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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만 나면 나를 불러올리는 사람이 있다. 불러올리는 이유는 '밥 같이 먹자'인데 레퍼토리는 매번 다르다.

국수를 삶았으니 오라기도 하고, 맛있는 고등어를 구웠으니 오라는 경우도 있다. 그 분 특기인 비빔밥을 했으니 올라오라는 때도 있다. 비빔밥은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종류가 여럿이다. 언젠가 원고료로 농산물을 받았는데 곤드레나물이 있어 갖다드렸더니 바로 다음날 곤드레나물 비빔밥 먹으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최근에는 나를 불러올리는 횟수가 부쩍 잦아졌다. 집을 좀 넓히는 공사를 하는데 일꾼들 밥을 손수 하다 보니 노 부부가 드시던 평소 밥상과는 달리 반찬이나 후식이 거나하게 준비된다. 내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게 아무 부담 없다는 것이 더 자주 나를 부르는 구실이다.

겨자국수요?

며칠 뜸하기에 문자를 보냈다. '요즘은 특별히 맛있는 걸 드시나 봐요? 얼마나 맛있는 걸 드시기에 나를 안 부르시나요?'라고. 그랬더니 득달같이 전화가 왔다. 어서 올라오라고. 겨자국수를 끓였다는 것이다. 겨자국수는 처음 들어본다. 국수를 만들 때 밀가루 반죽에 겨자를 넣고 만드나? 비빔국수로 해서 소스를 겨자로 하나? 아니면 육수에 겨자를 넣을지도 몰라.

언젠가는 국화된장을 내 놓으셨고 겨자김치도 밥상에 올린 적이 있다. 진달래호박부침개, 들깻잎게찜도 있었다. 처음 등장하는 메뉴가 밥상에 올라올 때는 각오를 해야 한다. 음식 맛에 대한 특색 있고 개성 있는 대꾸를 준비해야 한다. 의례적인 인사말은 기가 막히게 식별하시고는 바로 2차, 3차 심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고 500미터쯤 되는 그 분네 집으로 올라갔다. 물론 자전거를 끌고 나오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겨자국수를 검색해봤는데 없었다. 겨자소스 비빔국수는 있어서 대충 그에 대한 상식을 갖추고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국수발이 샛노란 국수가 나왔다. 먼저 아는 척을 하면 안 된다. 그러면 그 분이 유장하게 메뉴설명 할 기회를 빼앗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밥상에는 집 고치는 일꾼 둘이 같이 앉았다. 무주 안성면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분들인데 어떤 때는 세 분이 오고 어떨 때는 혼자서 일하기도 한다. 수행공동체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라 말과 행동이 그림자처럼 고요하다. 맑디맑은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늘 담겨있다. 그 분들이 자리에 앉자 노부부와 함께 밥상은 다섯 식구의 대가족이 됐다.

다섯 사람이 둘러 앉은 밥상.
 다섯 사람이 둘러 앉은 밥상.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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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실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맛 좀 보세요."

가야실댁은 안주인님 별칭이다. 내 기억으론 별칭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 이 별칭은 1년여 된 것이다. 작년 이맘때 우리가 사는 이 덕유산기슭 산골짜기에서 가야의 제철유적이 광범위하게 발견된 것이다. 남원 운봉지역 제철유적을 능가하는 규모였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를 중심으로 지표조사를 했는데 제철유적이 30여개소가 넘는다는 발표가 있었다.

조사단이 우리 집을 지나 윗길로 여러 번 드나들면서 '가야실댁'이 작명된 것으로 기억된다. 4년 전 이곳으로 귀촌하고 나서 별칭이 국화댁, 아붕가, 가야실공주를 거쳐 가야실댁으로 안착된 듯하다.

아무 말이 없었더라도 정성을 기울여 맛을 보고 소감을 준비해야 하는데 특별히 가야실댁의 맛 좀 보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나는 더 신경을 쓰면서 국수 몇 가닥을 집어 들었다. 맛에 대한 품평을 할 때는 신경 써야 할 대목이 있다. 입에 넣자마자 맛있다고 하면 안 된다.

삼키지도 않고 어떻게 맛을 아냐는 말씀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맛있다'고만 해서도 안 된다. 그랬다가는 어떻게 맛있냐는 2차 질문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주 구체적으로 맛을 얘기해야 한다.

가야실댁 밥상에선 이렇게 행동하는 게 좋다

겨자국수 한 그릇.
 겨자국수 한 그릇.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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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중요한 것이 있다. '맛있냐'는 물음이 나오기 전에 먼저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가야실댁이 지어내는 최고의 표정을 볼 수 있다. 오직 이 한 순간을 위해 존재했다는 그런 표정 말이다. 그런데 이 날은 내가 딱 한 박자가 늦었다. 꿀꺽 첫 국수 면발을 삼기고 잠시 맛을 음미하면서 대답을 고르고 있는데 가야실댁의 말이 더 빨랐다.

"맛있어요? 맛있죠? 괜찮아요? 어때요?"

다들 나를 쳐다봤다. 가야실댁의 심문에 익숙해졌는지 내 대답을 참고하려는 눈치로 두 일꾼도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입 안에 남은 국수 잔챙이를 혀로 훑어내서 다시 소리 내서 꿀꺽 삼켰다.

이때 김서방이 나섰다. 가야실댁의 첫 남편이자 마지막 남편일 가능성이 확실하며 연식도 상당히 오랜 남편이다. '김서방'은 가야실댁만 부르는 호칭이다. 우리는 다들 전북은행 고위직으로 있다 정년퇴임한 그 분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가야실댁은 새댁 시절부터 지금까지 반 백 년을 '김서방'이라 부른다.

"여보 대답 꼭 해야 돼? 식사하시는데 자꾸 물어보면 어떻게 식사해요."

그 말을 들은 우리의 너그러운 가야실댁은 호호호호 웃으면서 드시라고 손짓 눈짓 고개짓까지 하셨지만 나는 분위기 전환용 대답을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 쏟아냈다.

"저는 가야실댁의 심문에 진술을 거부할 수도 있고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도 있으나 제 스스로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오직 사실 그대로만 말할 것이며 혹시라도...."

"더 먹으라"는 가야실댁.
 "더 먹으라"는 가야실댁.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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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밥상에는 폭소가 터졌다. 장터 튀밥 집에서 강냉이가 튀어오르듯이 웃음꽃이 폭발했다. 국수 몇 가닥도 누군가의 입 속에서 탈출을 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창의적인 진술을 계속했다.

"... 혹시라도 그것이 진실이라 할지언정 가야실댁을 실망시키거나 맥 빠지게 했을 경우에는 밥솥에 남아있는 밥을 다 먹겠으며 ...."

늘 진중하고 웃을 때마저도 이를 보이지 않는 김서방도 밥상위에 젓가락을 내려놓고 웃어 댔다. 일꾼 중 한 분인 여성분이 말을 보탰다. 미란다의 원칙은 질문자인 수사관이 먼저 상대에게 고지하는 것이니까 앞으로 가야실댁은 맛있냐고 묻기 전에 꼭 진술거부권과 변호사선임권을 보장하셔야겠다고 큰 일 났다며 측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남자 일꾼분이 거들고 나왔다.

"진술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수도 있으며.... 진술의 질과 양에 따른 포상제를 실시할 것이므로..."

점잖던 김서방도 일흔넷의 체통도 잠시 내려놓고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덧붙였다.

"식사를 거부할 수도 있으며..."

나는 이 대목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식사를 거부한다... 아니, 가야실댁이 만든 음식을 거부한다? 감히? 나는 가야실댁의 표정 살피기를 포기하고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마무리 발언을 했다.

"다만, 진술 타이밍을 놓치거나 진술내용이 가야실댁의 마음에 안 들 때는 영장 없이 밥그릇을 압수할 것이며 최장 1시간 동안 뒤주 속에 구금 할 수 있고..."

물론 시골 어디에도 뒤주가 없어진지 오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의 '가야실댁 밥상 앞에서의 신미란다원칙'이었다. 전라북도 전통음식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던 가야실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북작가회의 <작가의 눈 2016 특별호>에도 실립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가야실댁,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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