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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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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장> 

예진충은 장검의 끝을 땅으로 향한 점검세(點劍勢)를 취했다. 검을 점찍듯 찌르고 한쪽으로 치우쳐 상대의 반격을 피한 다음 재빨리 전진해 부딪치거나 흩어지며 살수를 전개하는 수(手)다. 이 검법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행(斜行)이 백미인데, 오른다리와 오른손을 앞으로 향해 내딛고 뒷발을 끌어당기는 보법을 전개해 풀밭을 두드려 뱀을 모는 발초심사(撥草尋蛇)로 격하는 것이 일초식이다. 무영객은 솥을 들어올리는 자세인 거정세(擧鼎勢)로 맞섰다. 오른다리와 왼손을 평대(平擡)로 취하고는 상대의 정면을 당겨 베거나 아니면 쳐내어 가운데로 살(殺)하는 초식이다.  

그들은 칠팔 보 간격을 유지한 채 꼼짝 않고 서 있다. 팽팽한 긴장이 둘 사이에 흘렀다. 어느 한쪽도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흘렀을까. 지켜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긴장감을 못 이겨 땀이 밴 주먹을 슬며시 폈다. 

드디어 예진충이 움직였다. 슬그머니 발을 떼어 옆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았다. 간격은 칠팔 보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반바퀴 쯤 돌았을 때 무영객이 자세를 장도고용(藏刀賈勇)으로 바꿨다. 도를 거꾸로 쥐고는 도신을 옆구리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집어넣었다. 도를 숨기고 전신이 노출되는 자세다. 대결의 자세가 아니라 뒷짐을 진 한가한 모양새다. 그러나 도를 쥐지 않은 오른손은 검지와 중지를 쫙 펴고 약지와 소지는 말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한 바퀴를 돌았다. 두 바퀴를 돌았다. 마치 태엽을 감는 기계처럼 두 사람은 똑같은 보법과 똑같은 자세로 상대를 바라보며 원을 그렸다. 마침내 무영객이 한 발을 성큼 내딛더니 뒷발로 앞발의 뒤꿈치를 차듯 전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별 다른 초식이 없이 손목 머리치기의 단순한 일격으로 들어온 것이다. 예진충은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휘검으로 쳐냈다. 번쩍, 도와 검이 부딪치면서 불꽃이 일었다. 동시에 챙, 하는 소리가 퍼졌다. 무영객은 단순 일격을 취한 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같은 간격이 유지됐다. 

검객들은 한 번의 부딪침으로도 상대방의 기량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딪침이 꼭 검과 검의 교환에만 있는 건 아니다. 검에 의존 자는 검끼리의 부딪침으로 상대를 가늠하지만, 검을 넘어선 자는 그 전에 상대를 헤아린다. 검의 부딪침에 앞서, 눈과 눈의 교환이 있고, 세(勢)와 세의 겨루기가 있고, 숨과 숨의 비교가 있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뭉뚱그린 기(氣)와 기의 대결이 있다.

무영객과 예진충은 이 과정을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그것은 수면은 고요하지만 물밑에선 급속한 소용돌이가 이는 것과 같았다. 처음 눈과 눈이 교환됐을 때 서로의 눈길에서 똑같이 무심(無心)을 읽었다. 무심한 눈길. 이건 노인이 항상 강조하는 것이다. 눈에 현혹되지 말고 눈에서 길을 찾으려 하지 마라. 눈에 감정을 담지 말고 눈에 힘을 주지 마라. 눈길을 무연히 하라. 검의 자유로움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둘 다 상대의 눈길에서 아무 것도 읽지 못했다. 

세와 세의 겨루기에선 처음엔 예진충이 미세하게나마 주도했다. 무영객의 거정세는 항룡(亢龍)이 물을 박차고 나가듯 힘을 실어 상대를 압도하려 했지만, 예진충의 비어 있는 점검세가 항룡의 솟구침을 허공에서 맴돌게 만들었다. 승천하지 못한 용은 추락하게 되어 있다. 무영객은 자세를 바꾸려다 틈을 주기가 싫어 거정세를 유지했다. 그런데 예진충이 움직였다. 원진을 그리며 탐색의 시간을 늘이려는 것이다.

그 틈에 무영객은 장도고용세(藏刀賈勇勢)로 변했다. 예진충보다 더 비어 있는 자세다. 대저 대결이란 한쪽이 공세를 취하면 다른 한쪽은 수세로 막고, 이어 수세가 공세로 전환하면 공세는 수세로 바뀌는 것이 싸움의 자연스런 흐름이다. 그런데 둘 다 비어 있는 자세가 되면 공방의 흐름을 벗어나게 된다. 초반 미세하게 밀렸던 무영객의 세가 장도고용으로 더 크게 비움으로써 예진충의 세를 안아 버렸다.

숨과 숨의 비교에선 우열을 다툴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상대의 호흡을 파악하려 했으나 귀에 들리는 건 자신의 숨소리밖에 없었다. 노인은 말했다. 상대의 박자(拍子)를 교란하고 흐트러뜨릴 수 있는 자가 승리한다고. 박자는 호(呼)와 흡(吸) 사이, 그 간격에서 나온다. 박자는 검의 속도와 변화를 결정한다. 그래서 경지에 이른 자는 단 한 번의 검으로 승부를 결정짓는다. 일박(一拍)으로 관통하는 것이다.

고수들은 상대방의 호흡 속에서 검의 경지를 헤아리고, 상대의 호흡과 어우러지는 자신의 호흡에서 승부를 가늠한다. 들숨과 날숨 사이가 고요하면 검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야 자신을 오롯이 검에 실을 수 있다. 그때의 검은 외물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다. 검과 내가 일치하는 것이다. 

눈길, 자세, 호흡, 이들이 어우러져 기를 형성한다. 기의 대결은 무영객이 먼저 도발했다. 상대의 보법을 흐트러뜨리고자 일직선으로 전진하며 머리치기를 한 것이다. 마른하늘을 느닷없이 가르는 번개와 같았다. 하지만 예진충도 흔들림 없이 검을 상장(相藏)으로 엇비슷이 돌려 도를 튕겨냈다.

무영객은 상대의 검이 자신과 비슷한 박자로 움직인다는 걸 알았다. 예총관이라고 했나? 그러고 보니 금릉의 은가 지하에서 잠깐 마주쳤던 자 아닌가. 그때도 어둠 속에서 자신과 이 자 사이에 팽팽한 기의 흐름이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 자였군.

이번에는 예진충이 선공(先攻)했다. 봉황이 날카롭게 부리로 쪼는 봉두(鳳頭)의 자세로 무릎 한 치 위 혈해(血海)를 노리고 들어갔다. 만약 상대가 뒤로 물러서면 백사농풍(白蛇弄風)으로 진격하고 옆으로 돌면서 반격을 취한다면 제미살세(齊眉殺勢)로 응한다. 첫 수에 상대의 동작을 감지하고 둘째 수에 살수를 전개하는 공격이다. 그러나 무영객은 공중으로 도약하여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킨 후 허공에서 현각허이(懸脚虛餌)로 두발을 엇갈려 차고는 내려오는 탄력으로 상대의 어깨를 사경(斜傾)으로 그었다. 무영객 역시 각술(脚術)은 허초이고, 두 번째 사경이 실초였다.

예진충의 검이 무영객의 도를 맞받았다. 이번에는 튕겨지지 않고 날과 날이 맞붙었다. 끼이끽, 끽. 날끼리 비벼대는 소리가 신경줄을 거슬렸다. 각자의 무기에 힘을 주었다. 힘과 힘이 비껴나며 옆으로 돌아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이어 한 호흡으로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무영객은 등골이 서늘했다. 상대의 첫 수가 부상당한 허벅지 혈을 정확히 노리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 동작이 부자연스러웠던 모양이다. 저 자 정도라면 이미 자신의 약점을 파악했으리라. 이번에도 저 자와 나의 호흡은 일치했다. 이상하다.

두 번의 교환이 이루어지자 예진충도 상대가 자신의 호흡과 맥락이 같다는 걸 알아챘다. 공격 박자도 거의 일치했다. 이상했다. 처음부터 이 자와의 기(氣) 싸움이 낯설지 않았다. 혹시, 이십여 일 전 은화사 은가에서 척숭을 베고 탈출했던 자? 의혹은 하나 더 있었다. 우연일까.

노인은 사문(師門)을 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제자가 아닌 살수를 키워 이용했을 뿐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르침을 받을 때도 혼자였다. 노인에게서 자신보다 앞선 제자가 있다는 얘길 얼핏 들었다. 둘 다 임무 수행 중 고혼(孤魂)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자는 자신이 잠적하고 난 이후 노인이 새롭게 거둔 제자인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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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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