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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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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본관은 비무장이다. 이제부터 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너희가 보기에 불충(不忠)했다면 내 너희의 칼을 맞으마. 안 그러면 칼을 놓고 쓸데없는 살상을 피하도록 하자구나. 인명은 소중한 것이다."

풍천의와 신렵이 어느새 다가와 예진충의 좌우에 섰다.

"나는 금의위을 이끌고 계신 모빈 장군의 밀지(密旨)를 받고 동창에 잠입한 사람이다. 환관 세력의 폐해는 전대 헌종 황제 시절 환관 왕직(王直)이 동창도 모자라 서창(西廠)을 만들고는 권세를 휘두르며 조정을 농락한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알고 있다.

본디 황상께 직보(直報)하는 창위(廠衛)는 대명제국의 특징으로 황상의 오른팔과 왼팔과 같은 기관이다. 그러나 영락대제 이후 창(廠)은 성하고 위(衛)는 점차 쇠했다. 그 이유는 환관이 이끄는 창은 황상의 곁에 머물고, 무인이 지휘하는 위는 궁성 밖으로 나돌기 때문이다. 황상께 통하는 어전의 문고리를 누가 잡느냐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뒤집히고 조정의 운세가 결정된다면 이는 천하의 웃음거리가 아니겠느냐.

다행히 영명하신 현 홍치대제께서 등극하신 후 서창을 폐하고 동창의 세를 견제하려 금의위와 도찰원에 힘을 보태고 계신다. 그러나 대명(大明) 건국과 함께 깊이 뿌리내린 환관의 세(勢)를 일거에 뽑는 다는 건 쉽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다. 환관은 환관대로 황상을 보필하는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부 노순광은 각신(閣臣)들의 소(訴)에 의해 태감 직을 놓은 이후 스스로 반성하기는커녕 제 수하를 허수아비 태감 직에 올려놓고는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

동창은 본시 황상을 보필하고 어지(御旨)를 전하는 기관이라 무력이 필요하지 않은 터 그러나 상대부 노순광은 자신의 탄핵을 비롯한 동창의 세가 약해지는 원인이 무력이 없는 탓이라 여기고 급기야 은화사라는 무력 기관을 비밀리에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현 태감 군제상도 겉으로야 승인을 했지만 이것이 상대부의 의중이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은화사 팔년 동안 그들이 한 짓이 무엇인가. 충신을 암살하고, 자객을 보내 정적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한 게 전부 아닌가. 자네들 모두 금의위 출신인 걸 알고 있다. 무반 시험을 거쳐 황궁 친위대인 금의위에 처음 배속 받았을 때의 감격은 누구나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후 동창의 비밀조직 은화사에 차출되고 나서는 어땠는가? 누구는 더 큰 권세를 쥐게 되었다고 좋아하지만, 누구는 불명예스럽다고 부끄러워했다.

은화사 안에서도 강호인과 금의위 출신으로 나뉘는바 금의위 출신들은 오히려 홀대를 받고 있다. 왜 그런지 아느냐. 환관들이 사감(私感)으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황궁 근위대 출신인 너희보다 출신이 불분명한 강호인들이 써먹기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너희 금의위 출신들은 저들이 중요시 여기는 일에 배제되고 하찮은 경호에 동원되거나 개인의 호위에 부려먹지 않는가. 자, 보아라. 최고의 금군이었던 너희가 한낱 불알 없는 자의 가마나 메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느냐.

결정해라. 수염 없는 자들의 개가 되어 아무나 물어뜯을 것이냐, 다시 명예로운 금의위로 복귀할 것이냐. 여기 계신 풍장반은 금의위 교위이시고 신영반은 금의위 정주지역 책임자이시다. 이번 일로 모빈 장군으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아 나를 도운 것이다."

예진충의 한바탕 설교가 끝나자 가마를 메고 온 호위무사들은 모두 검을 풀어 땅에 놓았다. 곧이어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는 그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예 총관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지당하십니다. 저희들 모두 금의위로 복귀하기를 희망합니다."

"너희들 모두 금의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지휘사님께 건의 드리마. 모두 일어나거라."

예진충이 부드럽게 말했다.

호위무사들을 다독인 예진충이 상대부의 평교자에서 퉁소와 도기를 꺼내 관조운과 혁련지에게로 왔다.

"두 분 관 소협과 혁련 낭자께서는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더불어 사숙되는 담대협의 불행에 유감을 표합니다."

예진충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진인의 유품이 강호의 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권세와도 관련된 일이라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관조운도 포권의 예를 표하며 답했다.

"이렇게라도 일을 꾸미지 않았더라면 상대부란 자는 황궁에서 옴짝 않거나 나오더라도 경부 밖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오. 부디 두 분이 이용당하셨다고 생각하지말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사문의 일인지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관조운이 말했다. 

"이 기물은 귀 사문의 귀중한 유품이오나, 창위의 주목을 받았고 환관 세력의 귀에 들어간 만큼 향후 분란 소지를 없애기 위해 폐기하라는 금의위 지휘사 모빈 장군의 엄명이 계셨습니다. 사문(師門)의 입장에서는, 나아가 무림천하로 볼 때 아주 소중한 보물이오나, 천하의 풍파를 잠재운다고 생각하시고 본관의 처분에 두 분 해량 바라오."

예진충의 말에 관조운과 혁련지은 달리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설령 있다한들 나라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조운이 혁련지를 바라보자 그녀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총관님의 재량에 따르겠습니다."

관조운이 답하자 예진충은 문병을 땅바닥에 패대기쳐 산산조각을 내고 퉁소 역시 조각조각 내고는 호위무사에게 던지며 말했다. 태워 없애라!

"그림과 부채는 직접 처분하지 못했지만 정황 상 폐기나 마찬가지라고 보네."

예진충이 이어 말했다.

"그나저나 자네들의 사문에 심심한 표하는 바이네. 진인의 네 제자 모두 순명(順命)을 받들지 못하고 비명횡사하셨으니, 자네들의 심정이 오죽하랴. 무림인에게 침상에서 천수를 맞이하는 것만한 복이 있을까. 참으로 일세무망(一世無望)이로다. 나 역시 사문의 일로 심적 고통을 받아야 할 업보가 생겼다네."

어느덧 예진충의 말투가 하대로 바뀌었으나 관조운과 혁련지에게는 오히려 푸근하게 느껴졌다. 

"혹시 ……아까의 대결하신 분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혁련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예진충이 입을 열지 않았지만 혁련지는 그의 눈을 보고 알았다.

갑자기 관조운이 소리 높여 말했다.

"아니, 저 분들은? 탑림에서……?"

풍천의와 신렵이 다가오면서 말했다.

"껄껄껄. 그렇소이다. 두 분이 탑림에서 소림승들의 나한진에 갇혀 곤궁해 처해 있을 때 본관과 여기 신영반이 나선 것이올시다."

풍천의가 걸걸한 목소리로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여태 저희 뒤를 밟은 것이옵니까?"

혁련지가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선 사과 드려야겠군. 향적암에서부터 두 분의 행동을 쭉 지켜보았소. 덕분에 유품의 행방을 잃어버리지 않고 여기 왔소이다. 이런, 그러고 보니 사과에 앞서 감사부터 드려야겠소이다. 하하하." 

신렵이 낭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시 두 분 대협 덕분에 소림의 진(陳)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관조운이 말하며 포권을 취하자, 혁련지도 포권을 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두 사람 이번 일로 몸과 마음의 고(苦)가 자심했던 걸로 아네. 뜬세상 같은 강호의 일일랑 관여 말고 본업으로 돌아가시기를 권하는 바다. 강호에 먼저 발을 디딘 자로서 하는 충고라네."

예진충이 말하자,

"강호 선배님들의 조언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관조운이 답했다.

"뒷일은 우리가 마무리 할 터이니 두 사람은 먼저 자리를 떠나게."

예진충이 마무리를 지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예진충과 풍천의 그리고 신렵을 향해 일일이 읍을 하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길을 따라 내려갔다.

두 남녀 가는 길을 보름달이 환히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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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다음회는 10월5일(수)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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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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