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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최고중진연석간담회를 주재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고 있다. 백보드엔 '섬기는 머슴 행복한 국민' 문구를 내걸었다.
▲ '섬기는 머슴 행복한 국민' 새누리 백보드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최고중진연석간담회를 주재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고 있다. 백보드엔 '섬기는 머슴 행복한 국민' 문구를 내걸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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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이 지난 지 이틀이 됐지만 정치권은 여전히 '광복절'로 뜨겁다.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오전 광복절 경축사에서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한 대목이 논란거리가 됐다.

박 대통령의 발언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같은 날 오전 페이스북에 올린 글 때문에 더 논란거리가 됐다.

문 전 대표는 "요즘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건립됐으므로 그날을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를 왜곡하고 헌법을 부정하는 반역사적, 반헌법적 주장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새누리당은 다시 문 전 대표의 발언을 문제삼고 나섰다.

정진석 원내대표가 17일 오전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간담회에서 "문 전 대표는 (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 중 건국관련 부분과 관련해서 '얼빠진 주장'이라고 공격했다"며 "박 대통령께서 '오늘은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표현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 원내대표가 운을 떼자 다른 참석자들도 너도나도 '건국절 법제화' 얘기를 꺼냈다.

심재철 국회부의장 "8.15는 광복절이면서도 건국절로써 모든 사람이 나라를 다시 한 번 새겨낼 수 있도록 법제화 작업이 진행돼야 한다."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 "다시 한 번 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법제화를 하는데 국민들의 중지를 모아야 한다."

나경원 의원 "건국절을 인정하지 않는 주장들은 사실상 광복 이후의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인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거나, 또는 그 정통성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조원진 최고위원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때 건국과 지금의 건국절과의 차이가 뭔지 곰곰이 짚어볼 필요가 있다."

유창수 최고위원 "1945년 2차 대전 종식 이후 대한민국만큼 피식민지에서 성공한 나라가 없다. 이런 위대한 나라에 건국절조차 아직 제 정되지 못해서 이 부분을 가지고 야당에서 논쟁을 걸고 정쟁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 참 안타까운 마음이다."

참석자들이 '건국절 법제화'를 집중 거론하자 이정현 대표도 "이 문제는 정말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국회 5분 발언을 포함해서 정식으로 국민들이 생중계로 보는데서 공개토론하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공론화 의사를 밝혔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주재한 최고중진연석간담회에서 정우택 의원의 덕담을 듣고 있다. 오른쪽은 정진석 원내대표.
▲ 덕담 듣는 이정현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주재한 최고중진연석간담회에서 정우택 의원의 덕담을 듣고 있다. 오른쪽은 정진석 원내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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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가 처음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인정 또는 격상시키느냐의 문제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보는 관점에 따라 찬반이 명확히 갈리는 사안이다.

정진석 "문재인이 박 대통령을 '얼빠진 주장'이라고 공격", 사실은...

다만, 잘못된 사실 관계가 정쟁을 격화한 부분은 분명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문 전 대표가 (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 중 건국 관련 부분과 관련해서 '얼빠진 주장'이라고 공격했다"고 말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문 전 대표의 글이 올라온 것은 15일 오전 10시 17분. 언론이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공개하기 시작한 시점(10시 25분)보다 앞섰다.

그러나 문 전 대표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사전입수한 뒤 연설 내용을 우회적으로 비판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문 전 대표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있는 김경수 의원(경남 김해을)에게 전화로 물어봤다. 김 의원의 설명은 이랬다.

"문 전 대표가 백령도 1박2일 방문한 뒤 13일 양산 자택으로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인천 자유공원을 들렀다. 맥아더 장군 동상 있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그곳이 원래는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한성임시정부수립을 결의한 곳이다. 그런 곳에 기념물이나 표지가 전혀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는데, 그곳을 다녀온 소회를 써놓았다가 광복절 아침에 올린 것이다."

김 의원은 "박 대통령과 무관하게 쓴 글인데, 마침 대통령이 '건국 68주년'이라고 언급하는 바람에 그런 오해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새누리당의 고위관계자에게 물어봤다.

- 이정현 지도부가 들어선 뒤 '민생 챙기겠다'는 얘기를 많이 하더니 오늘은 왜 갑자기 '건국절 법제화'로 선회한 거냐?
"이념 갈등보다는 민생에 주력하는 게 대선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는 쪽으로 운영 기조를 모았는데, 오늘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건국절' 얘기를 하는 바람에 그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의 사태는 문재인 전 대표가 먼저 불을 지핀 게 아니냐? 대선후보라는 분이 좋은 말로 문제제기하면 될 것을, 대통령에게 '얼빠진 주장'이라고 하는 건 뭐냐?"

- 문 전 대표 측은 박 대통령을 겨냥한 글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문 전 대표를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실 당에서도 이 문제를 확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국민들 먹고사는 문제로 싸워야지,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잠깐 언급한 걸 가지고 계속 정쟁을 벌일 수는 없다. 이쪽에서 불을 끌 의지가 있으니 상대방(야당)도 화답해주길 바란다."

박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관련 보도들을 돌아보니 "문재인이 박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건국'이라고 쓴 표현을 '얼빠진 주장'이라고 질타했다", "문재인의 글은 박 대통령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해석된다", "문재인이 박 대통령에 날을 세웠다"는 식의 서술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하나같이 사건의 전후 관계를 무시하고 "A가 B를 공격한 게 틀림없다"는 통념에 기반한 오보들인 셈이다.

정리하면, 문 전 대표는 박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론 오보들이 여당 지도부(그것도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할 수 없는 '친박' 지도부)에게 "받은 만큼 되갚아줘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그것이 '건국절 법제화'를 지금이라도 밀어붙여야 한다는 여당 강경파 의원들의 바람과 만나 17일 오전 새누리당의 해프닝을 빚어냈다.

물론, 문 전 대표와 박 대통령의 역사관 차이는 오래 전부터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둘의 대립을 두드러지게 하는 언론의 해석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대방이 공격하는데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대결 의식이 팽배한 정치 풍토를 손가락질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바꾸는 데 언론의 역할은 어떠했는지는 업계 종사자인 기자도 함께 생각해볼 대목이다.


태그:#이정현, #문재인, #광복절, #건국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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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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