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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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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장>

무영객은 조복이 단 두 수만에 당하는 것을 보고는 상대의 무공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은화사 나부랭이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그자만 상대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대숲에 정체모를 자들이 잠복해 있다. 그들끼리는 적인지 동료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손에 넣은 유품을 노리는 게 틀림없다. 일단 자리를 뜨기로 했다. 조복을 벤 자의 무공으로 볼 때 자신과 우위를 쉽게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서생 일행과 은화사 요원 하나 그리고 대숲의 잠복인들까지. 자칫하면 이 모두를 한꺼번에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빠른 상황판단, 이것은 살수가 지녀야할 첫 번째 자질이다. 무공은 그 다음이다.

무영객이 움직이자마자 조복을 벤 자가 따라 왔다. 예상한 대로 그 자의 경신술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무영객은 은신술(隱身術)을 사용하여 굳이 따돌리자면 따돌리지 못할 것도 없지만 정면대결 또한 피하고 싶진 않았다. 금의위 무사답게 조복의 무공이 결코 얕지 않음에도 그자의 수법은 세간의 고수 그 이상이었다. 조복이 마음먹고 펼친 마지막 수는 중원의 정형화된 초식이 아니었다. 아마 요족의 비기일 것이다. 검의 대결에선 권술처럼 엉키지 않고 일진일퇴의 흐름을 따른다. 검은 권과 달라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취하는 전세(戰勢)가 허락되지 않는다. 작은 공격이라도 허용하면 몸이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조복은 작은 공격을 허(許)하고서라도 큰 공격을 위해 부딪쳐 갔다. 그리고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상대는 이를 읽고 있었다. 좌로 반보 이동하면서 몸을 회전시키고는 그 탄력으로 가볍게 뛰어오르며 단검으로 조복의 경동맥을 정확히 벴다. 심지어 분수처럼 치솟는 혈류를 예측하면서 피하기까지 했다.

무영객은 얼굴에 감겨오는 안개비 입자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일각을 달려간 후 무영객은 자실봉과 태실봉 사이 계곡에 도달했다. 계곡엔 바위가 즐비했고 그 사이로 계류가 흘렀다. 계류의 가장자리는 잔잔하되 가운데는 급류이다. 무영객은 가장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 섰다. 공터는 사방으로 한 장 정도로 평평하되 약간 경사졌다. 서쪽 계류 쪽으로는 훤히 열려 있고 북쪽에는 사람 두 길의 바위가 버티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은 느티나무와 굵은 소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다.

열 번 호흡할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그 자가 도착했다. 그의 손엔 두자 길이 중단검이 쥐어져 있다. 무영객도 협봉도를 뽑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 간에 눈길이 팽팽히 당겨졌다. 살기(殺氣)도, 분기(憤氣)도, 결기도 없는 눈길이 무심히 오갔다. 무심한 눈길 속에서 서로의 빈틈을 찾았다. 둘 다 겉으론 고요했지만 속으론 상대의 기를 제압하기 위한 심전(心戰)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그 자가 검을 거꾸로 쥐고 포권을 취했다.

"본인은 기주(冀州) 사람 채욱이오. 강호에서 약간의 허명을 얻었다지만 무예인(武藝人)에겐 부질없는 미망일 뿐, 우연히 만난 고수에게 검을 배우고자 하오."

채욱은 향적암 마당에서 대나무통을 빼앗는 무영객의 날랜 신법을 보고 속으로 감탄하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뛰쳐나가 대나무통을 잡은 동백웅의 경신술도 훌륭했지만, 동백웅의 손목을 걷어차 통을 허공에 띄우고 그 순간 낚아 챈 이 자의 수법은 더욱 놀라웠다. 그러던 차에 눈싸움까지 해보니 무인의 호승심이 불끈 솟았다.

강호의 무명(武名)이나 은화사 직임을 떠나,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비록 증인도 없지만 자신의 무를 걸고 겨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서 기 싸움이 시작되자 조금씩 밀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침이 말라갔다. 더 이상 흔들리면 호흡이 거칠어진다. 상대방이 눈치 채기 전에 감춰야 했다. 채욱은 강호의 예를 내세워 자신의 내밀한 떨림을 숨겼다. 

"이름 없는 은자이오, 검을 약간 쓰기로서니 본인도 한 수 배워볼까 하오."

무영객도 도를 거꾸로 잡고는 포권을 취했다. 이어서 무영객은 품에서 대나무통과 바랑을 꺼내 공터 한 쪽 구석에 놓았다. 이긴 자가 가져간다는 의미다. 이 기물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났지만 이제 대결의 이유는 기물에 있지 않았다. 기물은 승자의 전리도 아니고 패자의 상납도 아니다. 필요에 의해 누군가가 가져갈 뿐이다.

두 사람은 대결의 자세를 취했다. 무영객은 협봉도를 어깨 높이 수평으로 쳐들었고, 채욱은 팔을 앞으로 세우고 짧은 칼날 끝을 상대의 목젖과 일치시켰다. 둘 사이의 거리는 칠팔 보. 무영객이 좌로 반 보씩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채욱도 무영객과 정면을 유지하기 위해 좌로 움직였다. 한줄기 바람이 쏴아 불며 물안개를 걷었다. 햇살이 구름 사이로 비죽 내밀었다. 날이 개이자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리며 나타났다. 개천가에 노란 원추리가 무리지어 피어 있다. 무영객이 힐끗 나비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하압! 채욱이 짧은 기합과 함께 땅을 스치듯 낮은 자세에다 두 손을 뒤로 하고 다섯 보를 짓쳐들어갔다. 상체가 훤히 열리고 목이 드러나 있어 상대가 제자리에서 머리치기만 해도 검을 받아야하는 자세다. 그러나 무영객은 한 발 물러나며 손속의 교환을 피했다. 훤히 드러난 곳을 무턱대고 받아칠 만큼 어리석은 그가 아니다. 채욱은 무영객이 한 발 물러서며 격돌을 피하는 것을 보고 비연착령(飛燕捉蛉)으로 연속해 들어갔다. 제비가 잠자리를 취하듯 신속함으로 틈을 주지 않는 공격이다. 상대가 피하면 따라들어 가고, 막으면 부딪치고, 맞부딪치면 방향을 바꿔 상대의 측면을 공격하는 초식이다.

이번에는 무영객이 상체를 살짝 굽혀 검을 곧추세운 채 안면을 방어하며 상대방과 스쳤다. 챙, 금속성 소리의 여운이 길게 퍼졌다. 무영객이 상대의 검을 쳐내자마자 돌아서 반격하려는데 왼쪽 무릎이 살짝 꺾이면서 휘청했다. 순간 곤법(滾法)으로 상체를 둥글게 말아 전방 낙법으로 구른 다음 협봉도를 엇비슷하게 걷어올렸다. 상대는 자신이 스쳐지나가는 걸 알고 뒤꿈치로 자신의 오금을 찬 것이다. 만약 낙법으로 구르지 않았다면 이어지는 상대의 흔격(掀擊)에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무영객은 자세를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 오른쪽 등 날개죽지가 시원했다. 상대의 검에 옷이 베였다. 바람이 들어와 나풀거리는 모양이다. 음…, 자기도 모르게 침음성이 나왔다. 손가락 한마디 깊이만 더 들어갔어도 자신의 오른팔은 마비되었을 것이다. 심하면 반쯤 떨어져나가 너덜거릴 수도 있다. 등줄기가 서늘해진 건 바람 때문이 아닐 것이다. 

무영객은 일부러 나비를 쳐다보았다. 빈틈을 만들어 상대의 공격을 기다린 것이다. 고수는 일초에 통한다. 한 번의 초식 교환이면 서로를 파악할 수 있다. 상대가 들어오자 자신 같으면 들어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얼핏 스쳤다. 과연 들어오되 그냥 들어오진 않았다. 상체를 열고 들어와 유인했다. 자신이 그 수에 넘어가지 않자 이어지는 공격은 기괴했다. 변화 그 자체였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 각자 힘이 실려 있지 않다는 걸 감(感)으로 아는 순간 서로 지나쳐버리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게 일반적인 수순이다. 그런데 상대와 자신은 초식이 마무리되는 순간을 동시에 노렸다. 하지만 상대가 반에 반 박자 차이로 빨랐다. 그는 준비된 초식이고 자신은 순간적인 반응였다. 그 차이가 생과 사를 가를 뻔 했다.

채욱은 상대가 일부러 틈을 보여 유인한다고 보았다. 나비에 눈길을 주며 시선을 거둔다는 건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들어가지 않으면 속진 않되 이기는 것도 아니다. 결투에선 기세(氣勢)가 칠이요 기망(欺罔)이 삼이다. 일단 기로써 적을 제압해야 한다. 틈이 보이면 들어간다. 틈을 적이 만든 것이든 자신이 만든 것이든 구애받을 것 없다. 틈에 기회가 있다. 다음으로 속는 척 속인다.

허허실실 기기정정(虛虛實實 奇奇正正). 그는 상체를 열어놓고 들어갔다. 과연 상대는 첫 동작엔 반응하지 않았다가 두 번째 공격 비연착령의 뒤를 노렸다. 하지만 자신이 빨랐다. 뒤차기로 상대의 오금을 내지른 건 변칙이었다. 동시에 몸을 돌리며 흔격으로 베었다. 거기서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 쓰러지는데, 상대는 상체를 구르며 곤법(滾法)으로 벗어났다. 놀라운 순발력이요 대단한 감각이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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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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