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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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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장>

낙양(洛陽), 인간세의 면면한 흐름을 이곳만큼 드러낸 곳이 있으랴, 머나먼 고대 상(商)나라를 시작으로 주(周), 한(後漢), 위(魏), 진(晉), 북위(北魏), 수(隨), 당(唐), 량(後梁), 아홉 개 나라(九朝)의 도읍으로 흥망을 거듭하여, 한 나라의 웅대한 건국이 이곳에서 비롯하고 애잔한 망국도 이곳에서 끝을 맺으니, 기와 한 조각에도 사연이 담겨있고 기둥 하나에도 역사가 숨 쉬는 곳이 바로 낙양이다. 송대(宋代) 이후 멀리 강남과 북변으로 도읍이 옮겨져 권세가의 출입은 뜸해졌다하나 수대(隨代)에 물길이 트이는 바람에 사방팔방에서 물산이 모여 상업이 흥기하니 뉘라서 낙양을 사적(史籍) 저편으로 밀어낼 것인가.

낙양과 더불어 영고성쇠를 같이 한 몸이 있으니 바로 낙양의 핏줄 낙수(落水)다. 낙양이라는 이름조차 낙수의 양지바른 곳을 일컬음이니 낙수와 낙양은 본디 한 몸으로, 낙양 속에 낙수가 있고 낙수가 흘러서 비로소 낙양이 살아있음이라.

낙수는 장안 동쪽 화산(火山)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흐르다 세 개의 가파른 문(三門狹)을 지나 유유자적 흐르다 제원(際源)을 지나면서부터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한다. 순한 물길을 찾아 동에서 남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이내 잘못을 깨닫고 자신의 젖이 필요한 낙양으로 가고자 동북으로 다시 방향을 바꾸니 마치 구렁이가 몸을 뒤트는 꼴이 되었다. 구렁이 배꼽 근처에 고산(孤山)이 평지돌출하여 물길이 휘돌아치며 태극을 이루고 있다.

고산 정상에 팔각정 하나 외로이 서 있고, 그 밑으론 천길 벼랑과 낙랑장송이 어우러지매 그 풍광에 아, 하고 절로 감탄이 솟구쳐 문사는 붓을 들고 악사는 악기를 꺼내들곤 했다. 팔각정 현판에는 '수월정(水月亭)'이라 쓰여 있는데 누구는 조맹부의 글씨라 하고 누구는 왕휘지의 글씨라 하나 어느 눈 밝은 이의 도움을 얻진 않고선 그 진위를 알 수 없었다. 강물 위에 비치는 달이 아름다워 이와 같은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쯤은 소달구지 몰고 가는 아이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한때 팔각정 주련에 고관대작의 글귀가 마를 날이 없었지만 낙양이 도읍의 지위를 잃고부터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져 애써 찾아온 풍류객이 아니면 수월정의 풍취를 찬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 또한 시류의 덧없음이라.

유월 보름날, 어제까지만 해도 짓궂은 날씨에 한숨만 내쉬던 만월(滿月)은 낮부터 동쪽으로 물러가는 먹구름 행차에 나팔이라도 불어주고 싶을 만큼 희색이 되어 둥근 얼굴에 환한 화장까지 하고 있다. 간간이 행차 뒤끝이랄 수 있는 구름이 지나가긴 하지만 이는 그저 만월의 얼굴을 살짝 가리며 교태를 돋우는 합환선(合歡扇)에 불과할 뿐 교교한 달빛을 뿜어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았다.   

수월정을 향한 경사진 길을 바삐 오르는 검은 인영이 있다. 어깨가 넓고 허리가 잘룩해 다부지면서도 날렵할 것 같은 체격이었다. 얼굴 턱 선은 각이 져 단단해 보이는 데다 오른쪽 구레나룻에서 턱밑까지 가느다란 흉터까지 있어 자칫 험하게 보일 법도 하지만 막상 마주치면 눈빛이 고요해 그다지 사나워보이진 않았다. 경장 차림의 검은 옷을 입은 그는 허리에 가느다란 검을 차고 어깨에는 바랑을 메고 있다. 정상에 도달하자 그는 정자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공터 밖 소나무 숲에서 잠시 동정을 살피었다.

수월정 정서 방향 기둥에 등롱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한 흑의인은 입에다 손을 대고 소쩍새 울음소리를 연달아 세 번 울었다. 그러자 등롱 옆에 한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자그마한 키에 비단 옷을 입은 노인이다. 노인은 정자의 난간에 앉아 소쩍새 울음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흑의인이 공터를 가로질러 노인에게로 갔다. 그는 어깨에 멘 바랑을 통째로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바랑에서 대나무통 속의 그림과 부채 그리고 퉁소와 도자기를 꺼내 일일이 확인했다. 

"틀림없군. 수고했네. 내 일찍이 북쪽 기인의 소문을 들은 바 있지만 과연 그 제자답구나. 오늘밤만 무사히 보내면 자네와 약조한 것은 지켜질 것이네."

비단옷 노인 담곤은 감회에 젖었다. 사문과 사형에 대한 배신의 죄책감이 마음 한구석에 추가 되어 무겁게 짓눌렀지만 애써 무시하며 생의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스승 태허진인은 네 제자에게 각자의 그릇과 기질에 따라 무공의 전수를 달리 했다지만 따지고 보면 둘째 사형과 자신의 기량이 더욱 뛰어났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기(技)와 도(道)는 일치하지 않는다면서, 기(技)는 도(道)롤 따름으로써 성숙되고, 도(道)는 기(技)를 통해 스스로 완성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둘째 사형과 자신에게 기(技)에 치우치지 말고 도에 어긋나지 않은 가를 항상 살필 것을 주문하셨다.

무도에서 기예를 빼면 가부좌 틀고 앉은 선승(禪僧)과 무엇이 다를 바 있는가. 그러면서 무극진경을 저술함에 둘째 사형과 자신의 기예를 시험하고 난 후에도 진경의 소재를 결정적으로 알 수 있는 그림은 대사형과 둘째 사형의 그림에만 숨겨 놓았다. 스승님께서 진경을 저술하시매, 그 진의(眞意)가 일개 사문의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도의 궁극을 밝히려는 진리의 길에 있다하더라도, 자신으로선 아쉬운 측면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스승의 지시에 따라 기맥이 막힐 위험을 무릅쓰고 진기 운행을 시험했으며, 경혈이 요동치는 고통을 참아가며 운기를 시도했었다.

그렇게 진경의 삼고(三稿)까지 참여했는데 어느 날 스승님께서 더 이상 제자들의 도움은 필요 없다며 저작을 스스로 완성하였다. 그리고 둘째 사형과 자신에게 초고에서 삼고까지는 쓰레기나 매한가지일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으니 행여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하셨다. 아, 스승님께선 그릇을 이용할 줄만 알았지 그릇에 남겨진 얼룩을 왜 지워주시지 않으셨던가. 진경의 저술에 참여했던 둘째와 넷째는 아롱져 남은 진경의 무늬를 좇다가 결국 망신(亡身)의 지경에 이르렀다. 과연 스승님은 이를 예상치 못했단 말인가. 인정하기에는 스승님의 무심이 서운하고 부정하기에는 스승님의 한계가 서러웠다.

남은 건 스스로 극복하는 길 밖에 없었다. 강호의 의리니 강상(綱常)의 도리란 무엇인가. 은원(恩怨)과 선악(善惡)과 시비(是非)와 정사(正邪)는 다 무어란 말인가. 그것들은 내가 존재하고 난 후 나를 얽어매는 그물이 아닌가. 내가 무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이 의리와 도리의 그물 밖이라면 이 또한 운명이라. 그물 안에서 범인으로 살 것인가 그물 밖에서 무인으로 살 것인가. 어린 나이에 비천문에 입문하여 평생을 무를 닦으며 살아온 자신이기에 무를 벗어난 삶이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론은 자연스럽다. 자신에게 무공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이다.

"자네 부상당했는가? 발걸음이 썩 가볍지 못하군."

담곤이 무영객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에겐 생사만 있을 뿐 부상이란 없소이다."

무영객이 짤막하게 답했다. 무공을 잃었다지만 노인네의 눈썰미는 아직 살아있다. 채욱과의 대결에서 입은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발걸음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러 티를 내지 않으려 했는데 노인의 눈에는 보이는 모양이다. 다가오는 보법으로 무공의 깊이를 가늠하는 게 무림인의 습관인지라 달리 볼 것은 없지만, 부상을 당해도 당하지 않은 척하고, 임무를 완수하고도 모른척하는 것이 살수된 자의 태도이다. 기도(企圖)는 철저히 비닉(秘匿)하는 것이 살수의 법도인 것이다.

"달리 어려움은 없었나?
"살수에게 과정은 묻지 마시오. 결과로만 답할 뿐이오."
"나의 사질들은 어떻게 됐나?"
"귀하의 사질들은 내가 알 바 아니오. 어쩌면 현장에 있던 고수들에게 당했을지도 모르겠소이다."

무영객의 무뚝뚝한 답에 담곤은 약간 짜증이 솟기도 했으나 따지고 보면 그의 대꾸가 틀린 건 아니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그는 자신이 의뢰한 결과를 가져왔고, 사질들의 안위야 계약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자신과 무영객은 계약관계이지 상하관계가 아니다. 그것도 내일까지만. 오늘밤 수월정에서 마지막 남은 일만 끝내고 나면 이 무뚝뚝한 자와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약조한 대로 그에게 황금 열 관만 건네면 되고 그 일마저 자정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잠깐 쉬며 기다리게.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마지막 할 일이 무엇이오?"
"비룡문에 나를 무사히 경호해 주는 것까지가 자네와 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라네."
"그렇게 하오리다. 오늘 밤에 누구를 만나기로 했소이까?"
"그렇다네. 바로 이 유품 때문에 만나기로 한 사람이지, 나의 마지막이자 최대의 거래가 될 것이네."

"만나는 자와 다툼이 예상되오?"
"기본적으로 거래이니 만큼 그렇진 않을 걸세. 하지만 거래엔 왕왕 이견의 충돌이 있는 법. 자네의 무공을 뒷배 삼아 나의 패를 좀더 밀어붙일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해 자네한테 호위를 부탁하는 걸세."
"그렇다면 이에 대가도 따로 쳐주오."
"……"

담곤의 무영객의 제안에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 자의 주판알 두드리는 솜씨도 만만치 않다.

"말해 보게."
"다툼이 일어나 나의 무공으로 해결할 경우 애초 약조한 것에 이 할을 더해 주시오."
"…… 알겠네. 그런 상황이 발생할 경우 따로이 황금 두 관을 더해줌세."

담곤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망설이거나 계산하는 태도를 보이는 건 이 자를 흔들리게 할 수도 있다. 비록 계약관계이지만 믿음을 주어야 한다. 무공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상관없다. 물론 황금은 중요하다. 자신의 재기에 있어서 더 없이 중요하다. 황금 열 관은 비룡표국의 모든 재산과 맞먹는 가치다. 하지만 곧 있을 만남에서 이를 만회하고도 남을 거래가 있다. 그러니 이 자에 이 할 정도를 더해주는 것 또한 용납할 수 있다. 소탐대실이 되어선 안 된다. 무공의 회복이 최우선이요, 재물의 확보는 그 다음이다.

담곤은 해시(亥時)에 만나기로 한 손님을 기다리며 난간에 앉았다. 저 멀리 유유히 흐르는 낙수를 바라보았다. 낙수는 달빛의 애무를 받으며 애애(皚皚)한 교태를 뿜어내고 있다. 문득 저 강을 향해 낙화처럼 제 한 몸 날리는 것도 덧없는 생에 대한 멋진 복수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 아녀자 같은 애상! 담곤은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털어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길은 수월정 직벽 아래 회도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무영객은 마루 바닥에 좌정을 하고 호흡에 잠겼다. 풀벌레 소리만 찌륵 찌륵 찌르르 정적을 간질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석상처럼 꼼짝 않고 있던 무영객이 벌떡 일어나더니 난간 아래로 뛰어내렸다. 어느 틈에 뽑았는지 그의 손엔 도가 쥐어져 있다. 달빛에 하얀 날을 번쩍이는 협봉도가 유달리 날카로워 보였다.

"누구냣!"

무영객이 길 입구 숲을 향해 외쳤다.

"불청객이 오신 모양인데, 어둠 속에 계시지 말고 나서기 바라오."

담곤이 난간에서 일어나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 사숙님!"

숲에서 두 개의 인영이 뛰쳐나오며 동시에 소리쳤다. 유건을 쓴 서생 차림의 남자는 관조운이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 혁련지다. 담곤은 흠칫 놀랐다. 이들이 여기까지 오다니. 

덧붙이는 글 | 이번 주는 추석 연휴 관계로 쉽니다.
다음 주 월요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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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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