'을 하기 위해서다. 화면해설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영화를 읽어주는 일이다.

화면해설 작업중인 모습
 화면해설 작업중인 모습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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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영상예술이다. 배우들은 대사만이 아니라 표정과 눈빛으로, 행동으로 말한다. 그래서 대사 없이 표정과 눈빛으로 모든 것을 전달하는 배우가 훌륭한 배우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영화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영화가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즐기는 문화의 한 부분이 된 지금, 시각장애인에게 영화는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장르이다.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영화를 읽어주는 '화면해설'이다. 화면해설이 입혀진 영화를 '베리어프리 영화'라고 하는데, 베리어프리(barrier free)는 건축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로 장애인들도 편하게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물리적 제도적 장벽을 없애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용어인데 지금은 모든 분야에 확대돼 사용된다.

화면해설 작가는 대사가 아니라 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표현한 영상을 읽어준다. 주인공이 서 있는 공간이 어떤 곳이며, 주인공이 지금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읽어주는 것이다 . 위에서 제시한 <두 남자>의 서두 부분 화면해설은 이렇다.

효과음 / 기차소리

낮, 높은 빌딩들 사이 여러 개의 선로가 넓게 펼쳐진 용산역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지하철과 열차가 번갈아 지나간다

효과음 / 기차소리

검은색 큰 백팩을 멘 진일,
용산역 달주차장 난간에 기대 선로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목구비가 오똑한 10대 후반의 얼굴, 담배를 피우고 있다 .

진일 /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시각장애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간과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화면해설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다. 영상에 보이는 여러 물건과 사람과 상황 중에 어떤 것을 먼저 표현할 것인가? 어떤 단어로 저 상황을 표현해야 가장 적확한가?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배우들의 대사를 방해하면 안 되고 대사와 대사 사이 짧은 시간에 중요한 정보를 써야 한다. 때문에 화면해설 작가가 되려면 일정한 교육과정을 마쳐야 한다.

화면해설 대본
 화면해설 대본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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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2010년부터 상영되는 작품 가운데 일부를 선정해 화면해설 작업을 해서 상영을 해 오고 있다. 2010년 5편을 시작으로 2011년부터 보통 15편에서 20편 정도를 화면 해설작업을 한 뒤 상영해 왔다.

2011년, 화면해설 작업에 참여하고 난 뒤 가진 쫑파티에서 한 시각장애인이 즐거워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동안 영화를 좋아해 극장엘 자주 갔었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 자신이 이해한 것이 늘 틀리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화면해설된 작품들을 보니 너무 좋아서 10편 넘게 화면해설 작품을 다 봤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매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이 되면 화면해설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 한 편의 영화를 화면해설을 하려면 같은 장면을 서너번은 돌려봐야 한다. 이 장면에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무엇부터 묘사를 해야 다음 대사가 이해가 될지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 작품 <두 남자>는 싸우는 씬이 많아 더 어려웠다. 싸우는 씬에서는 누가 누구를 때리고, 어디를 때리고, 누가 뻗었는지 설명을 해야 하지만 중간 중간 싸우는 효과음 자체를 다 덮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화면해설한 대본을 심의중인 모습
 화면해설한 대본을 심의중인 모습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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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각장애인에게 들은 말을 생각하면 화면해설을 할 때마다 책임감을 더 느낀다. 같은 영화라도 화면해설버전이 다른 작품을 보면 감동이 다르다는 것이다. 누가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서 영화의 느낌이 시작장애인에게 다르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화면해설작가도 시각장애인에게는 엄연히 영화의 한 제작자인 셈이다. 화면해설 대본이 완성되면 대본이 과연 잘 됐는지 심의과정을 거친다, 심의과정에는 시각장애인이 참가해 화면해설을 들으면서 영화를 이해할 수 있는지를 검증한다.

심의가 끝나면 대본을 성우가 녹음을 한다. 이렇게 화면해설이 입혀진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면 시각장애인은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영화 두남자 화면해설 녹음중
 영화 두남자 화면해설 녹음중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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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매년 15편에서 20편 남짓의 작품들이 화면해설로 제작이 되었는데, 올해는 부산 국제영화제 자체가 파행을 겪으면서 4편밖에 화면해설작업으로 제작되지 못했다. 시각장애인들이 부산 국제영화제를 함께 즐길 기회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좋은 영화 한편은 때로 백마디 말보다 더 따뜻한 삶의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인생의 묵직한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내가 하는 화면해설 작업이 그 어떤 시각장애인에게 그런 좋은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시간에 쫓겨 밤을 새며 같은 화면을 여러 번 돌려보고, 적확한 단어를 찾아 사전을 찾는 고민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다만 좋은 영화를 맘껏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영화를 좋아하는 시각장애인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라며, 아울러 내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는 더 많은 작품들의 화면해설 작업을 하느라 분주해 지기를 미리부터 바라본다.


태그:#부산 국제영화제, #화면해설, #영화 두남자, #마동석, #샤이니 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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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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